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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세미나
일시:2019년 8월 28일 수요일~29일 목요일
장소:경남 하동 켄싱턴 리조트, 쌍계사, 경남 진주 촉석루
* 화개장터
금년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는 고 강석호 회장 추모 1주기 행사로 그의 고향 경남 하동에서 개최한다. 하동에 도착하여 잠시 세미나장 근처에 있는 화개장터에 잠시 들렀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교류지점이 되었던 곳이다. 경남 하동군이나 전남 구례군이 마주하고 있다. 지금 내가 선 곳은 하동이다. 영남과 호남의 화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장터이다. 실제로 이곳 상인들과 소비자들은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섞여 있으며 지역감정 없이 정답게 사투리를 나누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만, 현대의 화개장터는 예전부터 내려온 그대로의 시장은 아니다. 영호남의 화합의 상징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다. 6.25사변으로 쇠퇴했다가 조영남의 '화개장터' 노래로 인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2001년에 상설시장으로 복원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서 교류가 일어나는 경우를 빗대어 '화개장터'라 부르기도 한다. 2014년에 화개장터의 대장간과 약재상 상가 쪽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무려 1억 9천만원의 재산피해가 났으며, 41개 점포가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2015년 4월 3일에 복구작업을 마치고 재개장하였다. 재개장을 하면서 시장을 더욱 깨끗하게 바꾸어 관광객들과 상인들, 소비자들이 더 편한 환경에서 있을 수 있도록 하였다. 2016년 4월 1일에 다시 재개장하였다. 오늘 본 모습은 매우 질서가 잡혀 있고 안정적인 전통시장의 모습으 보여주고 있다. 한 바퀴 크게 돌며 살펴보았다. 조영남 동상도 있고, 화개장터 기념비도 있다. 하동과 구례의 전통식품도 보고, 버섯 시음도 해보고 즐거운 탐방이었다.
* 하동 강석호 추모 1주기 세미나
화개장터에서 조금 이동하여 하동 지리산 자락의 켄싱턴 숙소로 왔다. 수필문학 회장이었던 고 강석호 추모 1주기 세미나가 개최되는 곳이다. 먼저 방에 여장을 풀고 세미나장으로 갔다. 작년 8월 말에 자고하셨을 때는 우리 부부도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부터 용인 평온의 숲 발인장까지 1박 2일 함께 머물며 마지막까지 동행하였다. 그리고 고요히 영면하시는 마지막 모습까지 지켜보고 추모시를 써서 작년 2018년 수필문학 9월호에 게재되기도 했다. 생시에 참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시다. 수필문학은 나의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이 등단한 문단이다. 그로인한 인연으로 행사 때마다 시인인 나도 함께 초청해 주신다. 참으로 감사하다. 기독교식으로 그 분의 1주기 추모행사가 엄숙하게 거행 되었다. 그리고 세 분 교수님들이 이끌며 그 분의 작품과 생시 생화모습을 기리는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내내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김윤자 시인의 시가 참 좋더라, 유기섭 수필가의 수필도 참 좋다.' 하시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강석호 선생님, 재삼 명복을 빕니다.
* 경남 하동 켄싱턴 리조트
경남 하동 지리산 자락의 숙소다. 호텔급의 매우 깨끗하고 시설이 좋은 리조트다. 정원의 연못과 바위와 분수가 아름답다. 주변에는 대나무숲도 울창하다. 쌍계사와 가까이 있어서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과 함께 가기로 했다.
* 지리산 쌍계사
새벽 산길을 따라 쌍계사로 향했다. 여러 번 왔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기분을 선사해준다. 계곡 물소리와 울창한 나무들이 상큼하다. 어둠이 서서히 가시는 길을 따라 서둘러 올라가니 쌍계사가 반긴다. 대웅전 앞의 높은 석탑이 웅장하다. 대웅전과 주변을 돌아보고 하산하였다.
