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자주 보지 않던 티브이를 본 게 행운이었다. 리모콘은 언제나 아내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날따라 외출해준 아내가 고맙다. 뭘 보았기에 이렇게 부산을 떠느냐고?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열리면서 친구들 카톡방이 난리가 아니었다. 내가 티브이를 틀었을 때 벌써 1부가 끝나고 2부를 준비하는 광고시간이었다. 고향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 딸이 여우조연상을 받는다고. 친구들이 부산을 떨만도 했다. ‘미쓰 백’에서 계모 역으로 온갖 밉상을 부린 친구 딸, 권소현이 조연상을 탄 것이다. 친구 딸 출연작이 나올 때마다 얼른 보고는 인증 샷을 해서 친구한테 체면을 세워야 친구 된 도리가 아닐까 해서. 상은 엉뚱하게 내가 보지 못한 미쓰 백이 탈 게 뭐람. 데뷔작 마돈나로 칸느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평론가협회에서 신인상, 조연상까지 받은 실력파라 백상예술대상에서 조연상을 탄 건 탈만한 사람이 탄 거라고 본다. 요즈음 방영하는 '밀애'에서 방두네로 나오는 권소현을 주목해 주시길. 나도 수상 장면을 본 것처럼 축하 멘트를 날리고 2부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냥 넘어가겠수. 신인상을 탈 때 아빠친구 자격으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선 무대에 올랐다가 옆에 선 그날 대상을 탄 김혜수와 악수를 했다는 사실을.
많고도 많은 배우들이 영화에서 연극, 티브이로 상을 받는 감격적인 화면이 흘러갔다.내 친구 딸이 상을 받았다고 오늘 수다를 떠는 게 아니다. 그날, 백상영화제를 지켜본 사람들 중 단 한 사람, 그가 한 수상소감을 소개할까 해서다. 이 정도로 진도를 나가면 ‘오~라, 그 사람’ 하시겠지. 그래 김혜자 선생이다. 탈랜트이자 배우 김혜자를 선생이라고 불러야 도리가 아닐까. 바로 ‘눈이 부시게’ 로 상을 받으시는 김혜자 선생이 수상 소감을 하려고 종이쪽지를 꺼내면서다. 대상을 받은 '눈이 부시게', 티브이 장면부터 시작해보자.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든 안내상이 요양병원으로 엄마를 찾아온다.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알츠하이머환자인 김혜자에게 아들이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휠체어에 앉은 김혜자가 말한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음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앉혀놓고 그때 한참 아장아장 걷는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 노을이 져요.” 막 퇴근하는 남편이 아들을 안고 젊은 김혜자, 한지민과 함께 저녁노을을 보는 장면에서 김혜자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제 김혜자 선생이 쭉 찢어온 꼬깃꼬깃한 대본을 꺼내서 수상 소감을 한땀 한땀 읽어간다. “내 삶은....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짱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였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김혜자의 목소리는 흉내낼 수가 없다. 애잔한 선생의 목소리는 무심한 바람이 지나가며 흔들어 놓은 탓인가, 떨리는 소리하며 따스한 애정이 묻어나는, 노을 같은 소리다. 금방 사라져갈 노을에 젖어 물이 뚝 흐를 것만 같은. 영화제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수상소감을 시작할 때부터 기립해서 듣고 있더니 소감이 끝나자 큰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소감을 들으며 눈가에 번져오는 눈물을 훔치며, 더러는 흐르는 눈물도 그냥 둔 채 선생의 저녁노을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소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며 귀여겨듣고 있었다. 대배우의 포즈였다. 수수한 드레스하며 여든을 넘긴 여배우의 수상소감은 장내를 압도했다. 선배를 예우하는 차원이었을까. 아니었다.
티브이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숙이고 별 볼일 없는 하루를 살아가는 초라한 이웃 아저씨도, 살아온 나날이 덧없었음을 한탄하는 노인네의 가슴에도 무언가 흔들어놓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을 게다. 취직을 못해 오늘도 고시촌 골목길에서 혼밥을 먹고 있는 다소 불운한 청춘도 이 소감을 듣고선 울었을 것 같다. 그대는 아시는가? 울고 난 뒤의 말갛게 개인 얼굴을. 정말 울고 난 뒤에 오는 평안함과 내 몸 깊숙이까지 씻어내서 깨끗해진 느낌 뭐 이런 거. 김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나간 소감은 드라마에서 알츠하이머 선생에게 맡겨진 나레이터였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나레이터를 그대로 수상소감으로 사용한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해 외우고 했을 나레이터가 자신이 없어 대본을 쭉 찢어온 선생도 이젠 많이 늙으셨다. 그렇다 이 나레이터는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세상에는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리고 당신은 존중받아야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연필로 꾹 눌러쓴 편지같이 강조하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김혜자 선생과 한 시대를 사는 것도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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