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0일(대림 제4주일) 루카 1,39-45
아기도 기뻐하는 축복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배려로 수태하였다는 말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도 말합니다. 이어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마리아를 영접한 엘리사벳이 기쁨에 차서 하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동을 회상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공동체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깨달은 바와 그들이 실천하던 바를 글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복음서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기 전의 일들, 특히 그분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일들은 그들이 회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서에 남긴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관련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아 꾸민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그들의 이야기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류에게 어떤 축복과 기쁨인지를 말합니다. 오늘 현대인은 정확한 사실을 전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전하였습니다. 기록하고 전달하는 수단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는 마리아와 그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기뻐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 | | ▲ '방문'(제단 장식 그림), 멜히오르 브루더를람.(1399) |
오늘의 이야기는 대단히 소박합니다. 위대한 것도 화려한 것도 없습니다. 한 여인 안에 장차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생명이 수태된 것입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를 위대하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축복과 기쁨에 넘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혹은 존경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우리는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서둘러 가서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를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사람들 안에 축복과 기쁨을 발생시키며, 섬기는 분이었다는 것이 초기 교회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지킬 계명을 주고, 정성을 바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이고 기쁨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며,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여, 삶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생명을 주고 살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축복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재물과 권력입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력이 소중하게 보이는 곳에,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무자비하며, 남에게 군림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빌고 바쳐서 재물과 권력을 얻어 누리려고도 합니다. 하느님에게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신다고,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말 뒤에는 하느님을 후광으로 재물과 존경을 탐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일이고, 인류 역사 안에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은혜롭고 사람을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짐진 여러분은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하느님, 삶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은혜롭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알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로움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교회가 유럽에서 일찍이 교육과 의료에 눈 뜨고, 그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한 것도 교육으로 삶의 은혜로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고, 생명이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의료로써 생명의 은혜로움을 되찾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한 일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깊은 곳, 그 태중의 아기까지도 기뻐 뛰놀게 하는 축복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주인공인 오늘의 복음은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소박한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은 그런 곳에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적 삶 안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은혜로움을 볼 줄 아는 시선과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은혜로움을 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과도 그것을 나누어 그들도 같은 기쁨을 체험하게 합니다.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이웃도 기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영접하고 이웃과 그것을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는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이론의 대상도 아니고, 높은 옥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축복과 기쁨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분노하라, 저항하라, 그것으로 기뻐하라!
마리아의 노래는 저 옛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다시 표현해 낸 것이다.(1사무 2,1-10) 한나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사회 계급의 대립적 구조다. 마리아를 묘사하는 말마디는 ‘비천함’이다. 반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엘 샤다이, 탈출 6,3 참조)’으로 인식된다. 비천한 마리아가 전능하신 분을 찾는 이유는 세상에 억눌려 소외되고 기가 꺾인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현실적 ‘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신심이 깊거나 영적인 능력에 집착하는 이들, 또 아니면 교조주의에 빠져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합리성만 따지는 이들에게 마리아의 노래는 자주 종교적 언사로만 인식된다. 현실적 힘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마리아의 노래를 언급하는 데 별다른 저항이 없다. 이런 현상은 역사의 생생한 자리에서 주님의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각자도생의 길에 집착하는 맹신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리아의 노래는 ‘종교적’ 편향성을 지양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이야기 또한 품고 있다. 온 백성이 마리아를 복되다 하고, 권세 있는 자들, 부요한 사람들을 내치시고 돌려보내시는 건,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이고, 돈 이야기이며, 권력 이야기다. 거기에 하느님은 비천하고, 보잘것없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전능하신 팔”을 펼치신다. 뜬구름 잡듯 하늘에서 호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으로 구체적 현실 안에, 그것도 비천한 이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다.(시편 98,1; 118,15-16; 이사 51,9; 52,10). | | | ▲ '마리아의 방문',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1445) |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의 구원이나 영달을 위한 자기 암시의 노래가 아니다. 루카는 분명히 현실적 가난과 사회적 억압의 자리에 예수의 복음을 배치시킨다.(루카 4,16 이하 참조) 마리아는 현실의 아픔과 정치 경제적 대립 안에 오시는 하느님의 지상 삶을 미리 예언하는 셈이다. 