* 하동 강석호 문학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떠나 강석호 문학비가 있는 그 분의 고향으로 갔다. 하차하니 비가 내린다. 돌아가신 강석호 선생님을 기리는 눈물인듯 하다. 우산을 쓰고 문학비가 있는 동산으로 올라갔다. 그 분의 유족이 묻혀있는 선산이다. 문학비가 웅장하게 서서 반긴다. 그 분의 동생이 나와서 안시를 하는데 강석호 선생님을 닮아 꼭 강석호 선생님이 살아오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문학비 전면에는 그 분을 기리는 내용이 있고, 후면에는 그 분의 대표작 '흔들리는 나뭇잎'이 새겨져 있다. 수필문학 회원들이 세워준 것이다. 나의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도 참여하여 문학비 전면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 강석호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마치고 내려왔다.
* 하동 강석호 문학비마을 석류나무
강석호 문학비를 떠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석류나무가 있다. 나의 시 '석류, 그 붉은 진실'이 떠올라서 사진을 몇 장 씩었다.
강석호 문학비를 떠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석류나무가 있다. 나의 시 '석류, 그 붉은 진실'이 떠올라서 사진을 몇 장 씩었다.
석류, 그 붉은 진실
김윤자
그대에게 가는 길은
늘 침묵이어서
가슴 속에 한가득
보석이 든 줄이야
붉게 익혀서 우수수 쏟어내는
진실에 눈부시어
한 알만이라도 어그러져 보라고
깨어져도 아름다울 거라고
손안에 보듬어 안은 보석들
알알이 꿰어
우리가 건너야 할 남은 강가에
호롱불로 걸어두면
하얀 바람도 화사하겠지
침묵을 사이에 두고
단단하게 제련한 고독이
여문 사랑일 줄이야
* 진주성 촉석문
진주 촉석루는 꼭 와보고 싶어서 몇 년 전부터 벼르던 곳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오게 되어 참 기쁘다. 진주성에 촉석루가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았다.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고려후기 에 개축된 석축 성곽으로 사적이다.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촉석문에 다다랐다.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을 이룬 곳이다. 당시 진주는 군량 보급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는 길목이어서 진주성을 두고 조선과 왜의 다툼이 매우 치열하였다. 곧 조선 선조 25년(1592)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과 의병대장 곽재우(1552∼1617)가 진주성을 지키면서 왜군 2만명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다음해 6월에는 왜군 4만 여명이 진주성을 공격하였는데, 김천일 등이 모든 주민들과 함께 성을 지키려고 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 내수문, 외수문, 암문, 장대, 포루, 촉석루, 서문, 내북문, 함옥헌, 진남루, 산성사, 창렬사, 충민사, 화약고, 관덕당, 공신당, 포정사, 군기고, 중영궁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진주성 정화사업을 거쳐 복원 정비된 것이다. 그 뒤에도 발굴이 진행되어 기록에 전하는 내부 시설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99년에 진주성 공북문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북문 받침돌 아래에서 약 80㎝ 이상되는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에서는 저습지도 발견되었다. 진주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고쳐 쌓았던 축성 방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성으로, 당시의 무기, 화약 등 국방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갖춘 성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진주성이 이렇게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흐뭇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하지만 다음 기회에 다시 와서 진주성을 모두 돌아볼 것이다. 오늘은 촉석루를 중심으로만 탐방한다. 그래서 촉석문으로 입성하였다. 촉석문은 매우 웅장하다. 남강 곁에서 그날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 진주성 촉석루
진주성 촉석문으로 입성하니 큰 마당이 나온다. 곁에는 성벽 너머로 남강이 유유히 흐른다. 큰 휘장에 '帥'라는 한자가 새겨져 휘날리고 있다. 그 앞에 있는 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니 촉석루가 아주 웅장한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자리한 탓에 뛰어난 경치까지 볼 수 있는 촉석루는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또 때로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지금의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고적 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랐다. 아린 역사가 서린 정자가 그날을 읊조리듯 흐르는 남강을 보듬고 있다. 그토록 오기를 소망했던 촉석루였기에 논개를 생가하며 한동안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의암
