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명 가나다순으로연재합니다.
강경애-어머니와 딸
-구분 : 장편 소설
-저자 : 강경애
-출판사 : 혜성
-출판일 : 1931. 5. ~ 1932. 4.
-작품해설 :
소설가 강경애(姜敬愛)의 첫 장편소설로서 <<혜성(彗星)>>(1931. 5-1932. 4)에 연재되었다. 식민지시대 여성의 삶의 비극성을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통해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여성문제를 시대 상황과 세대 감각에 맞춰 조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소설의 여주인공 주옥은 봉준의 정이 없음을 번민하고 있다. 주옥의 어머니 엡분은 지주 이춘식에게 팔려서 주옥을 낳았다. 같은 마을에 살던 둘재는 엡분을 열렬히 사랑했다. 엡분이 이춘식 집에서 쫓겨난 날, 둘재는 그 집에서 사람을 죽이고 붙들려 간다. 엡분은 여러 남자의 품을 거친 끝에 술장사를 했다. 주막 옆집에 살던 옛날의 기생 산호주는 어렵게 자라나는 주옥의 품성에 반해 친딸같이 키운다. 주옥 역시 친어머니보다 더 따르게 되어, 자연스레 그 아들 봉준과 맺어졌던 것이다.
봉준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여름 방학이 되자 집으로 온다. 주옥은 남편 봉준이 돌아왔으나, 그가 서울에서 숙희라는 여성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서 불안해한다. 봉준은 다락방에서 늘 따로 자고 갈 때도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주옥은 자신도 학교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후 서울의 학교에 편입 시험을 치르고 봉준과는 별도로 하숙을 하게 된다. 봉준은 시험에 합격한 주옥을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봉준의 친구인 재일은 주옥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래서 그는 주옥과 봉준이 이혼하기를 바라게 되고 여동생인 숙희와 봉준이 맺어주려고 한다. 재일은 주옥에게 접근하여 시계와 반지를 선물하지만, 주옥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편 봉준은 숙희를 만나 구애하지만, 매몰찬 대답만 듣고 실망해 돌아와 앓아눕는다.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게 되자 열성으로 간호하던 주옥은 숙희를 찾아가 한번만 와 달라고 사정하지만, 숙희는 거절한다. 주옥은 여전히 숙희만 찾고 있는 봉준에게 미련을 거둔다. 봉준은 주옥에게 왜 마음이 변했느냐 하면서 시골에 있는 영철 선생을 불러올린다. 주옥의 헤어진다는 말에 영철 선생은 주옥을 꾸짖으며 시골로 내려가자고 한다. 주옥은 한 두 사람 때문에 시어머니의 참뜻을 어그러뜨릴까 거절하고는 일어서려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어머니와 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
◈ 어머니와 딸(1) _강경애
[1] 번민
부엌 뒷대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옥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니 부었다.
그는 사면으로 기웃기웃하여 호미를 찾아들고 울바자 뒤로 돌아가며 기적거린 후 박, 호박, 강냉이 씨를 심는다. 그리고 가볍게 밟는다.
눈동이 따끈따끈하자 콧잔등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누구인지 옆구리를 톡톡 친다. 휘끈 돌아보니 복술이가 꼬리를 치면 그에게로 달려든다. 까만 눈을 껌벅이면서……
옥은 호미를 던지고,
"복술이 왔니!"
복술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멍하니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 띄는 이끼 돋은 바위틈에는 파래진 이름 모를 풀포기가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돌아가며 봄맞이 아이들의 손에 다 꺾인 나뭇가지에는 노랑꽃, 빨강 꽃이 송이송이 피었다.
나비 한 마리가 펄펄 날아든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높았다 낮아지는 나비를 따라 시선은 달음질쳤다. 눈 깜빡일 사이에 나비는 벌써 산비탈을 넘어 까뭇거린다.
그의 눈은 스스로 감겨지며 볼 위로 눈물 흔적이 보인다.
"무엇 하셔요."
사립문 밖에서 건넛집 애기 어머니가 자루 같은 젖을 흔들며 발발 기어 달아나는 애기를 잡아 안고 일어선다. 옥은 빙긋 웃으며,
"호박씨 심으러 나왔어요."