십자가의 길, 그 길을 하느님은 걸으실 것이고,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신앙인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요즘 들어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유독 하나의 일에 집착한다. ‘묵시사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무슨 무슨 사회’라며 유행하는 제목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속에 조심스레 편승하고픈 마음에서다. 덧붙여, 배운 바를 통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무슨 사회’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예리한 관찰력과 인문학적 소견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배움이 현실에 조응하여 살아 있는 지혜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보여 주려는 것일 테다. ‘묵시사회’라는 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적어 보았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난 역사를 살다간 이들에 대해 빚진 마음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책임, 그리고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연민이 어우러져 지금 여기서의 실천적인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만나는 우리들은 현실을 살아간다. 성경 안의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 화려한 천상에서가 아니라 굴곡 많은 현실의 세상에서 예수는 죽어 갔고 현실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는 늘 함께한다. 말씀은 늘 현실을 향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말씀을 유토피아(자리가 없다는 말,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로 내몰며 허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없는 이를 억압하고, 배고픈 이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못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팔을 믿고 담대히 ‘그러지 말라’ 외치는 현실적 저항이 마리아의 노래 속에 묻혀 있다. 외쳐라, 분노하라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를 바꿔라.... 이렇게 외치는 듯 마리아의 노래는 내 귓가를 즐겁게 파고든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새 아담의 탄생
예수님 성탄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교회와 세상이 크나큰 축제로 지내는 것입니까? 단순히 가장 많은 사람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창시자의 탄생이니까 기뻐하고 축하한다는 겁니까?
얼마나 대단한 탄생이기에 임신 중인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태중에 있던 세례자 요한도 즐거워 뛰놀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면 이분의 탄생을 좀더 자세하게 들여다볼까요?
하느님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비참함에 놓여 있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것인가? 아담과 하와의 첫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와 비참하게 됐습니다. 이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은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서 하느님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함으로써 구원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노래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하느님 곁을 떠나서 비참하게 살게 된 인간을 찾아서, 새로운 인간이 순종으로써 비참한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하느님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면서 인간이 되셔서 탄생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새 하와이십니다. 새로운 인간이지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태중에 자리 잡고 하느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는 신비로운 육화를 맞이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순종과 함께 새롭게 시작된 새 인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십자가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생 전에 이미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십자가를 향하는 운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성탄으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아, 결코 보잘것없지 않다.’
사촌 언니 엘리사벳과 석 달가량 함께 지내던 성모 마리아께서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왜 하느님은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선택하시면서 ‘하느님의 인간 탄생’을 진행해 나가는 것일까요?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보잘것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 그것도 마구간을 향하는 고된 여정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 강한 이 신비로운 부부가 한 걸음씩 걸음을 떼어놓습니다.
오늘 저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잘것없는 곳을 하느님 뜻에 따라서 기꺼이 향하나요? 상업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의 안락한 세계에서 기꺼이 힘든 과정을 묵묵히 참아내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심을 간직하면서 작고 가난한 곳을 향해서 기꺼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나요?
오늘 제주 강정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이 광야가 아니라 강정의 외딴 바닷가에서 하신 외침이 제 마음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너 강정아! 너는 한국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이지만 너에게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
그분도 참 현실적인 처신을 못 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책도 없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십니까? 며칠 있으면 강정의 해군 기지 공사도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평화를 외치십니까?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의 후미진 곳곳에서 고단하게 살아갑니다.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 죽어가는 사람들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다시 살리려는 연대의 행렬이 마치 베들레헴을 향하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발걸음 같기도 합니다. 멀지 않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서 이뤄지는 일이기도합니다.
우리도 간절히 외치면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 한가운데서 참된 성탄을 맞이하고, 희망과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다.’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대림 제4주일, 미카5,1-4ㄱ 히브10,5-10 루카1,39-45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것인가? -누가 아름다운 사람인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4개의 영롱한 대림초가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환히 밝힙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은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사순시기가 산문散文같다면 대림시기는 시詩같은 분위기입니다. 동심童心이 꿈처럼 피어나는 기쁨의 대림시기입니다.
잃었던 ‘오래된 미래’를 회복하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오늘 대림4주 아침 성무일도 후렴을 봐도 온통 주님의 ‘오심’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1. 보라, 지고하신 임금님이 큰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리라. 알렐루야.
2. 예루살렘의 딸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의 임금이 오시리니, 시온아, 두려워 마라. 너의 구원이 임박하였도다. 알렐루야.
