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쉬는 새로 발견된 금 매장지로 한몫 보려는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드는 것을 말한다.
1550년경의 보헤미아, 1850년대의 오스트레일리아, 1880년대의 로디지아, 19세기 후반의 시베리아 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주로 미국에서 일어난 것을 가리킨다.
1848년 1월 24일 캘리포니아 주 수터스밀에서 금이 발견되자 그 이듬해 약 8만 명의 '포티 나이너'(fortyniner:1849년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들이 서부 해안으로 몰려갔다.
또 다른 골드러시는 1886년 알래스카를 지나는 유콘 강의 포티마일 강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뒤에는 클론다이크와 놈에서도 금이 발견되었다.
미국 골드러시 개척자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개인적 성향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거의 대부분이 남자였다.
대중들에 의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개척자 야영지와 마을은 골드러시로 급속히 성장했으나, 더이상 금이 나지 않으면 그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서부 해안의 발전과 독특한 지역적 특성의 형성에는 이러한 극적인 관심과 인구 유입이 매우 큰 요인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가 주요대도시로 된 것은 주로 19세기 중반의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1876년의 골드러시 현장인 사우스다코타 주 데드우드걸치와 같은 많은 유령 도시가 다시 건설되어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1850년대의 미국 개척민들이 너도나도 캘리포니아로 몰려간 현상을 말한다.
그 수는 무려 2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골드러시에 참여한 개척민들에게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고유명사까지 붙었다.
사금의 첫 발견은 1848년인데 49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사금 소식을 들은 동부인들이 캘리포니아에 도달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의 포티나이너들만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 중 여성의 비율은 1/10도 안 된다고 한다.
다만 이때 발견된 물건들의 대부분은 금이 아닌 황철광이었다.
그래도 황철광과 금이 얼핏 보면 구분이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이 엄청 많이 나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밥 한끼 먹는 데 금 한 덩어리를 냈다고 하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
미국의 골드 러시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캐나다 밴쿠버나 오스트레일리아, 남미 브라질 등에서도 만만찮은 골드 러시가 있었다.
사실 엘도라도 전설도 일종의 원조 골드 러시로 볼 수도 있다. 유럽의 남미 침략 시기에는 실버러시도 있었다. 은광이 있거나 있을 법한 곳에는 콩키스타도르들이 몰려 들었다.
중국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찐산(금산)이라고 부르고있고, 한때 맬버른을 씬찐샨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때의 유산이다.
골드 러시(gold rush)는 상업적 가치가 있는 금이 발견된 지역에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하였던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19세기에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브라질, 캐나다, 칠레,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미국 등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로 새로운 지역에 이주민 정착촌들이 건설되었고, 이주민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새로 개발된 금광에서 채굴된 금은, 당시 금본위제였던 화폐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미대륙에서 처음으로 금이 발견된 것은 1820년 말 달로네가 근처에서였다.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금을 채굴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강행하였고, 이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병, 추위, 굶주림으로 죽은 《눈물의 길》로 이끄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양의 금이 발견된 것이 아니었기에 골드 러시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골드 러시는 1848년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강 근처에 있는 존 서터(Johann Sutter)의 제재소에서 발견되었다.
1848년 1월 24일 존 서터가 제재소를 건설하고 있는 동안 그의 목수인 제임스 마셜이 우연히 금을 발견하였다.
서터와 마셜은 서로 동업자가 되기로 하며 그들이 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누설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
그 당시 라디오도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미국 동부에 전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양의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좇아 제재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골드 러시는 1849년에 시작되었다. 그 해 약 80,000명의 포티나이너스 들이 캘리포니아의 금광지대에 몰려들었고,1853년에는 그 수가 250,000명에 달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유입되어 그로 인해 골드 러시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고 채굴 가능한 매장량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또한 금을 채굴하는 데 있어 효율적이고 장비를 갖춘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였다.
금 광산 지대가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장소로 변모하자 정부의 감시체제와 함께 법이 강화되었다.
1853년 금이 대부분 고갈되어 골드 러시의 세력이 사그라지면서 거주지들은 다른 성장 가능한 경제활동이 부족해져 유령도시로 변했다.
골드 러시는 1849년부터 1853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서 성행하였던 금 채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