그는 손톱 사이에 낀 흙을 파내고 보니 애기 어머니는 어디로 가버리었다. 그는 방문턱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다볼 때 저켠 산너머로 작은 새소리가 그의 가슴을 한두 번 두드리고 잠잠하여진다. 순간에 떠오른 것은 엊저녁에 받은 남편의 편지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그가 그렇다니…… 인골(人骨)을 쓰고야 차마…… 그렇게…… 하는 수야 있나! 어머님의 말씀이 오죽이나 잘 알으시고 하신 말씀이랴!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
몇 번인지 되뇌이고 난 그는 눈물이 그득해졌다.
‘어머니, 나는 이 일을 어찌 해야 좋아요?’
향하여 정면 위에 걸린 약간 미소를 띤 남편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어나는 그의 과거. 시어머니 생전에 자기와 남편이 천진스럽게 놀던 꼴, 그리고 시어머님이 임종시까지도
"봉준을 잘 길러라. 둘이서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 옥아!"
어린 옥은 곤한 잠에 들기 전까지는 입 속으로 외우건마는…… 사정없이 잡아뗀 남편의 지독한 편지. 이것이 자기의 정성이 부족함일까, 혹은 남편이 철없는 탓일까를 탓하기 전에 먼저 돌아가신 시어머니에게 대하여는 죄스러웠다. 어쨌든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그의 시어머니는 옥에게 무슨 말이든지 부탁할 때에는 두 손을 꼭 잡고 들여다보며,
"옥아, 너는 내 딸이지, 내 말 잘 듣지?"
이렇게 묻고 나서야 뒷말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옥은 펄썩 주저앉는다. 방바닥은 산뜻한 맛이 있다. 뒤를 이어 보름달 같이 선연히 떠오르는 시어머니의 그 눈, 코, 입모습, 부지런하기로 댈 데 없는 그의 손발,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다.
책상 앞으로 다가앉아 그는 책을 펼쳐들었다 놓았다. 연필을 쥐고 무엇을 쓰다가 박박 뜯어 두 손으로 꼬깃꼬깃하여 뒷문 밖으로 내쳤다.
말쑥하니 치워놓은 책상 위를 다시 들어내어 먼지를 떤다.
이렇게 뒤질 때 남편이 어려서 읽던 뚜껑 없는 책 몇 권이 나왔다. 책장 떨어진 것, 연필로 죽죽 내려 그은 것, 먹점이 뚝뚝 박힌 것들이다. 따라 남편의 두둑한 손이 보였다. 언제나 흙장난하는 탓으로 손거스러미는 항상 일고 있었다.
어린 남편은 학교서 돌아오면 문턱에서 책보를 방안으로 팽개치고 선길로 나가는 것이었다. 옥은 뒤로 따라서며,
"어디 가?"
그는 휘끈 돌아보고 두말없이 나가고, 혹간,
"저기."
하고는 도망질치는 것이었다.
옥은 저녁을 퍼놓고 기다리다 못해 사립문까지 나와서 머리를 배움하고 가고 오는 사람들을 남몰래 살펴보았다.
아득아득할 때 남편은 사립문으로 뛰어들자,
"오마이!"
냅다 치고는 팍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요리조리 궁리하던 옥은 이 소리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며 시어머님이 죽게 보고 싶었다. 자기네들을 남기고 먼저 간 시어머님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나 꾹 참고 남편을 껴안고 방으로 들어가며,
"왜 그래!"
남편은 한층 더 느껴 울며 옥의 무릎 위에 탁 실린다.
"누가 때려?"
"장손이가 여기를 때리지……"
볼을 가리켰다. 옥은 바투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며,
"정 나쁜 놈들! 울지 말라오 후일 내 보면 대신 때려주고 욕해줄게. 어서 밥 먹자오, 응?"
이렇게 말하여 겨우 울음을 그치게 한 그는 상 옆에 마주 앉아 밥을 물에 말아주고 반찬에 가시를 뽑아가며 불룩이는 그의 두 볼을 바라볼때 대견한 끝에 두 줄기 눈물이 앞을 캄캄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거를 돌아볼 때 그나마 옛날이 다시 오지 못할 행복한 날이었음에 그의 가슴은 뻐근하여졌다. 따라서 어머니를 잃은 자기네들의 외로운 신세가 눈앞에 선하니 보인다.