3. 능하신 하느님께서 지체치 않고 오시리라. 그분이 오실 때 우리 마음은 깨끗하여져 그분을 합당하게 맞아들이리라. 알렐루야.
독서의 기도 세 후렴에 이어, 아침기도 세 후렴 역시 온통 주님의 오심에 초점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날이 가까웠으니 시온 산에서 나팔을 불라. 보라, 주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알렐루야.
2. 주께서 오시나니, 마중 나가 노래하라. 알렐루야.
3. 천주여, 당신의 전능하신 말씀은 당신의 어좌로부터 오시겠나이다. 알렐루야.
주님은 오시고 우리는 마중나갑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흥겨운 내용들인지요. 그대로 시요 기도요 노래입니다. 후렴마다 알렐루야, 주님 찬미가 뒤따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에 하느님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찬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찬미가 운명을 바꿉니다. 산문같은 단조로운 삶을 시같이 기쁨 넘치는 삶으로 만듭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가 시같은 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까?’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작은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꿈꾸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사람은 꿈꾸는 사람입니다. 꿈꾸는 작은 사람이 되어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꿈, 하늘 꿈입니다. 작은 사람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깊습니다. 외관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작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큰 사람입니다.
바로 가난하고 겸손하여 온유한 사람이 바로 작은 사람이자 동시에 큰 사람입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큰 바다가 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미카 예언자가 꿈꾸는 작은 사람입니다. 미카뿐 아니라 2독서 그리스도가,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 역시 작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전형적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인 아나빔입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완전히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화려하고 웅대한, 크고 큰 도시 예루살렘이 아닌 보잘것없는 작고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은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똑같습니다. 유다 산악 지방의 무명의 작은 고을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위대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딱 들어맞는 구절이 즈카르야서 4장 10절입니다.
“누가 감히 미약하게 시작한 날을 비웃느냐?”
미약하게 시작한 날의 직역은 ‘작은, 보잘것없는 것들의 날’입니다. 선택된 백성인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이 날에. 예언자는 하느님 홀로 온 땅을 다스리시고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이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곳에서, 겸손한 작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이 계시기에 절망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미카 예언자의 말씀이 또 대림4주일을 맞이하는 작은 우리들을 한껏 고무합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바로 우리가 미사 중에, 또 성탄에 기다리는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목자로, 평화로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평화로 가득 채워 주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입니다. 자기 뜻대로 사는 큰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작은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이런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히브리서의 그리스도가 그 모범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40,7-9절을 렉시오 디비나 하여 그리스도의 입에 담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들어오시는 첫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참다운 제사를 바치신 완전한 대사제이셨습니다.
히브리서 마지막 구절도 은혜롭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는 제사를 바치시어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주님의 뜻을 잘 실행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아, 이 말씀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온 존재이유입니다.
평생화두로 고백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순종의 삶보다 주님 맞이에 좋은 준비도 없습니다.
셋째, 기쁨의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꽃같은 기쁨의 얼굴과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강론 서두에서 강조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정적 특징이 기쁨입니다. 겸손의 작은 자 되어 살 때,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저절로 샘솟는 기쁨입니다.
역시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도 순전히 주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울의 어둠을 한 방에 날려 보냅니다.
대림의 기쁨은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막연한 기쁨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맞이하는 기쁨, 만남의 기쁨, 찬미의 기쁨입니다.
이런 맑고 향기로운 기쁨을 맛보지 못해 세상의 육적 쾌락을 찾습니다. 하여 피폐해지는 마음입니다. 기쁨과 쾌락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기쁨은 영육을 건강하게 하지만 쾌락은 중독으로 이끌고 마침내 사람을 망가뜨려 폐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쁨보다 더 좋은 영적 해독제도 없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기쁨 가득한 영적 도반道伴들의 만남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주님을 만난 엘리사벳의 성령 가득한 기쁨에 넘친 고백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오늘 아침성무일도 때 우리는 즈카르카 후렴을 엘리사벳과 함께 신나게 노래했습니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왔을 때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도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을 모실 때 기뻐하며 뛰노는 우리 마음을 상징합니다. 엘리사벳의 다음 말씀에 마리아의 온갖 근심 걱정, 스트레스도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통해 주님을 만나 위로 받고 완전 치유된 마리아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이 마리아부터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겨울나무를 생각했습니다. 예전 어느 수녀님이 나이 50을 넘어서니 겨울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도 생각이 났습니다. 겨울나무가 흡사 '하느님의 작은 자'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1. 부활의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입니다.
