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한다.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를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해마다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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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오 2,1-12)
Behold, magi from the east arrived in Jerusalem, saying, “Where is the new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do him homage.”
말씀의 초대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어둠이 땅을 덮겠지만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민족들과 임금들이 그 빛을 향해 오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구원을 빛의 떠오름으로 비유하여 선포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로 한 몸의 지체가 되고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믿음을 편지로 전한다(제2독서). 예언자의 전통과 가르침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유다 민족을 넘어 만방의 모든 이에게 하느님 구원의 빛이 되셨다.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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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간 삶의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들은 국경도 민족도 인종도 문화도 모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선과 악이 있을 뿐이다. 사랑, 생명, 평화, 정의, 용서, 나눔은 동서고금의 선이며, 전쟁, 폭력, 죽음, 기아, 질병, 미움, 탐욕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악이라는 것이 불변의 진리다. 깨달음의 경지도, 성현의 가르침도 그렇고, 정치의 간섭을 받기 이전의 적십자사와 국경 없는 의사회의 자원봉사도 또한 그렇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출신과 지위, 빈부의 계급이, 정치를 구분하는 경계가 없고 다만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동방 박사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상의 본보기이다. 당시 근동 지역의 최고 문명국 페르시아의 상류층 지식인들임에도, 보잘것없는 변방 민족 유다인 가운데서, 그것도 마구간 구유에 누인 초라한 아기 모습에서 인류의 구세주가 될 분을 발견한 영적인 눈을 가진 분들이다.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그 힘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가치들도 진리보다 크지 않게 여기는 태도, 가장 완전한 것을 보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했던 시메온이나 안나처럼(루카 2,25-38 참조) 동방 박사들 또한 ‘진리의 현존’을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목격하기를 소망했던 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불확실한 이유는 단순하다. 사회적 부와 지위와 성공을 얻으면서 종교적 구원도 함께 얻어 누리려는 가치의 충돌 때문이다. 진실한 가치들은 국경이 없고 진리는 진리로 통하듯이,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삶도 오직 한 길뿐이다. 진리가 아니라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 그 진리를 깨우치려거든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라!
-서공석신부-
성탄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대축일은 이 세상에 오신 그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記事)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줄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외면하였고, 먼 이역(異域)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몇 명이며 어디서 왔는지, 베들레헴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것 중, 어느 하나도 복음서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박사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나서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 후 500 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틀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고 말하려는 마태오복음서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고 행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진흙, 곧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고, 회의(懷疑)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지위가 꾸며주는 온상에는 하느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우월감을 가지고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온상을 떠나서 만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한 이웃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에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우리의 보살핌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망상(妄想)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사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이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삶의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우리 삶의 기원이십니다. ◆
한없이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최종목적이다
-박영식신부-
“인생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합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망해왔는지를 합계한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손으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다 써서 엉금엉금 기어간다. 이러한 몸부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전부 다 성취되지 않으면 그 중 한 부분이라도 실현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차지하고 욕망을 충족시켜도 늘 허전하고 공허하고 배가 고프다. 이런 것들로 만족할 수 있기는커녕 더욱더 비참해지고 가난해진다. 인생의 최종 목적은 자기실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말고는 더 기다릴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처지에서도 자기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자기실현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지속하는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한없이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 받아야 한다. 내가 한없이 사랑하면 한없이 사랑 받을 수 있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의 특성이다. 하느님을 닮는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방의 세 박사는 유다인들과는 달리 성경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다(마태 2,1-12). 그런데도 이 세 박사는 하느님이 죄와 죽음으로 일관되는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시리라는 희망을 이웃 유다인들에게 배웠던 것 같다. 박사들은 이 희망에 이끌려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와서 예수 메시아를 뵙고 희망을 실현했다. 이 세 박사는 인생의 최종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순례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메시아를 더 귀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는 예언적 영을 받았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끊임없이 구원을 찾아 순례의 길을 가는 나그네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최종목표를 실현하려는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들처럼 예언의 영을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을 받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닮는다. 우리가 지닌 하느님을 닮은 특성들은 사랑하는 능력, 진선미를 향한 그리움, 양심, 지능과 의지와 감성 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을 총동원하여 한없이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닮고 인생의 최종목적을 달성한다.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닮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 그들이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좋든 나쁘든 가리지 않고 그들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참사랑을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관심과 배려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이 가장 완성된 존재로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요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이와 반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사라지면 모든 사람이 나를 헤치는 늑대요 악마요 지옥사자로 보인다.
인생의 목적이 마치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있다고 착각하며 사랑을 소홀이하는 사람은 자기실현을 고사하고 실존적인 고독과 상실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자기 손에 많은 돈과 권력과 명성을 거머쥐었다고 만족해하는 사람은 인생의 종점에서 텅 빈 손임을 깨닫고 후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실패작이다. 그의 두 손에는 죽은 뒤 하느님, 먼저 가신 부모님, 형제자매들, 친구들에게 가져갈 선물은 하나도 없다.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가 가져갈 훌륭한 선물이다. 면목도 없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분들이 계시는 천국으로 감히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있을까?