그의 볼은 능금빛으로 타오르고 골치가 들썩들썩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는 횃대에 걸린 수건으로 힘껏 머리를 동인 후 책상 위에 푹 엎드렸다가 벌떡 일어나 아래윗목으로 왔다갔다하며 자기의 장래를 어림하여 보았다.
남편은 언제나 자기를 버리고 어떤 말쑥한 여학생과 함께 살 때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쩔까?’ 이혼을 해주어야 옳을까? 이대로 견뎌 배겨야 할까?’ 그는 한참이나 바람벽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꼭 다물고, ‘망설이는 것부터도 벌써 어머니의 유언을 잊은 나다! 견디자! 어머님의 둘도 없는 아들이 아니냐? 그러고 나의 남편인 것이다!’
이렇게 부르짖으며 책상서랍을 열었다.
그는 봉투 속으로부터 편지를 꺼내어 몇 번이든지 되읽어 본 후 그의 가슴에 꼭 갖다 대었다. 그리고 조심성스러이 남편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밖에서 신발소리가 났다. 그는 손 재게 편지를 서랍 속에 밀어 넣고 얼른 일어났다.
앞문이 열리자 영철 선생이 들어선다.
"어디 아픈가!"
옥은 그제야 머리에 동인 수건을 슬그머니 벗어서 뒤로 감추며,
"아뇨, 언제 오셨나요?"
"지금 오는 길일세.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며 묻는다.
"아니야요."
"그새 동경서 편지 왔겠지?"
"네, 어제 왔습니다."
"음, 잘 있다던가?"
"네."
"다른 말 없어?"
옥은 머리를 숙였다. 갑자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왜? 무어랬던가?"
"저…… 아니요."
그의 입은 굳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흰 목덜미에 새파란 힘줄이 불끈 일어나는 것이었다. 선생은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의 속을 어림하여 보았을 때 가엾음보다도 감복됨이 앞서는 것이었다.
"공부에 재미 많지, 어디 얼마나 배웠나 보세."
선생은 이렇게 화제를 돌려서 그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려 하였다. 그는 책보를 당겨서 풀어놓았다. 선생은 다가앉아 그의 가리키는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그새 많이 배웠지."
선생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열심으로 공부나 하고 모든 괴로움은 하느님께 바치게나. 세상사람 치고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아나. 원체 괴로운 세상이니까. 먼저 깨닫고 달게 받아야 하네."
옥은 잠잠하여 고름 끈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공부시키러 가서 자네 어머님 뵈었지."
"네? 어머님!"
"요새는 영업도 그만두시고 무던한 영감님 얻으셔서 평안히 계시는 모양이야. 장차로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시데. 어머님 위하여 많은 기도 올리게."
"한 번 오시겠다는 말씀 없어요?"
"오시겠다대."
시계는 네 시를 땅땅 친다. 선생은 시계를 바라보며 모자를 들고 일어섰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으로 공부하게. 그러고 자조자조 기도해. 내일 예배당에 꼭 가지?"
하고 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옥은 발부리를 굽어보며,
"네."
선생은 댓돌로 내려서며 저편 구석에 석유초롱이 반만큼 눈에 띄었다.
"무엇 떨어진 것 없나?"
"아뇨."
선생은 햇빛을 안고 집 모퉁이로 돌아갔다.
옥은 앞이 허전해지며 머리를 갈래갈래 풀어헤친 어머님의 환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친정어머니에게 대한 인상이란 남자들의 무릎과 무릎 사이로 옮아 다니며 갖은 아양을 다 피우다가도 그들의 발길에 툭툭 채여 질질 울고 다니는 꼴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생각키운 어머니 ── 그의 과거를 짐작해볼 때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기 아버지란 사나이가 어딘지 모르게 그리우면서도 안타깝게 미워졌다 ── 어머니의 타락된 원인이 아버지의 소위(所爲)인 것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자 맨땅에 펄썩 주저앉으며,
"어머니! 당신도 깨끗한 처녀였겠지요. 아부지를 만나기 전에는…… 아 얼마나 쓰림을 당하시다 못해서 곱고 고운 어머니의 그 깨끗한 마음이 흐리어졌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어머님의 쓰라렸던 가슴을 알겠습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울지 않았습니까! 오 그 쓰림은 나에게도 왔습니다! 왔습니다."