촉석루에서 내려와 성벽에 조그맣게 뚫린 문을 통과하여 남강으로 나가니 강변에 사각형 모양의 바위가 있다. 논개의 의로운 역사가 서린 바위다.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변 강가 수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바위다. 바위는 가로 3.65m, 세로 3.3m의 윗면이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서쪽 면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논개(論介)는 성을 점령한 일본군이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일본군 장수를 이곳으로 유인한 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이러한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다. 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역시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 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는데, 최경회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임할 때 성안에서 전투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남강에 투신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투신했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 의암은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학창시절에 논개에 대하여 배웠고, 붉은 충절시를 배웠다. 지금 나는 그녀가 왜적 장수와 투신한 그 현장에 서 있다. 논개처럼 의미심장한 자세로 바위 앞에 앉아서 많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조국이 위태로울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의로운 답을 안겨주는 듯하다. 내 조국의 평안과 번영을 빌며 의암을 떠나왔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의암 사적비
의암 바로 위쪽으로는 논개를 기리는 의암사적비가 서 있다. 아담한 사적비가 그날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의암 사적비(義巖事蹟碑)는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조선의 7만 군관민이 순절하자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사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의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
논개에 대한 추모 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721년이다. 유학자 정식(1683~1746)은 그해 우병사 최진한으로 하여금 논개에 대한 포상문제를 조정에 알려 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논개의 순국사실에 관한 자료 수집과 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한편으로는 전 별장 윤적보를 앞세워 장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최진한의 보고에 의거하여 경종 임금에게 논개의 애국 충절에 관해 상주하게 되었고, 임금은 예조로 하여금 국가에서 특전을 줄 수 있도록 사실관계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때는 논개가 순국한 지 오랜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근거가 될 만한 문헌이나 가족을 찾기 어려웠다.최진한은 뒷날 좌병사로 전임된 후에도 우병사 재임 때에 매듭짓지 못한 논개 포상문제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계속 청하여 논개가 의기로 호칭되도록 노력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듬해인 1722년(경종 2)부터 ‘관기 논개’를 ‘의기 논개’로 바꾸어 호칭하게 되었다. 논개에 대한 평가가 ‘의기’로 바뀌자 진주 사람들은 정식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 사적비’를 1722년에 세웠다. 비문은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의해 전해진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1740년 경상도 우병사 남덕하는 의기정포를 계청하여 사당 의기사를 창건했고, ‘의암 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했다. 의암 사적비는 가로 60cm, 세로 145cm, 두께 15cm의 규모이며,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의암 사적비 바로 아래에는 의암이 있다. 소슬한 바위 의암과 훈훈한 기록이 새겨진 의암 사적비가 이 시대에 사는 우리 후손들에게 뜻깊은 교훈을 훈시하고 있다. 내 조국 사랑하리라. 논개만큼은 아니어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성실하게 올곳게 살리라.
* 진주촉석루 의기사
의암에서 다시 올라와 촉석루에 오니 곁에 의기사가 있다. 1739년 논개를 추모하는 사당 ‘의기사’가 세워지고, 논개는 ‘의기’로 추모받게 되었다. 사당 의기사(義妓祠)는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게 살았다. 장수현감 최경회가 그 집안의 사정을 알고 논개 모녀를 관아에 데려와 심부름을 시키면서 돌봐주었다. 첫 아내를 잃은 최경회는 장성한 논개를 내실로 삼았다. 논개는 출전한 최경회를 따라 진주까지 오게 되었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아래 강변에 있는 바위(나중에 ‘의암’으로 명명됨)로 유인한 후 그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1629년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1722년에는 의암의 바로 위쪽에 ‘의암 사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또한 그의 사당 의기사를 세운 것이다. 의기사 문으로 들어가니 논개 영정이 사당에 모셔 있다.
* 진주성 촉석문 앞 논개 시비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 등을 둘러보고 나오니 진주성의 정문인 촉석문 입구 왼쪽 편 남강쪽으로 시인 변영로의 논개 헌시가 있다. 그 붉은 충절이 담긴 시를 이곳에서 보니 숙연해진다.
〈논개(論介)〉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변영로, 1922년
* 진주성 공북문
아까 진주성에 도착하여 버스가 이곳 공북문 주차장에 정차하려 있는데 만차로 그냥 지나 갔었다. 우리는 촉석문으로 나와서 이곳 공북문까지 성벽과 시가지 사이의 길을 따라 걸어와 버스를 기다렸다. 공북문은 관찰사감영과 경상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요 통로로 사용된 문이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위쪽으로 영남포정사가 있다. 오늘은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에 와서 자세히 볼 것이다. 매우 웅장한 문이다. 이것으로 이번 하계 세미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상경하였다. 매우 뜻깊고 보람된 세미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