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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묵상글 (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 죄의 패배주의와 대리만족을 경계하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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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15 03:42
- 죄의 패배주의와 대리만족을 경계하며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서간은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표시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받으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혹의 존재라고 할 수 있고,
유혹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도 유혹당하셨으니 유혹을 그 자체로
죄나 악이라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유혹받고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잘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장엄하게 선포되셨지만
또한 사람의 아들이셨기에 이내 광야로 나가 유혹받으셨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얘기하듯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요.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2장을 보고 있는데 4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유혹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할수록 유혹받으면 죄를 짓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죄와 유혹의 관계를 잘 알고 또 성숙하게 되면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유혹은 죄에로의 유혹이고,
선행하자는 것을 유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또한 욕구와 욕망과 욕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핍이 없고 욕구도 없으면 유혹받지 않습니다.
이미 배부르면 아무리 먹자고 해도 그것이 유혹이 되지 못하지요.
배고픈 사람만 식욕이 있고 식욕이 있는 사람만 유혹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욕구가 곧 욕망이나 욕심이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다른 욕구 또는 거룩한 욕구로 그 욕구를 바꿀 열망이 없어서
그 욕구에 머물거나 주저앉은 사람만이 욕구가 욕망과 욕심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사실 주님처럼 빵의 욕구를 말씀의 욕구로 바꾸면
욕구가 욕망과 욕심이 되지 않고 열망과 거룩한 원의가 됩니다.
인간은 허할 때 그것을 채우려는 존재 곧 만족하려는 존재이고
존재의 허함을 무엇으로든 채우고 무엇으로든 만족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처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빵으로 대리만족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모든 세상 만족은 천상 만족의 대리만족이고,
천상 것들로 이미 만족한 사람들은 지상 것들로 대리만족하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 지상 것들이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욕구에 주저앉아 안주하지 않고,
그 욕구를 거룩한 열망과 원의로 바꾸려는
그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정신(Spirit)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유혹 천지이고 유혹자들이 노리는 광야이지만
주님처럼 성령(Holy Spirit)으로 충만하고 인도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죄의 패배주의를 프란치스코처럼 극복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0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자주 원수나 이웃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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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15 06:54
종종 유명인의 자서전이 출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서전을 출판하면 거리를 두어라.’
특히 회사 CEO가 자서전을 내면 그 회사 주식을 얼른 팔아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CEO가 자신의 샐러리맨 신화를 다룬 자서전을 내고서 몇 년 뒤 회사 전체가 공중분해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자서전은 자기의 성공담을 들려주고 싶어서 쓰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졌다는 위험 신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에는 수많은 우연적 요소, 환경, 시대적 조건, 개인의 특성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되어 있는데, 자기 능력으로만 성공한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꼰대’가 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생각을 갖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에 다른 이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망하기 딱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꼰대가 어른에게만 해당할까요? 종종 자녀가 자기 부모에게 ‘꼰대’라고 말하지만, 본인도 부모님 말씀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 자기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꼰대’입니다.
작년 말, 병원에 가서 ‘간 탄력도’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검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간이 굳어 있는지 아니면 유연한지를 검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굳어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혹시 단단히 굳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이 유연해야 모두를 받아들이며, 특히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쁨에 넘쳐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보고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면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 38)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렇게 하느님과의 만남에 집중하다 보니,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의 관점만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훌훌 털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세상 것에만 집중해서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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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위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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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성화직)과 봉사직(왕직)으로 관련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데,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하고, 예수님 삶, 곧 이 3중 직무를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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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은 찾아가는 것이다
힘과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지니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 형성하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바램을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기나 유명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떠나 다른 고을들을 찾아가자는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딴곳을 찾은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실 신앙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웃과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 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우리는 조금, 잘 나가면 자기를 내세우고 으스대지만 예수님은 당신 능력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공을 돌리고 그분께 의지하십니다.