2. 침묵중에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겨울나무입니다.
3.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겨울나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가난한 겨울나무가 되어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 4주일 루카 1,39-45(15.12.20)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Mary visits Elizabeth
믿음과 사랑으로 꾸미는 구유
오늘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몸을 전부 바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히브 10,10). 이타적인 사랑, 조건 없는 희생의 태도를 지닐 때 내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탄의 기쁨은 수난과 희생을 품은 씨앗입니다.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메시아와 그분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의 만남이 그 협조자들인 두 어머니들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만남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그렇게 힘없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실현되어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태 안의 요한(1,15)은 마리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즐거워 뛰놀았습니다(1,44). 태 안의 요한이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시작한 것이지요.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은 깊은 믿음으로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이신 주님이시고(1,43),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시며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복되다고 말합니다(1,45).
두 여인의 만남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 머물 때 우리 가운데 오시는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만남이 세속적인 기쁨의 추구나 현세적 만족을 추구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육(肉)적인 만남이라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구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하느님을 회상케 하고 발생시킨다면 그 관계 자체가 구유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아 주님을 품으셨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셨기에 복된 분이십니다. 우리도 성탄의 기쁨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주님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내 안에 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와 사랑과 생명을 품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靈)을 품고, 경건하고 순수하며 거룩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복된 존재가 될 때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굳은 믿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연대하며, 먹히는 밥이 됨으로써 주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복음: 루카 1,26-38
성모님처럼 절실하게 갈망하라
한국 애니매이션으로 한국에서보다는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던 ‘넛잡(The Nut Job); 땅콩 도둑들’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1억 3천만 달러라고 하니 대박이 난 영화입니다.
공원에 사는 조금은 아웃사이더인 설리라는 남자 다람쥐가 있습니다. 그가 공원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먹을 것을 구하려다 겨울을 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아주 조금의 식량마저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공원식구들의 만장일치로 설리를 추방하여 도시로 쫓아 보냅니다. 도시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던 설리는 땅콩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개가 있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엄청난 양의 땅콩을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 공원 동물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신 편의 동물들을 시켜서 이 계획이 실패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설리 다람쥐는 그 방해를 이겨내고 땅콩 부대들을 빼내어 굶어 죽어가는 공원 동물들을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게 되면 바뀌는 것이 무엇일까요? 땅 속에 보물이 묻혀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 보물을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좀도둑들도 무언가 하나 훔치기 위해 며칠 동안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누가 사는지 사람들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빠져나와야 할지 등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작업을 벌인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원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는 등의 에너지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던 성모님의 모범이 나옵니다. 곧 며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오늘 복음만큼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오시겠다는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믿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한 이 말들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지니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물어보신 위의 질문은 천사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기에 그 방법을 물어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동정을 지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에게만 하느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성모님만이 천사를 처음 만나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적극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콩을 훔치기 위해서도 ‘어떻게’ 훔쳐야 하는지 계획을 세운다면, 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도 ‘어떤 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한 그런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나라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원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예화 중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제자가 스승한테 매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리고는 매일 똑같이 신비스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지요?”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 깊숙이 밀어 넣고서 그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와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다음 날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제,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느님을 숨 막히도록 간절하게 찾는다면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걸세.”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 잠자는 것도 포기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녀가 되어 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교사로 20년을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 없는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고, 두 번째 병원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 여인은 이 수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 수녀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아침 일어날 때부터 밤잠자리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흩트려 놓을 수 없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그 가치를 아니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을 얻으려 하다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 보물을 내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가치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언가를 주려고 하실 때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보십니다. 절실하게 원하면 적극적으로 그 얻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국군이 전쟁에 참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몇몇의 잔여병들만이 숲속으로 도망쳤는데 그 중 ‘부수’ 장군도 그들과 함께 끼어 동굴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참패한 것이 수치스러워 칼을 빼어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굴 어귀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거미는 바람으로 인해 6번을 연거푸 실패합니다. 그러나 7번째에 가서 거미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본 장군은 다시 일어나 싸워서 결국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미는 그 거미줄을 치지 못하면 굶어죽게 됩니다. 이것이 절실함입니다. ‘넛 잡’에서 자신이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많은 동물들이 굶어죽게 된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바로 그 절심함이 설리 다람쥐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도 절실함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꽤나 지났는데도 겨우 주일미사에만 간신히 나오고 있다면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최소한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당신의 보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분을 절실하게 원합니까? 그래야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 어쩌나] 323. 시위에 대하여