그는 일어났다. 해는 산밭을 타서 뉘엿뉘엿 넘어가고 멀리 들리는 버들피리 소리는 차츰차츰 가늘어진다.
[2] 추억
지루하나마 옥의 친정어머니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옥의 어머니는 송화읍에서 은율목으로 빠지는 막바지에 사는 김창문의 맏딸이었다.
아버지의 부지런한 탓으로 조밥이나마 배불리 먹고 갈나무라도 미루어 가면서 뜨뜻이 땠다.
금년 열일곱에 난 창문의 딸은 동네의 자랑거리였다. 바느질 잘하고 얌전하다는 것, 더구나 우선우선 웃는 듯한 그의 얼굴은 동네의 인기를 끌고도 지나친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를 대할 때에는 ‘예쁜이’ 이렇게 불러서 그의 이름은 예쁜이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침만 되면 그의 부모들은 네 살 된 세인이를 맡기고 들로 나간다. 예쁜이는 집에 남아 있어 물 길어 밥 짓기, 진흙투성이 된 옷 빨고 바늘질하기였다.
그의 동무들은 김매기를 뽑혀 다니었건만 그는 텃밭을 매는 외에 벌김이라고는 매어 보지 못하였다. 그만큼 그의 부모들이 그를 아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때 그는 세인을 데리고 물을 길러 갔다. 앞으로 뿔뿔 달아나는 세인이를 보고,
"아가, 세인아"
하고 불렀다. 세인은 말똥말똥 누이를 쳐다보며 달아난다.
"놀며 가자우, 넘어져, 응."
몇 걸음 천천히 걷던 세인은 금시로 달음질쳤다. 예쁜이는 따라가서 붙잡고 흘겨보며,
"넘어진대도?"
세인은 몸을 빼치려고 어깨를 흔들며,
"고기고기나!"
조그만 손을 쏙 내밀었다.
"무엇?"
손길을 통하여 바라다보니 샛노란 망망꽃이 풀포기에 숨어 반만큼 배움하고 있다.
"꺾어 주랴?"
"응."
그는 가만가만히 풀숲을 헤치고 꺾어다 주었다. 세인의 얼굴은 한층 더 둥그래 보였다.
파란 풀포기에 숨어 흐르는 흰 물줄기는 쭉 둘러싼 차돌 틈으로 졸졸 흐르고 있었다.
예쁜이는 그의 그림자를 물속에 던지며 바가지를 들여 밀었다. 퐁, 소리가 나자 눈달치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이에 물을 채우고 나서 예쁜이는 한 모금 마신 후 돌아보며,
"물 안 먹어?"
바가지를 들어 뵈었다. 세인은 그에게로 다가서며,
"감구감구"
한다. 휘끈 돌아보다가 번개같이 웬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다. 그는 머리를 폭 숙이고 얼른 동이를 이었다.
"어서 가!"
겨우 한 마디를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세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편 사나이로부터,
"아기 싱아 줄까?"
세인이는 예쁜에게로 칵 달려매며 망망꽃을 공중에 내던지고 울멍울멍하였다. 옥의 두 귀밑은 빨개지며 세인의 손을 홱 잡아 뿌리치고 잦은걸음으로 달아났다. 세인은
"으아"
소리를 치고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이 꼴을 본 사나이는 이편으로 달려와서 그의 손에 싱아를 들려주었다.
"애기 울지 마라."
세인이는 싱아를 집어내치고 예쁜이를 따라 허방지방 따라오다가 팍 고꾸라졌다. 사나이는 뒤로 와서 그를 부동켜 안고 예쁜네 집 사립문까지 왔다.
"아가, 잘 들어가라. 또 넘어지지 말고, 응?"