우리는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경 묵상과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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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탄 미사를 드릴 때입니다. 성탄 밤 미사는 제가 주례와 강론을 했고, 낮 미사는 부주임 신부님이 미사와 강론을 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탄 밤 미사의 주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성탄 낮 미사의 주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그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들 때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드셨고, 하느님과 통할 수 있는 ‘말’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맨 처음에 사람은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람은 악의 유혹으로 하느님과 멀어졌고,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말’을 상실했습니다. 에덴동산에 불 칼로 벽이 생긴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장벽은 사람이 하느님과 말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이 사람이 되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좋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면서 이제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난, 원망, 분노, 시기, 질투, 욕망’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평화,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을 드러내는 말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말이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서품식 때 입었던 ‘서품 제의’를 입었습니다. 제의의 뒤에는 가시관과 쇠못이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지내다가 다시 한국으로 와서 사제가 된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했고, 제의를 통해 드러냈다고 생각했습니다. 34년 전에 저도 서품 제의를 준비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를 두기보다는, 수녀님이 보여주는 견본 중에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포도나무와 가지가 있는 제의를 정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쓴 글에서 ‘구유, 십자가, 감실’이 수놓아진 영대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프라도 신부님의 영대였는데, 신부님은 영대를 걸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구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상징하며, 우아함과 동시에 겸손의 상징입니다. 구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겸손함을 상징합니다. 루카 복음 2장 7절은 “그분이 태어나셨으나 그를 위한 곳이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세상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낮고 소외된 장소에서 인류의 구세주가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표징입니다. 우리들 또한 겸손함을 살아야 합니다. 사제로서 우리는 이러한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항상 높은 곳, 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낮은 곳에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마음을 간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구유의 정신은 우리에게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을 나누기 원하는 작은 도구입니다.”라는 기도처럼 겸손함을 일깨워줍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상기시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제의 삶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주고,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며,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실은 구유와 십자가를 연결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에 깊은 의미를 제공합니다. 감실은 성체가 보관되는 특별한 장소로, 하느님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서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사제로서 우리는 감실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권위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전하는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가고, 기꺼이 희생하며,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에 대해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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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주님 곁에 베드로라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자네! 큰일났네, 자네 장모가 집에서 앓고 있다네. 자네는 가업도 버리고 부인도 버리고 형제도 버렸으니 자네 장모가 병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말일세….’
물론 이 이야기는 주님 들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에게 말하는 척 하면서 주님께 ‘당신 때문에 잘 나가던 사람 꼴이 이게 뭡니까? 또 그의 가정 꼴은 그게 뭐란 말입니까?’라고 투덜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갑니다. 주님께서 장모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고는 힘주어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진저리 치게 싫어할 만한 장모가 일어나자마자 시중을 듭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 있습니다.
장모의 치유 사건 이후, 주님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또한 홀로 기도도 하십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사명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복음은 베드로의 장모 사건처럼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벌하거나 치워버리지 않고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속에서 치워버리거나 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무슨 힘으로 일으켜 세울까요? 자꾸 미워지고 욕하고 싶어지는데 말입니다. 그것 또한 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다…. 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도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곧고 바르게 세워 하느님께 함께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조용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어느날 동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시간을 내려고 노력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됐어.
내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 아니라 ‘여유’였다는 것을 말이야.
여유를 가지려 하니 막혔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하더라고 그리고 더는 휴식을 바라지 않게 됐어.
동기 신부님의 말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막연히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 느낌이 사실은 여유를 필요로 하는 느낌은 아니었을까!
휴식을 가져도 여유가 없다면 휴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휴식인가요? 아니면 여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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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삶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어제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역시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수사님들 축일이면 꽃을 마련해 꽃꽂이를 해주는 꽃같이 아름다운 분이 있습니다. 역시 어제도 축일을 맞이하는 수도형제의 꽃꽂이를 해주고 남은 꽃을 꽃꽂이해 집무실에 가져왔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꽃을 들라 하여 사진도 찍어 드렸습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 꽃같았습니다.
“올림픽에서 봉사의 꽃메달 타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또 어제는 새해 들어 코이노니아 자매회 8분의 월례 모임이 있었고, 미사전 합동세배를 받았습니다. 유우머로 새배돈을 말했지만 저는 새해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8분에게 다음과 같이 만년필로 명필같은 필체로 쓴 봉투에 소정의 새배돈을 넣어 드렸습니다.