| |
문: 작금의 시위 사태에 대하여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나라 시위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부터 법이 있는데 왜 시위를 하느냐는 의견까지 분분합니다. 시위에 대한 이런 여러 가지 견해들을 들으면서 사목자로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답: 저 역시 신부님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명동성당에 시위대가 들어왔을 때 왜 시위대를 받아들였느냐는 사람들과 시위대를 보호해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곤혹스럽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시위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듯합니다. 흔히들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한 국가이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이제는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폭력적인 시위는 근절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수년간 재개발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 수준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은 있지만 그 법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보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의 사회라는 말에 심한 회의감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법이 서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때, 법에 호소해도 씨도 안 먹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가난한 사람들은 시위라는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인데 법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할 때 어쩔 수 없이 시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위 문화입니다.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시작한 시위가 엉뚱하게도 다른 서민들에게 폐를 끼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실제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리고 그 시위가 교통 혼란을 야기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은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입니다. 그래서 시위는 평화 시위여야 하고 다른 서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역사상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은 사람들은 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평화 시위를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선동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대중들이 시위할 때 시위대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끼어들어 옵니다. 그 중에는 특정한 정치적 이유로 들어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시위대를 격하게 만들어서 시위를 폭력적인 분위기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시위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을 가장 바라는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라 시위를 진압하려는 쪽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시위대가 격한 반응을 보이면 언론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을 폭도로 몰고 심지어는 좌파로 몰아붙이면서 시위대의 간절한 소망을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여겨볼 사람이 있습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입니다. 군부에 의해 오랫동안 억압당해오던 사람들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군부를 자극하는 시위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지요. 수치 여사의 당부는 대중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군부의 뒷수를 명확하게 들여다본 노련한 당부였던 것입니다. 수치 여사의 이런 신중한 언행으로 인하여 군부는 어떻게 해볼 여지 없이 수치 여사에게 끌려서 천천히 민주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진압하고 싶어하는 심리는 무엇인가? 사회적 혼란이란 상대적으로 문제 해결이 제대로 안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들은 문제 해결보다 혼란 자체를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 없이 단칼에 정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해결은 사람들을 두 가지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우선 국민들의 정서를 병들게 합니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순종하는 무기력한 사람들과 통제에 저항하려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또한 이런 식의 마무리는 대중을 무식한 무리로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에 단번에 혼란을 정리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리함이 자신들의 무지에서 왔음을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8>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
| ▲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체’와 ‘부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전체’ 안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삽화=문채현 |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권고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전체는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따라서 제한적인 개별 문제들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236항).
단순히 그 말씀의 뜻은 이해되나, 이 원칙을 통해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시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본문을 여러 차례 읽고, 이곳저곳에서 하신 비슷한 말씀을 찾아보고, 교회 전문가들의 해설서를 참고하여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다.
교황은 공동선과 사회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富)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그리고 인권이 온전히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시민의식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했다(221항 참조). 이 모두를 위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원칙 4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네 번째를 다루고 있다.
고유성이 보장되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는 세계화와 지역화의 서로 다른 차원이 함께 완성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때에는 고립된 지역주의를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세계화 속에서 지역화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전체’ 안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는 원칙을 내세워, ‘결정적인 순간’이나 선택적인 상황에서는 ‘부분’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다시 말해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보존한 채, 공동체에 진심으로 통합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235항 참조).
교황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기발한 상징을 이용한다. 우리의 모델은 ‘구체’(球體)가 아니라 ‘다면체’라고 했다(236항). 모든 인종과 문화가 상존하며 공생하는 통합의 사회를 ‘다면체’로 표현했다. 각 부분의 고유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은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통합된 사회 전체 안에서 자신들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각 부분은 그 고유성을 간직합니다. 사목활동과 정치활동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다면체 안에 각각의 가장 좋은 부분을 모으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열망, 그들의 잠재력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비난받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저마다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236항).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처지라도 ‘소수’이고 ‘일부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수’인 어떤 부분이나 어떤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이나 배려도 이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동선을 위한 정책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통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전체를 위하는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를 위한 기쁜 소식
교황은 자신의 마지막 원칙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했다. 복음의 부요함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학자, 노동자, 기업가, 예술가와 모든 사람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잃지 않는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보잘것없는 한 마리 양이라도 구하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닮았다.
