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7년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작은 사진)와 2015년 개봉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속의 레이(데이지 리들리)의 모습. ‘스카이워커의 이야기’가 38년 세월을 두고 ‘레이의 이야기’로 재연되는 ‘차이의 반복’이 이뤄졌다. 이 같은 반복은 새것의 출현,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역사 창조의 조건이 된다.
■ 현대철학의 핵심 화두 ‘반복’
말의 리듬으로 이루어진 詩·후렴 연속돼 완성되는 노래처럼…‘반복’은 삶을 살아가는 근본 방식
새로운 것 나타나기 위한 조건이며 과거 이해하기 위한 조건… 서로 차이나는 것들 사이서 생겨 ‘변신’이기도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파혼한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뒤 얼마간의 충격 속에서 ‘반복’이라는 책을 완성한다. ‘정신적으로’ 돌싱이 된 기쁨을 이 책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다시 나 자신입니다. 이제 나는 반복을 획득하였습니다. … 이래도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갑절로 되찾은 것이 아닐까요?”(임춘갑 역) 돌싱이 된 게 얼마나 신나면 저럴까? 다시 독신이 된 것을 모든 것의 갑절 회복이라고 환호하는 철학서도 드물 것이다. 저 말을 할 때 키르케고르는 반복의 긍정성에 대한 욥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욥이야말로 고통 뒤에 모든 것을 반복해서 갑절로 받은 자다.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주셨다”(‘욥기’, 42:10). 키르케고르의 독신 복귀도 두 배의 기쁨이다.
단지 반복했을 뿐인데 뭔가 대단한 것이 생산되고 있다. 철학자들을 그토록 매료시킨 반복은 삶의 놀라운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반복에 익숙하다. 우리가 삶을 헤아리는 방식, 육십갑자의 회귀인 ‘환갑(還甲)’에서 ‘환’은 당연히 반복을 뜻한다. 나이의 주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도 그렇다. 독일의 시인 횔덜린이 꿈꿨던 것은 유럽 문명의 이상(理想)의 반복, 즉 고대 그리스의 반복을 통한 유럽 문명의 회춘이었다. “피 흘리는 날개는/이제 다 나았고, 희망들도 회춘(verjungen)하여 생동한다”(장영태 역)고 그는 노래한다. 이 구절에서 횔덜린은 유럽 문명의 회춘, ‘젊음의 반복’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래도록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한 전진으로 믿어왔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시간이 새로운 것을 향한 행진이라는 생각을 대표한다. “우리의 시대가 탄생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기를 향한 여명기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정신은 지금까지의 일상세계나 관념 체계에 결별을 고하고 이를 과거의 품속에 묻어버린 채 바야흐로 변혁을 이룩할 찰나에 이르러 있다.”(임석진 역) 과거를 낡은 것으로 묻어버린 채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하는 태도는 서구 근대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과 삶이 일직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반복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반복이 지탱하는 것들은 삶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詩)와 노래가 그렇다. 정보 전달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와 노래는 말의 낭비다. 한 번 말해도 알아들을 간단한 내용을 반복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첼란의 ‘죽음의 푸가’ 같은 작품이 잘 보여주듯 반복 자체가 시의 본질을 이룬다.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말의 반복이 시를 이루는 것이다. 노래는 요약할 수 없고 후렴은 반복해 불러야만 완성된다.
얀 카이에르스가 쓴 베토벤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반복이 음악의 근본을 이룬다는 것을 잘 알려준다. 베토벤이 3번 교향곡을 다듬던 시기의 이야기다. “베토벤은 제시부를 반복하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로브코비츠 궁에서 리허설을 해본 뒤에 반복하지 않으면 교향곡의 맛을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홍은정 역)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을 것이다. 현대 음악에서 두드러진 예를 하나만 더 들자면, 필립 글래스의 오페라 ‘포토그래퍼’나 ‘해변의 아인슈타인’ 역시 전적으로 선율의 반복에 의존하는 작품이다. 다른 맥락에서 영화도 그런데, 가령 루크 스카이워커의 이야기(‘스타워즈’(1977))는 레이의 이야기(‘스타워즈:깨어난 포스’(2015))로 세대를 거치며 반복된다.
단지 예술작품만이 반복을 기둥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우리의 불쾌한 것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성향을 배신하는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겪은 나쁜 일을 잊기보다는 맛난 먹이처럼 되새김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며, 한밤중 이불킥을 하면서 낮의 실수를 계속 반추한다.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적절히 분석했듯 이는 우리에게 침투한 자극을 어떻게 해서든 해소하기 위한 행위다. 어떤 문제 때문에 악몽을 계속 꾼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 문제의 자리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낮에 있었던 자신의 실수를 반추한다면, 그 문제를 자신에게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변명해 실수의 비극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복을 한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어떤 이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 또한 반복의 문제가 아닐까?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이 이에 대해 잘 알려준다. 다보스의 요양원이 배경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매번 식당 문을 예의 없이 소란스럽게 닫고 들어오는 쇼샤 부인에게 처음엔 눈길이 끌리게 되고, 다음엔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는 짓은 밉상인데 왜 하필 이 부인인가?
카스트로프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주인공이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가졌던 히페라는 소년을 닮았다. 주인공은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 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 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나는 것들(히페와 쇼샤) 사이에서’ 생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현대의 중요한 반복의 사상가 들뢰즈는 반복을 ‘차이의 반복’으로 정의했던 것이다. 히페는 쇼샤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서만 반복되고, 히페에 대한 소년의 호감은 쇼사에 대한 이성적 애정으로 둔갑하고서만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잘 보존한 집안의 보물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상속되듯 동일성을 유지한 어떤 것이 되돌아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의 다른 이름은 변신이며, 그런 까닭에 반복이 이뤄짐에도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이렇게 반복을 과거의 어떤 것이 새로운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종교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로이트의 ‘인간 모세와 일신교’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유대교가 문 닫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던가? 아마도 한 인물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근본에 자리 잡은 모세를 반복한다. 파라오의 유아 살해에서 살아남은 모세처럼 예수는 헤롯의 유아 살해로부터 살아남았고, 유대 민족의 구원자를 자처한 모세처럼 예수 역시 구원자를 자처했다. 모세에 대한 사람들의 희구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통해 분출할 수 있었고,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는 반복을 디딤돌 삼아 높이 날아올랐다.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한 반복의 이런 예들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반복으로서 루터, 로마 공화정의 반복으로서 프랑스대혁명.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속에서 과거의 것을 반추하며, 과거의 의미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한다. 이런 이해 방식의 비밀을 잘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문헌 가운데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성염 역)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내가 깨닫는 것은 늦게 이뤄지는 반추 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뤄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 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 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 뒤 그것을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일 역시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만큼이나 반복을 자신 철학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저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반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텐데, 그는 과거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을 반복이라 여겼다. ‘형이상학 입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잘 알려진 것을 그저 똑같은 방법으로 모방해서 단순하게 반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출발이 ‘원천적으로 고유하게’ 다시 시작됨으로써, 따라서 진정한 시작이 지니는 모든 난처함, 어둠, 불확실성과 함께 다시 한 번 출발함으로써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박휘근 역)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반복: 고대부터 사람들은 만물의 운동원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근대에 도달한 세련된 설명 방식이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현대 철학은 헤겔에게 맞서서 새로운 운동원리를 내세우는데 바로 ‘반복’이 그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반복,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부터 시작해 프로이트, 하이데거, 들뢰즈 등이 ‘반복’을 화두로 삼아 풍성한 통찰을 만들어 냈다.
첫댓글 나도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