“2025년 새해.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2025.1.14.”
이 주님의 평화의 축복이 2025년 한해 계속되리라 믿습니다. 역시 모두가 행복한, 웃는 모습이 꽃같아 사진도 찍어 드렸습니다. 작년보다 젊고 건강해 보인다는 덕담도 드렸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평이하나 새롭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어떤 위대한 발상도 작은 한 걸음만 못하다.”<다산>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걷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간단한 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순자>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의 하루가 참 역동적인 사랑의 실천 동사들로 가득합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두가 사랑의 실천입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후,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시자, 부인은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시중드는 삶, 섬기는 삶은 참으로 신자다운 아름다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하루 전 삶도 ‘섬기는 삶’으로 요약됩니다. 섬김의 영성,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로 믿는 이들의 삶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예수님 앞에 쇄도하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이요, 예수님은 지체없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이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예나 이제나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형태나 양상만 다를뿐 여전히 마귀들린 이들도 많습니다. 유비무환이요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파스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히브리서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을 도와 주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이런 분이요,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를 이런저런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참 자유인이 되어 살게 하시는 구원의 영도자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께 배워햐 할 바, 그분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다.’
이래서 열심한 분들이 선호하는 새벽기도입니다. 제 새벽마다 외딴곳의 기도처는 집무실이요 기도와 더불어 매일 강론을 씁니다. 여러분의 새벽 외딴곳은 언제 어디입니까? 반드시 외딴곳을 마련하여 주님과 일치의 관상시간을 마련함이 지혜입니다. 예전 성염대사님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써드린 ‘새벽’이란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물러나는 어둠, 잠깨는 숲
새로 시작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흡사 예수님의 하루하루 삶의 여정이 흐르는 강물같습니다. 집착함이 없이 사명을 수행하면 지체없이 떠나십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하시니, 바로 기도의 효과입니다. 주님은 외딴곳에서 휴식과 더불어 하느님의 권능으로 충전시킨후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니 진정 예수님은 복음 선포자의 모범이자 사랑의 순례자, 희망의 순례자의 모범이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고백시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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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날 부르신
길이 계시니
설레는 맘으로
길이신 길
따라 걸으며
나도 길이 되어
길을 걷다
벗이 있으니
오롯이 멈추고
내 모든 것
고운 벗에게
아낌없이 주어
홀가분한
빈몸 빈마음
다시 채비차려
또 다른 벗
찾아 나서는
설렌 발걸음은
시나브로
기꺼이 나를
벗에게 가까이
그리하여
새론 만남에
기쁨 가득하고
늘 그렇게
새로 또 다시
길 따라 걸으니
길이신 길
따라서 걷는
나 또한 길이요
걷다 만난
길과 길 이은
벗 또한 길이라
길이신 길
닮은 벗과 나
하나의 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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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기도 습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되 헛되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거운데 누가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 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루카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밤을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였다”(루카 6,12). 요한도그분의 기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l).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늘 기도히는 사람의 기도는 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방법에는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한다. “하느님을 알려면, 매개물이 없어야만 한다 ... 매개물이 없을 때만 우리는 영생의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 이렇게 사물의 투명성과 창조주의 직접성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모두 되찾고, 영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인류의 하나 됨이 빛을 발할 것이고, 인류는 하나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거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본성 안에 머물면서, 바다 저편에서 건너온 사람이든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하여 모든 거룩한 존재의 사귐을 새로이 경험하도록 시간과 장소가 정지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제대로 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사실 속에서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만물이 현존하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똑같이 하나 곁에 있고. 똑같이 하나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모든 성인의 복은 모두 나의 본성 속에서 나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사귐 속에서 시간을 뚫고 나가, 사랑인 하느님의 단일한 터에 보금자리를 치게 될 것이다. 그 보금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이렇게 외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1요한 4,9).(31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클레멘스 5세는 국왕의 복수심에 불타는 요구에 굴복하고, 죽은 교황 보니파시오에 대한 소송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필리프 미왕의 요구에 따라 성전 기사 수도회의 와해에 협조한 것은 더욱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들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십자군이 끝난 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일찍이 십자군에 이바지하였으나 이제는 올바르게 관리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의 부유한 재산과 특권이 국왕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1307년 이래 그들에 대한 음모와 중상의 모든 기록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이단과 음란죄로 고소하고,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에서 약 2천 명의 기사회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잔혹한 고문에 의하여 강요된 자백들과 허위 고발들은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기소하기 위하여 제출되었다. 나약한 클레멘스 5세는 이 수도회를 구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왕에게 완전히 온순해져 이단의 혐의를 인정하고. 1312년 3월 22일에 비엔 공의회에서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성전 기사 수도회를 폐지하였다. 그후 그는 수도회의 재산이 정식으로 요한 기사 수도회에 귀속시키기로 판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와 영주들이 그것을 횡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였다. 또한 필리프가 기사 수도회 회원들에 대해 계속 격노하여 그 회의 총장인 몰레를 무죄 선서에도 불구하고 1314년 이단자로 파리에서 화형에 처하도록 하였고, 그밖의 수많은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화형시키는 것을 묵인하였다.
