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성산읍 시흥리 538번지와 499번지의 경계(시흥상동로53번길27-20의 남쪽 울타리)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시설(城)
시흥리는 광복 후 지금의 시흥마을회관 자리에 있던 향사를 중심으로 마을이 운영됐다. 당시 향사는 학교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상동 주민들은 이곳이 4.3 당시 사람들을 잡아다 구타하는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48년 11월 이후 제주도 전역에 초토화작전이 실시되고 시흥리에도 향사 앞 민가에 경찰파견소가 설치되었는데 향사와 파견소가 같은 마당을 썼기 때문에 같은 장소로 인식해서 그런 기억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순화(1935년생 女)는 당시 파견소에 서청도 있으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증언했다. 구장이었던 강원규는 얼마나 심하게 때렸던지 다른 경찰이 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강월천(1925년생 女)씨도 남편을 찾아내라며 이곳으로 끌려와 무수히 구타당했다고 한다.
시흥리에는 4·3 기간 동안에 뚜렷한 활동가가 없었다. 무장대의 습격도 받지 않아 별다른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1949년 1월에 2연대 3대대의 서청특별중대가 성산리 성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주민학살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2일 이웃 오조리에서 발생한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19명의 주민이 학살되면서 그 여파가 시흥리에도 번졌다. 시흥리의 인명피해는 다음과 같으며 2020년 현재 정부가 인정한 시흥리 4·3 희생자는 남 8명, 여 2명이다.
∎1949.01.02. 오조리 다이너마이트 사건 관련 부갑생(45세), 부성순(20세)씨가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당함.
∎1949.01.09. 오조리 다이너마이트 사건 관련 강창수(29세)씨가 서청에 끌려가 고문받다 터진목에서 학살당함. 다음은 강창수씨의 아들 강명돈(1943년생)씨의 증언이다.
“우리 아버지는 다이너마이트 만들고 사용하는 기술을 일본에서 배워 가지고 제주도 들어왔어요. 당시 주민들은 죽창 갖고 보초 섰고, 순경 몇 사람은 총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폭도들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자 성을 쌓고 폭도가 올 것 같으면 안에서 그걸 던지면 상대보다 우리가 더 세지 않겠느냐, 방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해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자고 한 거죠. 당시 민보단이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민보단장이 그걸 제조해 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만들어 줬어요. 그걸 갖고 보초를 서는 거죠. 그 후 주민들이 보초를 서고 서쪽 정문은 우리 아버지가 맡았는데…. 그걸 만들어서 얼마 되지 않아 서북청년단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마을을 지키려고 한 건 상을 줘야 하는데 그냥 잡아가서는 막 때리고 바른 말을 하라 하고, 바른 말 안 한다고 막 때린 거죠. 서청은 눈에 거슬린 사람은 다 잡아갔어요. 그 때 주민들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상 받을 일이니깐 괜찮다고 했는데, 서청 놈들이 성산포 터진목에서 사형을 시켰습니다.”
∎1949.02.01. 서청이 함덕 대대 본부에서 석방한 성산면 주민 46명을 재연행해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할 때 시흥리 출신인 강태삼(20세), 강태흥(22세)씨가 학살당함.
시흥리에는 1948년 겨울부터 성담을 쌓았다. 시흥리 전주민이 동원되어 상·하동을 전부 둘렀고, 성문은 일주도로문과 하동남문, 상동문, 망ᄆᆞ루동산문 4곳이 있었다. 경찰은 민보단(단장 강인옥)으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하면서 무기는 죽창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 마을 출신 강순문(1959년생)씨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면서 놀 때에는 성담이 그대로 높게 남아 있었다고 하지만, 2022년 3월 현재 시흥리 538번지와 499번지의 경계에는 높이 1.7m, 길이 30m 정도가 송악 등 덩굴 식물에 덮인 채 남아 있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시흥리 498번지와 543번지 경계에는 성굽만 약 40m 정도 약간 흔적을 보이고 있다.
《작성 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