“복음은 ‘전체성’이라는 고유한 원칙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될 때까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치유하고 열매 맺을 때까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모일 때까지, 언제나 기쁜 소식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큽니다”(237항).
-홍기선 히지노 신부님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2>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①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것인가!
|
“시민 사회가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환경에 관한 정상회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정상들에게 정치적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166항)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이 땅을 찾으셨을 때,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것을 두고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문제를 삼으려는 분들이 있었다. 참 점잖은 ‘이의 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교종께서도 점잖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대꾸하셨다.
2년 전 교종의 권고 「복음의 기쁨」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이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보인 격렬한 반발에 비하면 교종의 ‘노란 리본’은 사실 ‘사건’도 아니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 ‘레닌주의의 아류’, 혹은 ‘경제의 문외한이 어설프게 쓴 책’ 따위의 비난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신성시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 비난이다. 마침내 회칙이 발표된 바로 그 날 미국 공화당은 아예 대변인을 내세워 발 빠르게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회칙과 교종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표현의 수위는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나름 ‘점잖게’ 교종의 태도와 권고와 회칙을 언급하며, 그 의미를 축소 혹은 왜곡하려 했다.
여기서 정말 궁금함이 생긴다. 왜 교종의 발언과 권고와 회칙을 비난할까? 독자께서 그의 권고와 회칙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그 답을 금세 찾아낼 수 있다. 교종의 행보로 보아 ‘폭압의 권력’을 탐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부의 축적’에 눈이 먼 것 같지도 않다. 그 행보가 ‘사회적 약자’ 편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면 교종이 어느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분명해진다. 그런데다가 교종은 지금의 경제와 금융 체제의 부작용과 미흡함을 문제 삼으며, 제발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주십사고 품위 있게 간청하지 않는다. 대신 교종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그 체제(system) 자체에, 그리고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도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말이다. 지금의 경제 체제,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경제와 정치의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는다.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자멸과 상호파괴의 길로치닫는 인류의 오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라고까지 한다.
회칙은 그 부도덕함과 무모함과 무능함(회칙의 3장)이 불러온 재앙들(1장)은 통합의 생태(4장)와 철저하게 반한다고 밝힌다. 물론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분명히 반한다(2장).
이제 교종은 회칙 제5장에서 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그리고 그 진단과 처방을 찾기 위한 ‘대화’와 ‘행동’ 노선을 제시하려 한다. 제5장은 의미심장한 진단을 내놓으면서 시작한다. “많은 어려움이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습니다”(164항). ‘지난 세기 중반’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를 말한다. 인류는 급속한 변화와 심각한 불균형에 내몰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1965년 12월 8일)은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시작한다. 회칙에서 진단하는 내용으로 말한다면,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부합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라는 불균형일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미국을 한 축으로 하는 서방세계와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세계 사이의 냉전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다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지구 남반부 지역을 식민 지배함으로써 급속히 발전한 선진 국가들과 막 독립한 남반부의 수많은 나라들 사이의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을 더할 수 있다.
맑은 정신으로 보면, 그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못 볼 수가 없다. 교종은 그 부정적 결과들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이 낳았다고 밝힌다. 게다가 “그 해결책들이 단순하게 몇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아리라, 반드시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힌다(164항 참조).
우리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안기고 있는 특정 ‘생활양식과 생산소비 모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구촌 차원의 전망’을 훼방 놓고 ‘자기 나라만의 이해관계’를 지키려는 나라는 어느 나라들일까?
교종은 그동안 환경에 관한 현안에 대해 괄목할 만한 대중적 토론과 시민으로부터의 헌신적이며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긍정한다. 그렇지만 “정치와 기업(경제)의 영역에서는 그 도전의 급박성을 놓고 볼 때, 그 대응방식에 있어서나 시의성에 있어서도 훨씬 뒤쳐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말한다. 정치와 경제가 이제라도 올바른 몫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산업화 이후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165항 참조).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믿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은,
결국 기다리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에 가득하다는 것.
가득하다는 것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