교황 요한 22세 때(1316∼1334) 프랑스의 영향은 독일 제국에 대한 교황의 정책에 불길하게 작용하였다. 교황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핑계로 1323년에 황제 바이에른 공 루드비히(1314∼1347)를 그의 직무에서 정지시키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렇게 돌발한 싸움, 교권과 제권 사이의 세계적인 대결에서 문제는 이미 위대한 이념이 아니고 순전히 정치적인 목표의 것이었다. 교황권은 프랑스 이권의 조수가 되었고, 그것은 독일에게 쓰라리게 느껴졌다.(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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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리의 첫 사명은 복음 선포 /
박윤식 [big-llight] 2025-01-14 ㅣNo.179298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하였다. 그분께서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병든 이,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아주 캄캄한 새벽,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모두 스승님을 찾습니다.”하고 일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우리는 그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 떠나온 것이다.” 그리고는 그분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면서 하느님 뜻을 전하시고, 어떤 때는 끼니마저도 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셨으리라. 그야말로 육체적으로 아주 고단하셨다. 그 와중에도 동트기 전에도 기도하셨단다. 하루를 시작하시기 전에 하느님과 대화하시면서 모든 것을 그분께 물으셨단다. 그렇게 당신께서 하실 일들이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지를 되묻곤 하셨을 게다. 또 예수님은 참 바쁜 가운데서도 홀로 기도하셨다. 새벽에 외딴곳에서도. 당신 기운을 되찾으시는 모습이다. 우리도 삶에서 무엇이 하느님 뜻이고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지를 올바로 판단하려면 기도해야 될 게다. 그분께서 기도로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그래야만 하리라.
사실 병은 우리 몸의 여러 기능이 저마다의 제 역할을 못하기에 생긴다. 이 기능들을 방해하는 것은 몸의 병균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예수님 시대에는 병이 하느님의 생명과 대항하는 악한 영, 곧 마귀의 힘 때문이라고 여긴 듯하다. 병자들을 치유할 때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내쫓으셨다. 악한 영들로부터 해방되는 게, 곧 치유이기에.
어쩌면 이러한 병으로 겪고 있는 소외감과 상처는, 아마도 관계의 상실에서 얻은 정신병과도 같으리라. 그러기에 가끔 현대인은 마음이 혼란하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의 욕구만 추구하기도 한다. 참된 쉼은 실컷 먹고 마시고, 영상물이나 오락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기도하며 참된 나를 찾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송보다는, 하느님을 만나서 침묵을 가지셨다.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만남의 힘’이었다나.