세인이는 눈물을 좌우로 씻으며 봉당 대문 사이로 갸웃이 내다보고는 쑥 들어가 버렸다. 사나이는 돌아서서 머리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부엌에 숨었던 예쁜이는 세인이를 꽉 쓸어안고 문 사이로 사나이의 뒷맵시를 보았다.
커다란 사나이가 산비탈을 넘어서자 힐끗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세인이는 밖에만 갔다 오면 싱앗단이나 과자봉지를 들고 달려 들어오며,
"이거 봐, 사탕이야 씨, 너 안 줘."
하고 빙빙 돌아가며 과자봉지를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예쁜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웬 거냐? 누가 사주디?"
세인은 밖을 흘끔흘끔 돌아보며,
"감구, 감구가 사줘."
예쁜이는 문밖을 바라보며 어디 숨어서 엿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전신이 오싹해지며 눈앞에 전날 본 사나이의 그 눈매가 무섭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가는 소리로,
"세인아, 얻어먹으면 거렁뱅이 되어서 못 쓴다. 후댐에 또 사주거든 우리 집엔 사탕 많아요 하고 받지 말아라 응? 그러면 내가 아부지더러 하얀 돈 많이 달라고 해서 사탕 이만큼 사주마 응?"
그는 손을 벌려 뵈었다. 세인이는 들은 체도 안 하고 사탕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세인이를 꼭 잡고 들여다보며,
"아가, 남한테 사탕 받아먹으면 곱다저고리 해서 너 안 줘."
그는 사탕을 입에 넣고 예쁜이를 쳐다보았다.
"후일에 감구가 사주면 받아 가지고 올 테냐? 후일에는 안 그렇게 하지? 응, 대답해."
세인이는 두리번두리번하며 덮어놓고,
"응"
하였다. 예쁜이는 세인이를 꼭 껴안으며
"우리 세인이 용치, 정말 용해.
볼과 볼을 마주댈 때 달콤한 냄새가 구미를 스르르 돌리게 하였다.
예쁜의 집 문앞을 감도는 그 사나이는 송화읍서 한 등너머 사는 최용문의 일꾼으로 있는 둘째였다.
그가 예쁜이를 먼빛으로 보기는 벌써 여러 번이었으나 이렇게 마주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부터는 일하다 중턱에도 나뭇짐이나 걸머지고 뻔질나게 읍으로 오는 수가 잦았다. 그리하여 지고 온 나뭇짐을 되는대로 팔아버리고 예쁜네 집 주위를 몇 바퀴든지 돌아서 세인이라도 만나보고 나오면 한결 마음이 나았다.
둘째는 어젯밤 비에 와짝 달라진 조밭머리에 앉아 호미를 움직였다. 침묵 속에 몇 이랑을 매고 난 그는 긴 한숨을 후, 쉰 끝에 김내기를 내쳤다. 굽이쳐 올라가는 멜로디는 스러져가는 듯 꺼져가는 듯 삼아삼아하였다. 곁에 동무는,
"좋다!"
제 엉덩이를 툭툭 치고 벙글벙글 웃었다. 소리가 끝나자,
"웬일인가? 자네도 소리 할 줄 알아?"
두리번두리번 쳐다보았다. 그는 픽 웃어 보이고 잠잠하였다.
"한 마디 또 하게."
밭머리에서는 왁자지껄하였다.
"어서 들어들 가세."
이편을 향하여 한 사람이 고함친다. 곁에 동무는 일어섰다.
"가세."
"먼저 가게나."
동무는 꾸역꾸역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둘째는 매던 이랑을 마치고 나서 밭머리로 나왔다. 이밭 저밭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그는 사람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귀찮아서 맨 꽁무니에 떨어져서 산비탈 지름길에 들어섰다.
딱 막아선 다방솔포기 옆에 붙어 앉아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읍등새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는 잦은 발소리가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그는 무심코 힐끗 돌아보니 새하얀 손수건으로 귀밑까지 폭 눌러쓴 색시가 노란 바구니를 옆에 끼고 이편을 향하여 오다가 인기척 있음을 알고 피하여 가만가만 저편으로 가는 것이었다.