한 생애를 그에게 다 주었는데도 배신만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계산한 사람이고 참된 사랑을 하지 않았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을 느끼게 하므로 사랑하는 것이다.”(파스칼)
< 그리스도를 품은 별 >
-전삼용신부-
며칠 전 주교님의 교구청 사목방문이 있었습니다. 각자 하고 있는 일들을 발표하는데, 교도소 사목을 담당하는 사제가 현재 교도소 수감자 중 가톨릭 신자 비율이 5%도 안 되는 소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고 많은 수가 교도소 안에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10% 정도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데 그만큼 가톨릭 신자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종교에서는 모두 사랑과 자비와 용서 등을 가르치며 이웃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왜 가톨릭 신자들이 유독 다른 종교의 사람들보다 범죄율이 낮고 또 이웃을 위한 봉사나 자선의 양도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감독 스티븐 앨런 스필버그는 흥행의 마법사, 천재적 감독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E.T., 주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등 세계인의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표창장 한 번 받지 못한 학생이었답니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대학 시절에도 평균 C 학점을 받았답니다. 그에게는 부모의 이혼과 유대인이라는 열등감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잦은 이사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 혼자 공상에 빠지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그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성공시킨 원동력은 어머니 레아 아들러였답니다. 레아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들을 무시하거나 야단치지도 않았고, 아들대신 동네 친구들을 징벌하러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의 우월성을 발견하고 저렴한 무비카메라를 선물해 주었고 스티븐은 독학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괴롭힘을 많이 당해 결석을 자주 하였지만 그는 집에서 영화에 대한 공상을 하고 영화를 찍으러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영화는 혼자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 흥미 있는 친구들을 모아 영화 제작에 동참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스티븐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스티븐의 어머니는 매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아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알아보고 아들에 대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레아의 어머니 즉 스티븐의 외할머니는 딸 레아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말을 잘 새겨둬라. 이 아이는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칠 아이다.”
레아는 아들을 볼 때 마다 어머니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기대를 하였으며 결국 그 기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기대에 맞게 행동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향을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기대를 스스로 실행함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키는 경향입니다.
[출처: 햇볕 같은 이야기, 김필곤, 기대의 힘]
그런데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을 충족시켜 주려는 마음이 들까요?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대만이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개들을 봅시다. 개들이 누구나에게 그렇게 친절합니까, 아니면 밥을 주는 주인에게만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듭니까?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주인에게 고맙기 때문에 주인에게 잘 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음식을 해 주는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뜻과 함께 당신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주시며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어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성체성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 그만큼 그리스도의 삶과 가깝게 변화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객관적인 자료로도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2. 10. 28일자 1188호에 ‘가톨릭 신자들 나눔 활동 으뜸!’이라는 제목으로 기분 좋은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종교인·비종교인을 통틀어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다운재단(이사장 예종석)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12회 국제 기부문화 심포지엄에서 강철희(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누가 이웃을 돌보는가?' 발표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기부 참여율은 68%(2011년)로, 개신교(61%)ㆍ불교(60%) 신자보다 높다’고 밝혔다. 강 교수에 따르면, 1인당 기부금액 또한 천주교 신자는 37만 1100원으로, 개신교(21만 3400원)와 불교(10만 6000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또 천주교 신자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49%로, 기독교(34%)·불교(27%) 신자보다 높았다. 자원봉사 시간 역시 천주교 신자들은 36.5시간으로, 타 종교 신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객관적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사람들은 천주교보다 개신교가 더 많은 자선과 봉사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2013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교회의 사회 봉사활동이 전체 종교기관 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하여 현실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개신교가 한 조사에서도 개신교인들을 빼놓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47.0%), 불교(38.0%) 순이었고, 개신교는 12.5%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종교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 어디서나 우리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 종파에서 아무리 선교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선교의 방법은 바로 우리들의 참 그리스도를 믿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분이 어떤 분임을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보고 그 보이지 않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본적 삶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하는 모든 선교는 단기적인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신자 수가 줄어듦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증거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이 그분의 가르침과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이 보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바로 그 별이 지금도 떠 있는데 그 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밝은 별이 되기 위해 우리가 더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더 먹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먹으면 그 먹는 것이 바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면 어머니의 기대대로 살게 되어 어머니를 내 안에 품게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말씀과 성체를 통해 그만큼 그 분을 더 먹으면 그분이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먹는 것이 각자를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씀과 성체를 통해 먹고 자신도 모르게 그분의 기대대라 살며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장미란 선수가 역도를 들어 올리며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장미란 선수가 고생을 했는지를 봅니다. 김연아 선수도 그렇고 모든 위대한 일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순간이 짧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를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동방의 별이라는 사실을 잊지말고 그 빛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해를 품은 달처럼 그리스도를 먹고 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