우리도 바쁘고 힘겨울 때는, 우선 먼저 쉬어야 한다. 일에만 매달리다보면, 그 영혼은 더 황폐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가끔은 휴식도 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은 선교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며 선교에 나서자. 예수님께서도 구원바라는 이들에게 다가가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기도하며, 이웃 찾아 복음을 전파해야 할게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지상으로의 순례를 하셨다. 믿는 우리 역시 믿을 수 있는 이웃을 만들자. 믿게 하는 게 선교다. 복음 선포만이 그분 사랑 실천이다. 이웃 찾아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복음 선포로 온 누리에 평화가 정착되게 하자. 선교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첫째 ‘사명’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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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제와 오늘 복음(마르 1,21-39)을 신학자들은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고 부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 활동, 기도 등을 마치 그분의 하루 일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구마와 오늘 복음의 다양한 치유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이시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 치유, 온갖 질병과 마귀 때문에 앓고 있는 많은 이의 치유, 그리고 예수님의 새벽 기도입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부분에 마음이 더 많이 머무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마르 1,32) 곧 안식일이 지나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예수님 앞은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이는 유다교의 독특한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입니다.
빛보다 어둠이, 낮보다 밤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밤, 낮 하루가 지났다.”(창세 1,5.8.13.19.23.31)라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후렴구 그대로입니다.
더 일찍 오고 싶었지만 안식일 계명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온 고을’에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1,34)과 마귀 들린 ‘많은’ 이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도 많은 이가 주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비 구원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받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와 권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1,38).
그 누가 예수님의 이 사랑의 발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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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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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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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 38)
떠남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만남을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소식을
전하시는
당신의
실천력으로
우리의
새날을
여십니다.
삶을
꾸려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은
삶의 목적입니다.
삶의 목적이
만들어가는
소중한
우리들
삶입니다.
복음선포가
삶의 목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직접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의
치유가 되고
생명의 길이
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만들어내는
복음이며
복음에
맡겨야 할
우리의
생활입니다.
목적이 되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길을
보여주십니다.
끊어진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십니다.
복음을 몰랐고
복음을 믿지도
않았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참된 기쁨도
몰랐습니다.
삶의 목적을
잃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복음을
예수님의 삶으로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는
가장 좋은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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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일상적 버리고 떠나기!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해보니, 이 시대 우리 사목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고 기도하고 활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명확히 들어있습니다.
① 가르침. 회당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웠던지, 듣고 있던 청중들은 다들 한목소리로 그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신선한 가르침이라고 감탄했습니다.
말씀은 간결하고 쉽고 단순했지만, 명쾌하고 강렬했습니다.
말씀에 힘이 있고 살아있었습니다.
청중들은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말씀이 이루어지고, 해방과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 말씀 선포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길고 장황할뿐더러 세상 고리타분하고 구립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르침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가르침으로 본인만 신나지 듣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연옥벌이라도 받도 있는 분위기입니다.
② 치유와 구마.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기 좋은 말씀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겪고 있는 절박함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치유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거처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던 이들, 마귀 들린 이들, 죽어가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그 자리에서 치유되고 해방되는 기적을 만끽했습니다.
수많은 군중, 특히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심연의 고통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예수님의 거처였습니다.
텅텅 비어가는 오늘 우리의 성전과 본당과 수도원을 바라보며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③ 기도.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활동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잘 이루셨습니다.
거듭되는 치유와 구마 활동으로 하루 온종일 시달리셨던 예수님께서는 아직 캄캄할 때,
제자들을 쿨쿨 코를 골며 잠들어 있던 이른 새벽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홀로 외딴곳으로 가셔서 열심히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치유와 구마 활동 그 배경에는 열렬한 기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쉽게 극단적 활동 주의에 매몰되고 마는 우리들입니다.
일에 매몰되어 기본적인 기도도 소홀히 하는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④ 떠남.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기도하고 계시던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고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떠나셨습니다.
지상에 머무시는 내내 예수님께서는 부단히 떠나고 또 떠나는 진정한 순례자로 살아가셨습니다.
나이 먹어갈수록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노력 한 가지가 있으니 일상적인 버리고 떠나기입니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것들이 사실은 모두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모든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거듭 떠남과 버림을 통해 우리 안에는 오직 하느님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거듭할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순수성에 이르게 됩니다.
순수성에 도달하게 될 때, 단순성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단순성은 하느님의 영원성, 불변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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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우리는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하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그분께서 와 계시는데,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고 그 여인을 고쳐 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하며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항상 찬미와 감사를 받아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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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가 행복의 핵심인 이유
이번 1월 가두 선교 때 저는 몸이 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빠졌습니다.
