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개역개정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생각할 때면
물질적 복이 좀 많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런 세속적 마음은 버려야 한다는 마음이 양분하여 싸우는 것을 보게된다.
생(生)을 고(苦)로 해석하는 불교에서는
고생(苦生)을 번뇌의 관점에서 보는 것 같은데
불교가 절대 다수를 이루는 태국에서는
아주 세속화된 사람들과
현지화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태국인들은 화를 잘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몇 년 전 반한 감정으로 인해 한국 여행 보이콧을 했다는 사실은...)
흔히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지역 등의 불교에 의해
소승불교로 디스당하는 상좌부불교(또는 상좌불교)는
대승불교라는 자부심 쩌는 동북아시아 불교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말을 지키는 정통 불교가 본인들이라는 거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 대해 개인의 해탈만 강조하는 이기적 태도라는 멸칭적 의미로 소승불교를 폄하하듯
소승불교라 불리는 상좌불교는 대승불교를 변질된 이단 정도로 생각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가지가지한다 진짜...)
그 상좌부불교 가운데
부산 영도에 있는 태종사라는 절이 있다.
그 가운데 리더격인 인물이 106세(1919년생..)의 생을 마감하고 2025년 3월 입적했다고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스리랑카에서 무슨 상도 받았고
소위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여러 불교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많은 불자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으며
사변적인 불교를 넘어서 실천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철학자인 김형석 장로님 또한 105세의 연세에도
건강을 유지하며, 지금까지도 활동하시고 계신데
부와 명예, 장수까지 누린 이런 삶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일까?
물론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헬라어로는 플레로마티 율로기아스 크리스투(ἐν πληρώματι εὐλογίας Χριστοῦ)
영어로는 the fullness of the blessing of the gospel of Christ(KJV)
뭐가 되었던 간에
남들에 비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연구한다 한들
아니 더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나와 내 삶의 현장에 임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러한 복에 대해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또 다른 고생일 따름이다.
자신의 복을 위해 화를 참아내며,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것에 최적화된
(그래서 한류 드라마나 헐리우드 영화의 분노 장면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태국인들보다 못한 삶이 아닐지..
사변적인 것 말고, 실천적인 삶을 강조했던
불(신)자들에 비해 내가 나은 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자신이 누릴만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로마든 예루살렘이든 서바나(스페인), 또는 어디든지 갔던
사도 바울의 삶은
내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나아갈 것까지를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가을이라는 계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20주년 기념으로 열린 부산 불꽃축제는
20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화려한 시간을 주었지만,
불꽃만큼 화려하면서도 강렬할 정도로 짧은 아름다움도 있을까 싶다.
어쩌면
그 불꽃을 불꽃되게 하는 것은
캄캄한 어둠일지도 모른다.
맑고 밝은 날의 불꽃이 무슨 소용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란
이 어둠 같은 세상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복이며
우리의 생애처럼 짧은 불꽃같이 타오를 때
더 강렬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닐지...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 동안
그 복을 갈망하며
그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살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