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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묵상글 (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 오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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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완고함을 생각하면 꿈쩍도 하지 않음이 즉시 연상됩니다.
물론 아무리 모욕을 주고 공격해도 꿈쩍하지 않음처럼 좋은 뜻의 말이 아닙니다.
나쁜 고집이며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서간 말씀과 연결하면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오늘이 오늘이 아닌 사람에게는 오늘도 어제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되면 오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을 열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됐는데도 오늘에 무관심하고 민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를 고집하는 셈이 되고 화석처럼 과거의 나로 굳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난 연말연시를 저는 동해 바닷가에서 피정하며 보냈습니다.
저는 매일 일출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러 나가지 않고
길 가거나 일하는 사람들 아무도 해 뜨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 몇 가지.
해는 뜨는 것을 보지 이미 떠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해는 보려는 사람이 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는다.
일출을 못 보던 사람이 보려고 하지 늘 보는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튼 정월 초하루 무안 공항 참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황인데도
그래도 일출을 봐야겠다고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실 해는, 새해 첫날의 해나 다른 날의 해나 똑같은 해입니다.
하지만 새해 첫날엔 해맞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해가 되고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해의 첫날만 그렇게 특별히 맞이하지 않고,
매일 특별하게 맞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늘 보는 사람을 처음 본 듯이 보고
새해 첫날 해맞이하듯 보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와 하느님 말씀도 오늘 듣게 되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안 듣고 내일 듣겠다거나 옛날 들은 것을 재탕으로 듣지 않고,
오늘 들으면 그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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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16 06:10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역사는 19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결혼이 목적인 청춘남녀들이 맞선을 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숫자도 늘어났고, 특히 비연예인 출연진으로 현실감을 높인 연애 프로그램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이 왜 끊임없이 인기를 끌까요? 어차피 여기에 나오는 연애란 결국 나의 연애가 아니라, 남의 연애가 아닙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하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를 심리학자들은 ‘감정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연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느끼는 설렘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되니, 이에 시청자도 자연스럽게 설렘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성당에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엄숙해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좋게 말해서 엄숙한 것이지,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의 모습에 처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감정전이가 되지 않아, 전혀 설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자기 자리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거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표정 하나도 전교의 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표정만으로도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후 행동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나병의 치유를 널리 알려야 주님을 더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은 오히려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을 알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 하나에서도 주님을 충분히 전할 수 있으며, 주님과 진심으로 함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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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우리 삶에 따스한 것은 없다(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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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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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모두 치유해 주십니다
저는 한때 허리 디스크로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해 주는 약을 먹기도 하고.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픔을 겪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계속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 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병은 죄의 결과로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였고, 그래서 병자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사회적으로도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이든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음을 말해줍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불결함을 피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육체적 고통에서뿐 아니라 종교적 단죄,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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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재(現在)’라는 말은 영어로 ‘Present’라고 합니다. Present는 ‘선물(膳物)’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선물’입니다. 제가 매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는 겁니다. 하루하루 쌓여서 어느덧 3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30년을 하려고 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루는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서 30년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걷는 겁니다. 맑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습니다. 요즘에는 스마트 폰과 갤럭시 워치에 걷는 발걸음이 표시됩니다. 1달이면 9십만 보가 됩니다. 9십만 보를 작정하고 걸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루하루가 쌓여서 90만 보가 되었습니다. 쇼팽의 ‘왈츠’를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연결이 안 되었고, 많이 틀렸습니다. 매일 연습하니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고, 틀리는 부분도 적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려 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매일 꾸준히 하니 부족하지만, 결실을 보았습니다.
오늘이 과거가 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미래가 되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믿음은 질곡과 같았던 과거를 깨끗한 오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믿음’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하혈하던 여인은 믿음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죽었던 회당장의 딸은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건 가을이면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박해와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세상의 삶이 마쳐지면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여명의 눈동자와 같습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잊어버렸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넜던 놀라운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렸습니다. 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잊어버렸습니다. 광야는 거칠고 황량한 땅입니다. 마실 물도 귀하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나쁜 관습을 버리는 정화의 땅입니다. 광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거룩한 땅입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듯이, 광야를 거쳐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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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나병 환자의 이 말은 훌륭한 기도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훌륭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어떻게 기도 하시겠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작은 목소리로 누가 볼까 두려워서 눈치 보며 기도 하시겠습니까? 마음속으로라도 큰 소리로 하느님을 향해 외치십시오.