조금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자들만 내보내 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교를 나가는 일은 어렵습니다.
춥고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신앙생활 하면 되는데 내가 왜 나서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이것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행복해서입니다.
힘든데 행복합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않고는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참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란 말을 듣습니다.
이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행복임을 깨달아야 신앙이 나에게 행복을 줍니다.
영화 ‘배트맨’을 보았을 것입니다.
배트맨의 주인공은 브루스 웨인입니다.
웨인이 어렸을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우물에서 갑자기 많은 박쥐가 어린 웨인을 덮쳤습니다.
웨인은 그 트라우마로 어둠과 박쥐가 싫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과 오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에도 박쥐가 나오는 것입니다.
웨인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부모님께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챕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웨인을 데리고 극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한 악당이 나타나 웨인의 부모를 살해합니다.
웨인은 자신이 박쥐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면 부모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더 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술을 갈고닦습니다.
드디어 범인이 잡혀서 재판받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총 한 자루를 숨기고 재판정에 갑니다. 그런데 재판은 무죄로 끝납니다.
그 범인의 보스가 그를 무죄로 풀어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사람들 앞에서 암살합니다.
골칫거리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웨인은 원수가 힘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며 허무함을 느낍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는 원수가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쥐와 어둠이라는 원초적 공포와 마주해야 합니다.
이 상징적인 도시가 그가 살고 있던 고담 시티입니다.
어둠과 범죄, 박쥐와 같은 이들이 활개 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자기 원수를 죽인 원수가 이번에는 고담 시티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고담 시티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박쥐의 탈을 쓰고 박쥐의 망토를 두르고 어둠 속에서 죽어야 마땅한 도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자 보람을 느낍니다.
부모님이 자신이 이런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돌아가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드디어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둠이 올 때마다 이전처럼 우울함에 잠기기보다는 선량한 사람을 지키고 일으키려고 일하기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만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행복했습니다. 죄를 짓기 전까지는. 그전까지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에덴동산의 지위로 다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고 새벽에 혼자 기도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예수님께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은 일은 기쁜 일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동물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삽니다.
누군가 그들을 위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동물의 수준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주인이 누리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 스승이 무술을 가르쳐주며 하는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자경단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허우적대는 족속들에 불과하지.
그러다 결국엔 죽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자네가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 하나의 이상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해서, 누구도 그런 자네를 막지 못한다면…. 자넨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겠지.”
(브루스 웨인: “그게 뭐죠?”)
“전설이라네, 웨인 씨.”
천국은 고통의 세상에 속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침에 있는 것이 아닌,
그 고통받은 이들을 구원하라는 부르심에 매일 응답함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진리.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미사 끝에 하는 이 한마디가 기쁜소식의 핵심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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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곧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29-39).”
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것만으로 병을 고치신 일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당신의 권한과 의지만으로 ‘병’을 쫓아내신 일이고, 병을 지배하는 주님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가 루카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열을 꾸짖으시니’는 ‘열’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다는 뜻이고, ‘열이 가셨다.’는 그 ‘열’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났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의 기록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증언입니다.
2) 예수님께서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이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그 억압 가운데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병마(病魔)의 억압’입니다.
