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해의 풍수와 명당⑵경복궁과 풍수
조선 태조, 고려 숙종 남경 행궁터에 건립‘물 부족’ 풍수 결함 보완 위해 개천 공사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은 풍수에 바탕해터를 잡고 공사를 했다. 뒤편으로 한양의 주산인 면악(북악산)이 보인다.
서울은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가 1394년 국도로 정한 후 지금껏 이 나라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첫 궁궐이자 법궁(法宮·임금이 머무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이다. 그런데 경복궁 터는 원래 고려 숙종 9년(1104) 5월에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에 지은 행궁(行宮·임금이 행차 때 머물던 별궁) 자리다. 숙종이 도읍인 개경을 두고 남경에 따로 궁궐을 지은 사연은 이렇다.
숙종 원년(1096), 풍수가 김위제는 도선국사의 예언서인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근거해 왕에게 ‘남경 천도설’을 건의한다.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줄기가 남쪽으로 곧바로 힘차게 내려와 보현봉이 되어 높고 낮은 언덕으로 내려오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봉우리가 면악(지금의 북악산)입니다. 이를 해산(亥山·북서 방향의 산)으로 삼아 그 아래 넓고 평탄하게 펼쳐진 곳에 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궁궐을 지으면 모든 벼슬아치가 조정에 나오고 70여 나라에서 조공을 받으며 번창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명당의 길지입니다.”
숙종 4년(1099) 9월, 왕은 친히 남경에 가서 터를 잡았다. 숙종 6년(1101)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수도 이전을 위한 임시기구인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해 면악 남쪽 산줄기의 중심이 되는 큰 맥에 임좌병향으로 산 형세를 따라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숙종 9년(1104)에 마침내 궁궐이 완성됐지만 남경 천도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고려 말기 공민왕과 우왕 때도 남경 천도 움직임이 있었으나 모두 수포로 끝났다.
하지만 고려를 멸하고 들어선 조선 왕조는 남경, 곧 한양을 국도로 삼았다. 개경에 근거한 구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1392)에 한양의 궁실을 수리한 데 이어 태조 3년(1394)에는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을 보내 종묘사직과 궁궐 및 도로의 터를 잡게 했다. 이들은 현장 답사 후 고려 숙종 때의 궁궐 터가 너무 좁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온 주장이 남경 행궁 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나온 곳에 건좌손향(乾坐巽向·북서를 등지고 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방위를 틀어 궁궐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정도전은 “군자는 남면(南面·남쪽으로 향함)하여 정사를 살핀다”는 <예기(禮記)>의 구절을 인용해 반대했다.
결국 경복궁 터는 과거 김위제가 주장한 대로 임좌병향으로, 궁궐의 방향은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을 등지고 정남을 향함)으로 했다. 궁궐과 종묘가 낙성된 것은 공사를 착공한 지 10개월 만인 태조 4년(1395) 9월이다.
태종은 경복궁에 명당수(明堂水·대궐 부근의 물)가 부족하다는 풍수적인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개천공사를 관장하는 개천도감을 설치했다. 경복궁 안에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랑을 파고, 장의동구에서 종묘동구까지는 석축을 쌓고, 종묘동구에서 동남쪽 수구문까지는 나무로 크고 작은 둑을 쌓았다. 또 남부 광통방 북쪽에는 광통교, 중부 서린방 북쪽에는 혜정교, 중부 정선방 동구와 서부 신화방 동구에는 돌다리를 놓았다. 이것이 2005년 복원돼 오늘날 맑게 흐르고 있는 청계천이다.
<서경대 외래교수>출처 농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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