오늘 나병 환자는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치유를 얻었습니다. 즉 새로운 인생을 얻은 것입니다. 나병 환자 옆에 있던 다른 환자가 나은 것이 아닙니다. 나병 환자가 나았습니다. 그가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가 나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주님 앞에 모두가 다 환자입니다. 모두가 다 병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 나을 수 없는 욕망과 시기와 죄와 질투를 우리는 무엇으로 낫게 될수 있을까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오늘의 나병 환자처럼 소리 높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낫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그냥 보고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용기를 내 외쳤습니다. 그러고는 그 용기 덕에 주님의 은총으로 더욱 큰소리로 주님을 찬미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조금 더 크게 기도하고 크게 노래하십시오. 마음을 다해 주님을 향해 소리치십시오. 진심으로 외치십시오. 그럼, 우리 안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묵주도 필요하지만….
동기 신부님들과 사우나에 다녀온 날입니다.
뜨거운 탕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함께 등도 밀어주고….
그렇게 땀을 내며 사우나를 마쳤습니다.
개인 보관함에서 옷을 다 입었을 때.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동기 신부님을 발견했습니다.
‘뭐 찾아?’
‘바나나 우유 찾는 데 없네!’
‘나가서 편의점 가자.’
나오자마자 함께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나나 우유를 찾던 친구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묵주보다 물주겠지? 마음대로 골라보셔’라며 편의점 문을 열었습니다.
묵주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물주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나눔! 둘다 필요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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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동료로 삽시다
“우정의 일치”
작금의 시대에 온전한 정신, 온전한 상식으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도저히 화합이나, 융합이 불가능한 양극단의 견해들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 올바른 시대정신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봅니다. 다시 치열한 공부가, 올바른 공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뜨거운 가슴과 더불어 냉철한 머리도 필수입니다. 요즘 계속 떠나지 않는 말마디는 “애덕의 최고 형태는 정치이다”라는 교황님 말씀입니다. 정말 정치가들이 마음 깊이 담아둬야할 말마디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우리보다 제3자의 객관적 견해를 들어봄이 유익하겠습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어제 1월14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가 법원으로부터 받은 적법한 체포영장에 의해 체포된 것이 대해, “우리는 법치주의에 대한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며, 대한민국과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은 전합니다.
몸과 맘은 함께 갑니다. 몸을 잘 보살피는 것이, 몸과 맘을 따뜻이, 부드러이 함이 영적삶의 기초에 속합니다. 요즘 독감 감기가 심각합니다. “과로하지 마라, 체온조절을 잘하라, 찬음식이나 음료를 먹지마라, 코가 아닌 입으로 숨쉬라”는 한의사가 권하는 구체적 처방도 마음에 담습니다. 오늘도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나만의 질문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된다.”<다산>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꾸준하게 지속해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면 세상 또한 인(仁)을 회복한다.”<논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연상됩니다. 나로부터 시작함이 기본이며 미사와 더불어 시작되는 참회의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 옵니다.”라는 자책(自責)이, 상식의 회복이 절실한 시대(時代)요 시점(時點)입니다. 중요한 말마디에는 한자나 영어를 병기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을 묵상하던중 제1독서 히브리서중 다음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고 강론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칭호가 그리스도의 동료입니다. 동료란 말마디를 바꾸어 그리스도의 연인, 그리스도의 협조자, 그리스도의 도반, 그리스도의 벗, 그리스도의 길동무 등 다양한 말마디로 바꿔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니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온전한 삶의 예수님파로 살기 위해, 평생동료이자 평생 도반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평생 주님이자 도반이신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맙게도 그리스도의 동료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마라. 그러나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했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날마다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사는, 때로 양극단의 완고한 굳은 마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처방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우리의 처음 결심을 끝까지 한결같이 굳건히 지키는 일이 필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세 특징을 이어받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화력, 연민, 부드러움”이라는 덕목을 배우는 일이 절실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여기서 나병은 온갖 불치의 피부병은 물론 온갖 병을 통칭합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병마와의 싸움은 필수요 대부분 사람들은 종합병원이 되어 갑니다. 삶의 신비는 죄악의 신비요, 질병들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좌절이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는 것입니다.
