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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개 군단, 토이토부르크 전투서 게르만 반란군에게 패배
서기 15년
이다스타비소 전투에서 게르만 격파…아퀼라 되찾아
역사가 타키투스 단순 영토확장 아닌 참패에 대한 복수 기록
토이토부르크 숲을 지키고 있는 게르만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 |
그리스·로마가 고대 사회를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중세 문장에 크게 기여한 ‘전문장’(前紋障)의 탄생과 확산에 크게
기여 했음은 분명하다. 지금부터는 도시 국가나 거대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나 깃발 위에 새겨진 수 많은 상징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대표적인
문양을 살펴보겠다.
깃발을 숭상했던 로마 군단에서 깃발을 분실하는 일은 물론 특히 적에게 빼앗기는 행위는 죄악시됐다. 이런 행위를 저지른 이들에게 내린
형벌인 ‘데키마티오’(Decimatio)는 10명 가운데 무작위로 한 명을 뽑아 나머지 동료들이 때려죽이는 일종의 연대책임식 처벌이었다. 사실
로마 군단의 역사에서 독수리기인 아퀼라를 빼앗기는(Lost Aquila) 경우는 종종 있었다.
검은 숲, 게르마니아로 진격!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차지한 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라인강 너머에 계륵(鷄肋) 같은 게르마이아(독일)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울창한 ‘검은 숲’은 잘 훈련된 로마군의 발도 묶어버렸다. 게다가 부족한 병력·병참, 게르만의 호전성은
부담이었다. 그러다 보니 게르마니아는 오랜 기간 방치됐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만년이 되자 정복에 야심을 드러냈다. 우선 군단과
병참을 늘렸다. 그리고 마침내 드루수스를 보내 카이사르도 포기한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까지 진군했고 티베리우스를 통해 대부분을 정복했다. 하지만
영토가 넓어지면서 반란이 골칫거리가 됐다. 황제는 믿을만한 티베리우스가 반란 진압에 나서주길 원했다. 결국 그의 빈 자리는 전투경험이 부족한
행정관료 ‘바루스’(Varus)로 대체됐고 이는 로마가 맞이할 재앙의 씨앗이 됐다.
토이토부르크의 악몽
토이토부르크 전투 상황도. |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의 ‘아르미니우스’(Arminius)를 기병대장으로 임명, 반란진압에 성공했다. 큰 공을 세운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의 귀족이 돼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 집정관이었던 바루스는 자질 부족은 물론 비리까지 저지르며 게르만인들의 원성을 샀다. 금의환향한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군대에 복무하면서 반란을 준비했다. 서기 9년 게르만의 대규모 반란 정보를 입수한 바루스는 3개 군단(17·18·19군단)을 투입했다.
로마군 숙영지에서 40㎞ 떨어진 ‘토이토부르크’(Teutoburg)는 말 그대로 사지(死地)였다. 한쪽은 수풀이 울창한 높은 언덕이고 다른 쪽은 늪지였으며 한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전부였다. 2만~3만6000명에 달하는 로마군은 이 좁은 통로를 따라 종대로 이동했다. 당연히 그들의 장기인 밀집전투를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반란군은 로마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따라 1.5㎞ 구간에 이중의 위장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1만2000~3만2000명의 병력을 가진 게르만족은 수에서는 뒤지지 않았지만 무기·장비·훈련 면에서 절대 열세였다. 하지만 지형이 그들의 편이었다. 게르만족은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로마군을 살상지대로 유인하고, 도주로도 차단했다.
전투 결과는 뻔했다. 오솔길을 따라 행군하던 로마군은 어디서 날아오는 지도 모르는 돌과 화살, 창의 공격을 받았다. 앞에는 장애물과
수풀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습지가 있어 기동이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전투대형을 전개해 보지만 공간이 너무 좁았다.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보급은 끊겼으며 퇴로도 없었다.
개활지에서 밀집전투를 하는데 익숙한 로마군이 싸울 방법은 없었다. 간신히 3∼4일을 버텨냈지만 대부분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됐다. 이 전투로 3개 군단은 전멸했다. 최대 2만 명이 죽었으며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백부장 이상의 간부들은 산 채로 나무에 박혀 제물로 바쳐졌다. 바루스도 탈출에 실패하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반면 게르만족의 피해는 기록에도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이후 로마의 병력 공백은 더 심각해져 황제는 결국 그리도 원했던 라인강 너머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오히려 게르만의 침략에 더 노출되는 꼴이 되었으니 황제로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숲에서 로마군을 기습하는 게르만족. |
내 군단을 돌려다오!
"마치 가축을 도살하는 것처럼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황제는 몇 달 동안 미친 사람처럼 기둥에 머리를
박으며 "바루스여,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며 절규했다. 결국 황제는 아퀼라를 잃어버린 채 눈을 감았고 티베리우스가 후사를 이었다. 그는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장군이 선봉에 세워 다시 게르만족에게 창끝을 들이밀었다. 게르마니쿠슨는 종대로 이동하는 경우 보급은 해로로
분리 시키고 정찰 강화와 측방 엄호부대를 운영했다. 또 본대는 셋으로 나눠 단계적으로 이동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예비대를 갖추는 등 이전의 실수를
보완했다. 결국 매복의 효과가 미미해지면서 게르만족은 숲을 버리고 개활지로 나왔고 결국 패배했다. 서기 15년 로마는 이다스타비소에서
아르미니우스를 격파하고, 아퀼라를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군단은 모두 기록에서 사라졌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사건을 ‘그저 단순한 영토확장이나
정복사업이 아니라 토이토부르크에서의 참패에 대한 복수’로 정의했다.
윤동일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 안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