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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사흔(尹士昕) 1422 (세종 4) ~ 1485 (성종 16). 조선 초기의 척신이자 문신. 자는 필보(弼甫). 판중추원사를 지낸 (贈) 영의정 번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 음보로 세자세마가 되었다가 많은 관직을 지낸 후 내자직장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굿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왕위(王位)에 오른 뒤에는 왕후(王后)의 지친이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 을 인정(認定)받아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出仕)하였고, 이어서 정랑(正郞)으로 좌익원종 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계(承系)하면서 중추원사(中樞院事)에 등용(登龍)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면서 판중 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 었으며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職)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 1473(성종 4)년 대사헌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가 다음해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 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죽음에 이르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 참고 문헌 :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 족보 알기 : " 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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