바로 질병들과 죄악의 신비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만남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치유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변한 나병환자의 기도와 겸손한 믿음의 결정체같은 고백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스킵쉽, 권능의 말씀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가시고 온전히 치유회복되니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완고한 마음의 치유도 뒤따랐음이 분명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완고함이란 무지의 병입니다. 완고한 마음에 뒤따르는 육신의 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게 되며 이래서 매일미사 은총이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치주의자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초법적인 분이 아닙니다. 사제를 만나 율법에 따른 회복의 절차를 밟은 후, 공동체로의 복귀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감격하여 주님을 자랑하는 복음 선포자로 돌변하니 이는 치유받은 자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자 응답입니다.
겸손하고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즉시 자신의 안식처이자 피신처인 외딴곳에 머물러 자신을 추스립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드니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생명이자 빛이심을 입증합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자 동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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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사람들 밖에서
사람일 수 없으니
사람이기 위해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참사람에게
무릎 꿇고 빌고 빈다네
참사람이시여
하고자 하시면
나를 다시 사람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 밖에서
사람일 수 없지만
다시 사람이고 싶기에
간청하는 사람에게
참사람이 손을 대시며
따뜻하게 말씀하신다네
그대 사람아
내가 하고자 하니
다시 사람이 되게나
하지만 사람아
굳이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다만 사람아
사람에게 가서
사람임을 보여주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게나
허나 다시 사람이 된 사람이
어찌 아무 말 없이 살며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랴
사람들아
나를 보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나도 이렇게 다시 사람입니다
나도 그대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참사람께서 나를 사람이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의 외침이 터지고 터질밖에
사람들 밖에서
사람들 안으로
감격에 겨워 힘차게 달려가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린 뒤에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 밖으로
편안한 제 자리에
머뭇거리지 않고
기꺼이 나와서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게
온 몸과 온 마음 건넨
참사람께서
더 이상 드러나게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 사람들 밖에서 머무신다네
나 이렇게
사람들 밖에 있어도
나로 말미암아 사람이
사람들 안에 있을 수 있으니
이것이 사람 사는 보람이리라
넉넉한 웃음 지으시며
그러니 참으로 사람이시지
나 또한 그리 되고픈
바로 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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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복음사가의 기억
사실을 충실하게 잘 알고 있더라도 사건의 순서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인간 능력에 달린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질 따름입니다. 아마도 복음사가들은 사건을 순서대로 전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순서에 따라 기억에 떠올려 주시는 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행복이 지혜의 입술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아버지의 지혜가 입을 여시면, 모든 천사와 모든 성인과 이제까지 태어났던 모든 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천사와 모든 피조물의 지혜는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 앞에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혜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가난을 짊어진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외적인 가난입니다. 외적인 가난은 선하고 칭찬할 만한 가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가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른 가난, 곧 내적인 가난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내적인 가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315)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빌라 노바 드 우렘의 병원
그녀에게 루치아는 위대한 비밀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마음의 충실한 벗이요 하늘의 귀부인을 생각케 하는 이승에서의 유일한 벗이었다.
올린삐야는 다시 한 번 귀여운 막내동이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아버지를 여윈 루치아도, 어린 히야친따가 넘치는 용기로 마음으로부터 즐겁게 하느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죄인들과 교황님을 위해 고통을 바치고 있는 것을 보고 배우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하느님, 성모님, 죄인들과 교황님을 위해 고통을 받겠다는 염원은 히야친따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였고 그녀에게 붙어 따라 다니는 거룩한 번뇌였다. 진정 그녀는 이것밖에는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병세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알쥬스트렐로 돌아왔다.
