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등 만능 엔터테이먼트의 대명사가 바로 미켈란젤로다.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는 그야말로 팔망미인이라는 말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조예가 깊었던 것 같다. 더구나 전 생애를 걸쳐 한 우물을 파듯 신명을 다해 자신이 해온 과업들에 집중하며 생애를 마감한 이가 미켈란젤로말로 또 있을까 싶다. 90세 가까운 나이에 고요히 잠들기까지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예술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은 미켈란젤로의 생애 후반기를 실재감있게 다룬 책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있는 것처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이야기들을 사실적 근거에 비추어 한 인물에 집중해서 쓴 역사서이기도 하다. 사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카 리오나르도와 주고 받았던 200여통의 편지가 이를 증명한다.
서로 간의 의사소통의 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서신만큼 확실한 도구가 또 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인물을 조명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서신이다. 유배지에 있던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유배 중에 다산의 생활 상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조선 후기 정조 임금이 신하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 또한 당시 복잡 미묘한 정치 상황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었던 단서가 되었다. 이처럼 편지에는 사람의 속내가 진솔하게 담겨 있기에 인물을 평가하고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는데 약방에 감초같은 역할을 한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에서도 미켈란젤로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건축물의 각 부분은 인간 내부의 각 장기와 비슷합니다. 인간의 신체, 특히 해부학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할 것입니다" (320쪽)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모형을 만들라고 촉구하는 로돌포 피오 다 카르피 추기경에게 미켈란젤로가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미켈란젤로의 건축가로써의 가지고 있는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가 주로 사용했던 건축의 재료는 돌이었다. 커다란 양질의 돌을 찾아내는 일, 설령 돌을 찾아냈더라도 그것을 작업 장소로 운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라 작업반장, 석공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몇 년 아니 몇 십년을 동고동락하며 건축해야 했던 대공사였기에 건축을 지휘하는 미켈란젤로의 입장에서는 중심을 잡아주는 '철학'을 놓치질 수 없었다.
최종적인 건축 지시는 교황에 의해 움직여졌지만 실제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건축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세력은 교황청 내의 파브리카라는 임원조직이었다. 그들에게 밋보였을 경우 여차하면 건축의 전 과정을 수정해야 하는 일도 있었기에 미켈란젤로는 정치적 감각도 늘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같은 경우는 전임자가 이미 모형으로 건축의 전반적인 과정을 확정해 놓았던 것이라 더더욱 힘든 작업 중의 하나였다. 당시 건축 기술을 총동원하더라도 돔 형태의 웅장한 건축물을 도심지 한 가운데 세우는 일은 논란의 소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그를 필요로 하고 오라고 하던 곳을 다 뿌리치고 소명의식 하나로 죽음의 직전까지 공사장을 둘러보며 애정을 놓지 않았다.
"조각은 기도의 한 형태요, 예술가를 하느님 가까이에 다가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창작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였다" (384쪽)
미켈란젤로가 일하는 스타일은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말로 이야기한다면 과감한 혁신을 추구했다. 설계와 시공의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챙기는 실무적 건축가였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건축 중에도 계속해서 수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것을 고수해갔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부분이다. 임기응변 방식의 공사를 진행했으며 설계와 구조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때그때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역시 건축재료인 '돌' 에 이유가 있었다. 돌덩어리를 깎아내는 작업은 작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돌덩어리를 깍아들어가면서 흠집이 난 부분들이 발견될 경우 수정이 불가피하고 반대로 애초에 구상했지만 조각하면서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임기응변' 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아주 적절한 방법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즉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건물들의 대부분이 곧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성장 과정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연유된 까닭인 것 같다. 우리도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과정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꿈틀리는 유기체처럼 보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기응변식'의 현장 실무형 감각을 키워가는 일이 필요할 듯 싶다. 80대노구의 몸을 이끌고 60미터 높이의 당대의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어갔던 미켈란젤로를 보더라도 우리는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후반기의 삶이 어찌보면 젊었을 때보다 더 조명을 받는 이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요청하는 작업량이 점점 많아졌다는 점이다. 80대의 노인에게 중요한 작업을 요청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지혜롭게 그 많은 양의 작업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권위를 휘둘렸다는 점이다. 권위를 가지지 못했더라면 부족한 작업 시간을 메울 수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그냥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 본인이 스스로 교황과 교황청 임원들로부터 찾아낸 것이다. 권위는 일을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실무적인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 권위적인 모습은 지양해야하지만 실질적인 권위를 찾아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상당히 많은 양의 일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위는 선택사항이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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