오늘날에도 온갖 질병의 고통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고통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몸의 건강’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물론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의 건강’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마귀들이 당신을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아는 척’을 하는 것일 뿐이고, 사실은 그것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은, 다른 곳으로 가시지 말라고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인데, 그들의 심리는 ‘빵의 기적’ 후에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요한 6,15)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합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몸의 배부름’만 원했던 것처럼, 카파르나움 사람들도 ‘몸의 치유와 건강’만을 원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시지 말라고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거절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씀에는, “너희는 ‘몸의 건강’만을 찾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만나는 장면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아마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너무 기뻐서 예수님 곁에만 있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서’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누르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짜로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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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9-39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내시는 숨가쁘게 바쁜 하루는 그분이 3년이라는 공생활 내내 살아가신 모습의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을 맞으신 예수님은 오전에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고, 낮에는 모든 유다인들이 집에서 머무르는 관습대로 제자인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셔서 함께 하셨으며, 해가 지고 공식적인 안식일이 끝난 저녁시간 이후에는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셨지요. 쉬거나 밥 먹을 시간은 물론이고 정말 제대로 숨 돌릴 틈 조차 없는 고된 일정이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한 명 한 명 사랑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홀로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하면 여러가지 이유로 기도를 나중으로 미루곤 하는 우리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지지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일이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피곤해서, 힘들어서 등 여러 이유나 핑계를 대며 신앙생활의 기본 중의 기본인 기도를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기도가 당신 삶에서 최우선이자 가장 소중한 일과였지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함으로써 당신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되새기셨던 겁니다. 그랬기에 수많은 이들이 당신을 찾고 만나고자 하는 상황에서도 대중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본래 소명인 복음선포를 위해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실 수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그분 뜻 안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세상에 보내셨으니, 하루를 시작하기 전 그분 뜻을 헤아리고 찾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소원이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기도의 참된 목적이자 원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찾고 받아들이는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실 때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셨지요. ‘주님의 기도’를 그렇게 자주 오래 바쳐왔으면서도 저 첫번째 원의를 진심으로 바라고 청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일, 사람의 일을 다 마친 후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에는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도,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도, 그분의 뜻에 대한 헤아림도 없기에 그저 눈앞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주술행위’가 되고 말지요.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온 마음으로 기도를 바쳐야 내가 보내는 그 날 하루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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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고난을 겪으시면서”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 결심이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 세운 뜻을 변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주님의 소명인 복음선포와 병자들 치유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8-39)
예수님께서는 어제 오늘 결심하고 소명을 이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당신 소명의 길을 성실하게 이행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권위보다는 유혹과 죽음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사람 입장에서 일하셨습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구약의 대사제의 의무를 충실하시면서도 죽음으로 파멸되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으스러지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 내일도 변함없이 당신 소명을 펼치시며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은 군중을 놓고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치유의 은혜를 따져보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이 소중하신 것입니다.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고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손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이들과
악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분 한분을 마주하며 그분들을 바라볼 때 그분들의 개개인의
삶이 손을 통해서 마음으로 전해옵니다.
특히 교우분들의 한분 한분에게서 전해오는 정을 대하다보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성당 안에서 전체 교우들을 바라보는 것과 각 개인들을 잠깐이라도 일일이 만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깝게는 베드로 사도의 장모에서부터 병든 이들, 또 마귀 들린 이들 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시며 정성을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가결의
원칙에 따라 결정되다보니 소수가 무시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개인이라도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즐거이 오시는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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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기쁨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에서 보여주신 행보는 믿는 이들의 하느님을 향한 순례 일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일상생활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순례 여정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아 세상에 자신의 전 존재를 깊이 담그시는 것으로 공생활의 문을 여십니다(마르 1,9-11).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순례도 이 세상의 소외와 차별, 고통과 불의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聖)과 속(俗)을 나누어 차별하는 이원론적 사고나,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나 초월을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영성생활로 착각하는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보내지시어 사십 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1,12-13).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준비피정을 하신 셈입니다. 우리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하느님 앞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복음선포라면 나날의 준비피정은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피정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1,21-28),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시어 안식일임에도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1,29-31). 그뿐 아니라 저녁에도 몰려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1,32-34).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제도와 때와 장소를 뛰어넘어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과 해방을 위해 투신하는 삶이 되어야겠지요.