히야친따의 왼쪽 가슴에는 누관을 넣어 상처에서 많은 양의 고름을 받아 내게 되어 조금도 쉴 새가 없었다. 날마다 붕대를 갈아 댈 때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건만 조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고 몸서리쳐지는 무서운 고통중에서도 오직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괴로워한 일은 연이어서 찾아오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런 병석에서도 소녀는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계속적으로 물어 대는 질문에 지친 그녀는 정신이 좀 혼란되어 어떤 작은 것을 틀려 버렸다. 루치아의 주의를 받고 히야친따는 그만 눈물을 지였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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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제게 하시고자만 하시면 /
박윤식 [big-llight] 250115 18:54 ㅣNo.179318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정말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감상했을 불후의 명작 ‘벤허(Ben Hur)’의 한 장면이 가끔은 예수님 이야기에서 연상된다. 나병에 걸린 유다 벤허 어머니와 여동생이 환자들과 함께 동굴에서 마치 짐승처럼 모여 사는 처참한 모습이다. 그 모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아들과 오빠를 멀리서 보았지만, 반갑게 포옹도 해 보지 못한 채 눈물 흘리며 숨는 기구한 모습은 차마 잊지 못할 한 장면이다. 결국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으로 나병이 말끔히 치유된 해피엔딩이지만, 나병 환자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슬픈 현장일 게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그토록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자신의 아픔을 보아 달란다. 당시는 누구도 그들과 마주할 수 없었고 율법마저 그들을 외면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온몸으로 다가가는 애절함이다. 이를 어찌 주님께서 외면하실지?
이 간절한 그 마음이 언제나 기적의 전제 조건이다. “스승님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를.” 정말 애틋하고 겸손한 간구이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는 어루만지신다. 그는 감동했고 뜨거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병이 낫지 않아도 좋다. 단지 사람대접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치유의 은총이 스민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신다. “누구와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만 보이고, 깨끗해진 것과 관련해 예물을 바쳐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팔방에서 다들 그분께 모여들었다. 이렇게 악령을 추방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일로 언제나 예수님 주변은 인산인해다.
이처럼 가난하고 악성 질병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든 이유는, 첫째는 예수님께서 마음만 써 주시면 낫지 못할 병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고, 둘째는 공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민초들의 솔직한 처지였으리라. 아무튼 예수님의 이런 치유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병자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공유하는 연민과 측은지심이다.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사랑이라면, 사람에게는 연민이 바로 사랑이리라. 이렇게 다른 이의 아픔과 눈물과 고난의 처지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과 행동을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그 치유의 기적, 그것은 바로 병자를 측은히 여기신 그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일 게다.
그렇게 사랑은 측은한 처지에 있는 이에게 손 내미는 것이리라.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당신 사랑을 발견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가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이니까. 그들에게서 하느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드러날 터이니 말이다. 당연히 죄의 대가로 천벌이라 여겼던 당시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무한의 자비를 베푸셨다.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할 믿는 이다.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나병환자의 그 연민을, 우리가 묵상 속에 늘 새겨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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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합니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겨 사제가 부정한 이로 선언하면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스스로 ‘부정한 이’라 외친 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인간계에서 배제되었던 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경계를 넘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이것이 바로 그를 가엾이 여기시어 어루만지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고쳐 주신 뒤 단단히 이르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1,44).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 환자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서 정결한 이로 선언받고
정결례와 속죄 예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진영 안, 곧 자신의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처지가 워낙 좋지 못하여 당장은 율법을 어기고 넘어온 그를 받아 주셨지만
치유된 다음에는 율법을 통한 회복의 절차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일을 퍼뜨립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구세주를 만난 이, 구원받은 이의 환호성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성가』에 있는 성가곡의 노랫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당신이 누구신지 / 세상에 외치고 싶어 주의 크신 사랑.”
아직까지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까지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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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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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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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 42)
고통을
풀어주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참모습에
눈 뜨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입견을
두지
않으시는
진정한
존중입니다.
참된 존중은
아픔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진정한 삶의
길잡이가
되시어
잃었던 생활의
기쁨을 되찾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주는 분과
받는 분
모두가
하나되는
하느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족은 주님께
우리의 아픔을
내려놓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구원의 모습은
이렇듯이
구체적입니다.
치유를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치유를 위해
가슴으로
자신을 비우고
진정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로
기도로
함께하시는
생활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십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치유의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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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 독서 히브리서를 봉독하고 묵상하던 중 오늘따라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오늘이 그저 그런 하루,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영양가 없는 하루가 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는가에 따라서 오늘이 일생일대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수많은 ‘오늘’을 그냥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금쪽같은 오늘인데, 그 소중한 오늘을 즐기지도 만끽하지도 못하고 소모시켜 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베트남 공산화 이후 공산당 정권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 구엔 반 투안 대주교님은 구속 영장도,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장장 13년 세월 동안 옥고를 치룹니다.
첫해가 지나가면서 대주교님은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지.
마냥 이 음습한 독방에 갇혀있지는 않겠지.
누군가가 반드시 도와주겠지. 조만간 풀려나겠지.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2년,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 중에 대주교님은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어떻게? 그 뒤로 대주교님은 독방을 주교좌 성당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담당한 교도관을 예수님으로 섬겼습니다.
사이공 대교구 주교로서 자신이 담 밖의 교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거룩한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물론 독방에서 혼자서, 양손 바닥 위에 작은 빵조각 하나, 포도주 한 방울을 올려놓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 말씀처럼 오늘이 구원의 날이니, 오늘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하루로 엮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 입에 나오는 말 한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결정 하나 하나가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매 순간이 기적입니다.
살아온 날이 기적이고, 살아갈 날이 기적이며,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고 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어제의 내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징인 새로운 하루 앞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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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치유되었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셨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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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기도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기도의 목적과 방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우리는 나의 기도가 잘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곧 창조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본래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진 죽은 모습입니다. 이 원형이 본래의 창조 모형인 그리스도처럼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원형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결과를 낳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분심이 안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힘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이 기도의 원형입니다. 변화는 힘이 듭니다.
영화 ‘리얼 스틸’(2011)은 공상과학 영화지만, 쓸모없어서 버려진 주인공 로봇이 어떻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톰은 버려지고 잊혀진 로봇으로, 쓰레기장에서 묻혀 있던 한때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맥스가 아톰을 발견하면서, 아톰의 회복과 더불어 원래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는 오늘 복음(마르코 1,40-45)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영성의 단계로 말하자면, 이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첫 단계인 ‘구송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톰은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단지 외부 명령에 반응할 뿐입니다. 이는 구송 기도에서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말을 내뱉으며 시작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맥스는 아톰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톰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듯, 끊임없이 주목을 요구합니다. 맥스는 마지못해 아톰을 경기장에 데려가고, 아톰은 경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합니다. 이는 소개의 단계입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첫 목소리입니다.
아톰이 수리되고 훈련되면서, 그 성장 과정은 다음 단계인 ‘듣기’로 전환됩니다. 이제 아톰은 단순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넘어, 맥스와 찰리의 의도를 해석하며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아톰의 행동은 점점 더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주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는 영성에서 묵상 기도에 해당하는 단계로, 영혼이 말을 한 후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해가 깊어지고, 아톰이 조종자의 지시를 듣고 동작을 세밀히 조정하듯, 영혼도 신적 인도를 들으며 자신을 정제해 갑니다.
아톰의 변모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바로 챔피언 ‘제우스’와의 대결에서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톰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만 의존하지 않고, 맥스와 찰리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아톰은 마치 찰리의 복싱 기술을 거울처럼 따라하며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톰은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하며, 이는 영혼이 관상 기도를 통해 단어와 행동을 초월하여 하느님과 일치되는 단계와 유사합니다. ‘보기’ 혹은 관상의 단계는 침묵 속에서 주님의 본질을 흡수하고 이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톰의 성장은 단지 더 나은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뒤 깨끗하게 되어 회복된 나병환자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구송, 묵상, 관상의 각 단계는 이러한 회복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봉헌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먼저 구송기도, 혹은 소리기도를 통해 나를 드러냅니다. 숨어있어도 되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냥 혼자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그만큼 문둥병에서 나아질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그다음은 묵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들어야 합니다. 내 정신까지도 그분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더 문둥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은 관상 기도인데,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이제 나를 완전히 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완벽히 봉헌하는 이 기도는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자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내가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잘 알아서 힘들다고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힘들지 않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더 힘든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모습으로 변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효과는 기도가 끝난 이후에 확실히 나타납니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힘이 활동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또 고통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조금 더 나병에서 치유되며 온전한 창조된 원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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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1) 여기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단단히 이르셨다.’ 라는 말은, 지금 이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몸의 치유’만을 바라고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그 병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병이 치유된 일은 그 병자 자신에게도, 가족과 친지들과 친구들에게도 분명히 좋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자기 생각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무시했거나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엄하게 명령하셨는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해가 안 되어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만을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3) 그 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셔야만 했습니다.