복음선포는 시간과 때가 따로 정해진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담아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하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할 때 성사(聖事)가 되고 복음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설겆이나 청소, 따뜻한 대화, 직장 일,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의 만남,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에 대한 생각,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젊은이들의 얼굴을 바라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감 등 모든 계기가 바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기입니다.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십니다(1,35). 복음선포 여정 중에 멈추어 다시 홀로 하느님 앞에 머무신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심지어 맡은 교회일도 너무 많아 ‘정신없이’ 바쁜 이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되새길 시간은 자주 뒷전으로 밀리곤 하지요. 그러나 멈추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지 않은 채 제 뜻대로 달려가기만 한다면 결국 세속화와 타락을 불러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1,38) 하시며,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1,39) 그렇게 우리의 일상도 그침 없는 복음선포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향한 나의 인생 순례 일정표를 다시 챙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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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일이 유독 많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오늘날에도 계속해야 하는 제자들인 우리로서는 늘 당혹스럽고 어찌해야 할지 잘 몰라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마르 1,29-31), 사람들이 데려온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마르 1,32-34)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은 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으시는 메시아적 행위입니다.(히브 2,15) 그래서 그분은 살이 되어 우리와 똑같이 되셨고 자비로운 대사제로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고난과 유혹도 받으셨습니다.(히브 2,14. 17-18)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이 일을 하시고자 애쓰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마귀들림)은 우리를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이 상태에서 치유되는 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복음선포도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라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영육간의 질병과 고통을 겪고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처럼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최선을 다해 힘이 되어주고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마르 1,35)하는 것입니다.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도 또 갖가지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도 모두 '사람들이'(마르 1, 30. 32)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치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랍비들에게 있어 여성과 대화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마르 1, 31) 일으키기까지 하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곧바로 치유되어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행위였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활동 때문에 자신이 영광받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알고있는 마귀들의 말문을 막으셨습니다.(마르 1, 34)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루신 구윈의 행업에 대해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마르 1,35)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도 오늘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별 능력도 없는 자신이라고 실망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거저 영육간에 고통을 받고 있어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기도와 미사중에 우리는 누구를 예수님께 맡겨드리시렵니까?
오늘도 겸손하게 기도 안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에 기쁘게 참여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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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연중 제 1주간 수요일.
인생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삶
<2025.1.15>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0:1~15절)
❝인생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삶❞
❚ 실수하여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위기 앞에서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 닥친 위기를 기회로 선용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1~5절).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여기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창 14:18절에서는 ‘살렘’이라는 지명으로만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이 듣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들은 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처럼 아이 성을 빼앗아 진멸하였다는 것과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어 그들의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브온은 아이 성보다 훨씬 큰 성이었고, 군사력도 강했기 때문에(2절)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남부 지역의 네 왕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기브온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3~4절)합니다. 이에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은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기브온을 공격하려고 진을 쳤습니다(5절). ‘아모리’는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가나안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가나안의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을 겪을 때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 때,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라합도 그리고 기브온 사람들도 인생의 위기 앞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세덱의 선택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세상의 힘의 가치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은 다릅니다. 우리 판단에는 이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선택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현재 겪고 있는 이 걱정과 근심 그리고 고난이 가져다는 절망의 현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기 딱 좋은 시기임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급하게 내 방식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대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현재 겪는 위기를 기회로 선용하는 믿음을 통해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6~10절).
가나안 다섯 왕의 연합군에 위협을 느낀 기브온은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이 종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속히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구출해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산간지방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들이 연합군을 이끌고 우리를 공격...’(6절,새번역)하였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서 올라갈 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8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9절) 밤새도록 진군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여호수아는 벧호른의 오르막 길을 따라서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그들을 추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10절).
약속을 신뢰하지 않으면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기브온은 약속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여호수아 역시 약속한 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갈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승리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삶이 무기력해지고, 패배 의식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랄 때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삶을 도우실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을 따져서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쉽게 행동하지 않아야 하며, 약속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꼭 필요한 약속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약속을 했다면 성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고 우리에게 여려 어려움을 줄지라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려고 애쓸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에 닥친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기적을 확신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11~15절).
아모리 다섯 나라와의 싸움은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우박 덩이(11절)’를 내리셔서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습니다. 또한 태양과 달을 멈추시게 하셨습니다(12~1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14절)..
우리 자신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편이십니다. 우리의 편에서 우리를 대적해 들어오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십니다. 인생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삶에서 겪는 억울함과 답답한 문제까지도 해결의 방법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 어떤 것도 감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순종하여 주님이 이끄시는 데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넘어서야 할 인생의 장벽은 무엇입니까? 기적을 확신할 때, 뛰어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답게 상황과 기분에 따라 가볍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을 닮아 신실한 믿음을 키워가며, 책임감 있는 태도를 세상에 보이는 바른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수 10:1~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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