그 병자가 무슨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예수님의 일을 크게 방해한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십자가의 길을 말렸던 베드로 사도의 행동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베드로 사도를 아주 엄하게 꾸짖으셨는데(마태 16,23), 만일에 그 병자를 다시 만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그 병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 기뻐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일은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고 ‘단단히’ 이르신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만 따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뒤에,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심정으로는 그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기들이 듣고 본 일들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납득하지도 못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5) 예수님께서는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어떤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경우는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인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방인 지역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충실하게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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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40-45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줄 사람은 생각치도 않는데 바라는 쪽에서 일이 다 된 것처럼 미리부터 기대하는 모습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지요.
이런 상황이 가장 자주 벌어지는 때가 아마 ‘기도’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주님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청하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질 때, 장소, 조건까지 미리 다 정해놓고 주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이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꼭 그렇게 해주셔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엄포를 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주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주님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니 내 바람을 들어주시는건 전혀 어렵지 않을테고, 그러니 ‘당연히’ 들어주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술 방망이’도 아니고, ‘램프의 요정’도 아니며, ‘자판기’도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과 의지로 세상과 사람들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을게 아니라 먼저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분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전능하심’이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당신이 뜻하시는대로 이루시는 능력, 당신의 ‘의지’를 곧 ‘현실’로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지하여 기도를 하려면 그분의 ‘뜻’과 ‘의지’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예수님께 청하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즉 자신이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뜻과 의지가 있는지를 물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의 ‘바람’은 주님의 ‘뜻’에 맞닿아 있었고, 그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나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서 그런건지,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자 자기도 모르는 새 ‘영적 교만’에 빠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립니다. 물론 나쁜 의도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그게 예수님께도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결과 그분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내가 바라는 것을 청하기 전에, 나의 바람이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 딴에는 그게 옳다고,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청하는 것이라도 그것을 주님의 뜻보다 앞세우면 오히려 나를 위해 준비하신 그분의 계획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겸손과 순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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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의 아픔을 방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6&id=2109627&Page=1&menu=4770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체험. 박영희 [corenelia] 2025-01-16 ㅣNo.179345
1945년 4월, 유럽 전선에서 복무하던 나는 우울증으로 ‘경련성 횡행결장’에 걸렸다.
당시 보병 94단 소속이던 나는 전쟁 중에 발생한 사상자, 실종자에 대한 기록을 작성하고 사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전사들의 유품을 정리해 친족들에게 발송하는 일도 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 지쳐 있던 나는 혹시 실수를 하면 어쩌나,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이제 열여섯달이 된 아들을 안을 수는 있을지, 끊임없이 걱정했다.
내 체중은 15킬로그램이나 줄었고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독일군의 대반격이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군의관의 충고로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테드, 인생을 모래시계라고 생각해 보게. 수천 수만 개의 모래알도 가운데의 좁은 통로를 지나야만 빠져나올 수 있다네. 한 번에 한 알 이상은 빠져나오지 못해.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수많은 일이 있지만,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하나씩 해결해 가면 되네. 그렇지 않으면 몸과 정신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
이날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 번에 한 알씩, 한 번에 한 가지씩.’
나는 비로소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를 추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인쇄 회사의 광고 홍보부에서 일하는 지금까지도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덕분에 과거처럼 혼란스러워하지 않고도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 ‘카네기 경전’ 중에서 -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5)
묵은 삶의 문드러진 방식을 버리지 못해 아픔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네 삶입니다. 참된 반성이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무언지를 아는 것에서 비롯될 때 우리 현실의 모든 난관에 그리스도 중심으로 직면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아픔을 방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관계 치유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기쁨이 되게 합니다.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님을 주님 사랑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님 현존 안에서 참된 믿음의 선택을 하는 매 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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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의 나”
가끔씩 교우분들 중에 ‘신부님과 가깝다는 분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이들 뿐이네요.’라고
놀립니다. 그러면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러신데요.’
본당에 있을 때나 교구청에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저를 놀립니다.
‘신부님은 아무개의 애인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멋쩍은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주님을 닮으려나봐요.’
본당에 있을 때 소위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은 주임 신부가 미사를 할 때만
참여합니다. 그 사람은 공소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항상
빨간 옷을 즐겨 입고 입술에는 왜 그렇게 짙은 빨강색을 칠하는지...
그런데 그분이 한번은 보좌신부가 봉헌하는 미사에 왔다가 성체를 모시는 것을
거부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너무 무안했는지, ‘나 집에 가서 떡해 먹을꺼야!’
라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젊은 신부에게 ‘그래도 먼 공소에서 왔으니 그냥 성체를 모시게
하면 안될까?’ 상의했다가 되레 이론도 원칙도 없는 신부가 되고 말았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 후에 ‘빨간 아가씨’는 본당신부가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본당신부 차례의 미사를
기다리고 있다가 성체를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 시골의 한 본당의 노총각이 교구청에 틈만 나면 찾아 왔습니다.
교구청 식구들은 그가 나타나면, ‘신부님 애인’하며 안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식구들마저, 심지어는 그곳 본당신부도 골치아파하는 그야말로
‘미친’이라는 범주에 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부끄러운 듯 사무실에 와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신부 앞에서 밀렸던
이야기를 하다가 바쁜가 싶은 눈치면 얼른 일어나 ‘다음에 또 올께요.’말을 남기고
약속이나 한듯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바뀐 주소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주소를 적지 않았지만 금새 그 노총각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감히 주님과 비교할 수도 없지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소외된 이들의 진정한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혐오스럽고 냄새나는 나병 환자가 무릎을 끓고 애원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외면하거 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얼마나 고맙고 정다운 말씀입니까!“
히브리 서간 저자는 시편 95,8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히브 3,7-8)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므리바와 마싸에서 하느님께 대들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의
사건을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회상하며 다시 희브리 서간 저자가 교우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은 늘 함께 합니다. 그런데 어제에 매이고 또 내일로 미루기 때문에
해야할 복음의 과제가 현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러한 나 자신을 깨닫게 해 주고 오늘 내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주님처럼 오늘 내가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자칫 잘못 하면 또 미루거나 지나치는 또 어제나 내일의 내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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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원초적 생명을 깨우는 연민
멀쩡했던 한 사람이 당시 가장 불행한 일의 하나로 여겨졌던 나병에 걸립니다. 그는 불결한 사람으로 여겨져 사회에서 격리되고, 죄인 취급을 받아 신앙공동체에도 낄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산송장 취급을 받았습니다(민수 12,12).
나병환자는 말할 수 없는 소외감과 좌절 속에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보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겸허하게 예수님께 나아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깨끗하게 해주십니다(1,41).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다른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스스로 '불결하다'고 외쳐야 하는 나환자에게 손을 내밀게 합니다. 나병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진다고들 여겼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괘념치 않고 그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손을 내밀어 하느님의 사랑과 원초적인 생명을 깨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치유 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1,44). 그 치유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드러내는 표징이자 메시아 시대의 은혜인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나환자는 존재의 뿌리를 뒤엎는 기막힌 선물을 받고 참을 수 없어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1,45). 예수님의 연민은 소외와 단절, 멸시와 차별을 받아온 그 안의 생명을 다시 꿈틀거리게 했습니다. 그분이 주신 자유와 기쁨의 선물은 그를 춤추게 했고,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배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도 연민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나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물이 되고, 기쁨을 주며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연민을 지니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내 존재가 정말 가족과 이웃,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을 신명나게 하고 살아갈 이유를 다시 발견하는 희망을 불어넣으며, 불신과 소외와 고통으로 식어버린 심장을 데워주는 사랑의 난로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희망을 되찾아 기뻐할 수 있도록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느님의 연민과 좋음을 전하고 나눌 수 있어야겠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그렇게 할 때 나환자처럼 다른 이들도 그 가슴 뛰는 선물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나 재물,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연민을 품은 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 때문에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웃과 세상을 제3자의 시각에서 대상화하여 바라보지 않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상과 이웃의 심장 속으로 들어갈 때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나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고쳐주셨던 예수님처럼 오직 그 사람을 향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며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연민의 마음으로 기쁨과 삶의 의미와 희망을 불어넣는 주님의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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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식별에 대한 지침'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1)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청합니다. 당시 관습 안에서 그는 함부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였지요. 그런데도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가까이 온 건, 예수님 안에도 자기가 깨끗해지길 바라시는 마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춤주춤 당신께 다가오는 그를 보자마자 예수님 마음에서 연민의 사랑이 솟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부정하고 불결하다고 낙인 찍힌 그를 피하기는커녕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사람보다 문자를 우선시하던 완고한 금기가 자비 앞에서 맥없이 무너집니다. 그의 두려움과 갈망을 아시는 예수님은 주저없이 그가 바라는 대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마르 1,43)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진 그에게 단 하나를 명하십니다. 그것도 "단단히" 이르시지요. 방금 전 환자를 위로하고 어루만지신 걸 보면 그분이 마냥 선하고 부드러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을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치유된 이는 분명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말씀을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도 했을 테구요. 그런데 그간 겪은 지독한 고통의 상처가 사라졌음을 사제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나 봅니다. "단단히" 이르시는 내용을 겸손이나 공치사 정도로 간과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섣불리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권력과 건강과 재물을 보장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목숨을 바쳐 인류의 죄를 속량할 메시아이심이 드러날 때까지 답답하더라도 기적을 입은 이들과 제자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이스라엘에 분노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시험, 반항, 떠보며 시험, 마음이 빗나간자들, 밎지 않는 악한 마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연하게 수용하고 순종하는 마음, 곧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고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히브 3,14) "그리스도의 동료!" 참으로 영광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제자이고 벗이며 형제인 우리는 그분의 연민, 자비, 사랑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제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라는 '예수 성심 호칭 기도' 안의 한 대목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그저 분별 없이 착하게 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의 결심을 굳건히 지님"
우리는 복음 속에서 치유된 이에게 예수님이 보이셨던 단호함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 못지않게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하고 착한 연민과 자비의 마음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유야무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미숙함과는 다르니까요.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고집하는 완고함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제대로 식별해야 하지요. 필요한 순간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선택하고 따르는 식별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감히 "그리스도의 동료"라 불리우는 우리에게는 '연민의 사랑'과 '굳건한 따름의 의지'가 동시에 중요할 것입니다. 은총을 그득 받고도 자칫 주님의 뜻과 그분 말씀이 이 세상에서 퍼져나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 균형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식별하고 실천에 옮기는 영적 여정을 더 성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 정신 안에서, 예수님처럼 그때그때 연민의 사랑이 시키는 대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니까요. 완고히 고착되어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모든 상황을 케이스로 만들어 대응할 수 없지요. "그리스도의 동료"로서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자유로이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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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6.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
<2025.1.16>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0:16~28절)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
❚ 믿음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당당함을 가져야 합니다.
✔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직면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16~19절).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막게다 굴에 숨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16~17절).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숨는다 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동굴 입구를 커다란 바위로 막고, 동굴을 지키게 합니다. 그리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계속 공격해서 적들이 자기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남은 적들이 자신의 성읍으로 돌아갈 경우, 후에 다시 세력을 형성해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다...”(19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울러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싸움은 승리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피해서 은밀한 곳으로 도망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고,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라 할지라도 주께 드러나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대로 우리의 판단에 따라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는 일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 후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공동체가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며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전 12:14)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직면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당당해야 합니다(20~24절).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거의 모든 적을 소탕하고서 막게다 진영으로 돌아왔고, 이스라엘에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20~21절). 여호수아는 막게다 굴에서 가나안의 다섯 왕들을 끌어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모든 백성들에게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스라엘 지휘관들에게 가나안 왕들의 목을 발로 밟도록 하였습니다(22~24절). 이러한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승리한 나라가 패배한 나라에 힘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행한 관습이었습니다. 또한 패배한 적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호수아는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신시키고 전투 의지를 더욱 고취 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거룩함으로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온전히 담당하게 될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조건에 근거한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신감을 갖고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신감은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행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세상적인 수단으로 삶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살아가는 우리는 잠시 악의 세력 눌려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내가 이기었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장차 대적들을 발로 밟고 일어서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인 승리를 확신함으로 영적 자신감을 얻고 세상에서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원히 우리와 함께함을 확신해야 합니다(25~28절).
여호수아는 다섯 왕들의 목을 밟는 지휘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며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모리 왕들을 발로 밟아 완전히 제압했듯이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25절).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다섯 왕을 죽였고, 그들의 시체를 저녁 때까지 다섯 그루의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26절). 이는 그 왕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을 상징합니다(신 21:22~23). 여호수아는 해가 지자 다섯 왕들의 시신은 끌어내려 그들이 숨어 있던 동굴에 던져 넣고 동굴 입구를 큰 바위들로 막아 놓았습니다(27절). 기브온을 돕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대적했던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뉘우치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약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받고 회복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앞으로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여 승리의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적 자신감과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수 10:16~2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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