둘째의 눈은 차차로 둥그래지며 멀어가는 색시의 뒷맵시를 살피는 순간 ‘예쁜이다!’이렇게 속으로 부르짖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가슴은 점점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최후의 용기를 내어 색시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열 눈이 자기 한 몸으로만 쏠린 듯하여 뒷잔등이 오싹오싹해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었다.
이 눈치를 챈 색시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재게 걸었다. 뒤에 발소리가 가까워짐을 알자 그는 바구니까지 내치고 달아난다. 일삼아 다듬어가며 뜯어 넣은 풋나물은 길가에 좍 헤지고 바구니는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둘째는 구르는 바구니를 붙잡고 헤어진 나물을 주섬주섬 주웠다.
솔밭 속으로 지나치는 색시는 뒤를 돌아보자 수건이 공중 벗겨지며 삼단 같은 머리채가 어깨 위로 미끄러져 빨간 댕기가 나풀거렸다.
둘째는 색시의 눈과 마주치자 머리를 푹 숙일 때.
"아이고 어마이!"
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둘째는 겨우 머리를 들어 폭 숙인 그의 얼굴을 옆으로 자세히 보니 틀림없는 예쁜이다. 그리던 예쁜이를 꿈 밖에도,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만났으나 무엇이라고 말할는지 감감하였다.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 새로 그윽한 송진 냄새와 함께 새 속잎에 짙은 뭇냄새가 그들의 코를 스칠 뿐이었다.
둘째는 예쁜이가 숨도 크게 못 내쉬고 바들바들 떠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만 갈까 하고 발길을 돌렸으나 깍 붙고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로서도 생각지 못한 어떠한 큰 힘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가는 바람만 불어와도 사람인 듯, 이상한 소나무라도 눈에 띄면 사람이 숨었는가? 이리하여 전 신경이 긴장되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그들을 굽어보며 깍깍하였다.
그는 얼결에 바구니를 예쁜이 앞으로 놓았다.
"예쁜아! 너 집에 가고 싶지?"
떨리는 소리다. 힘을 들여 해놓고 보니 그의 생각한 바가 아니고 딴청을 끌어내었다. ‘한 마디만 물어보고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이렇게 속으로 궁리하면서도 역시 같은 말을 뇌이는 데서 지나지 않았다.
"예쁜아, 어서 가라."
누가 이런 말을 시켜주는지 안타까웠다. 둘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옆으로 비켜섰다.
예쁜이는 죽나 보다 하고 두 눈을 꼭 감고 엎드렸다가 ‘가라’는 둘째의 말이 그의 귀에 어렴풋이 들리자 공포와 의문이 그의 전신을 억눌렀다. 그는 한층 더 떨었다.
이 꼴을 본 둘째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서 노송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그제야 예쁜이는 겨우 일어나 바구니를 들고 달음질을 쳤다.
"예쁜아, 나를 잊지 마라!"
그의 전신은 화끈함을 느끼자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소나무를 칵 쓸어안고,
"예쁜아, 예쁜아!"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바라다보니 한길가 나뭇가지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그의 댕기꼬리는 햇빛을 받아 피같이 붉어 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순희네 벼 마당질을 마치고 오늘부터는 예쁜네 차례였다. 창살이 푸릇푸릇하자 예쁜 아버지는 부시럭부시럭 일어났다.
"여보게, 일어나 밥 하게."
그는 아내를 깨우고 밖으로 나갔다.
예쁜 어머니는 예쁜이를 깨워 가지고 부엌으로 나와 등에 불을 켜놓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며 한편으로 햇팥을 일어 안쳤다.
예쁜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무럭무럭 일어나는 불을 들여다볼 때 두 무릎이 따끈따끈해지며 졸음이 포로로 왔다.
눈이 감길수록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선히 들려왔다. 어머니는 쌀을 안치며,
"불 때려마!"
깜짝 놀라 깬 예쁜이는 나무를 끌어다 넣고 벼 태질 소리에 머리가 뒤숭숭하여졌다.
어느덧 밥이 우구구 끓어오르자 예쁜이는 불을 멈추고 일어나서 소매를 척척 걷고 설거지를 하며 한편으로 상을 놓았다.
어머니는 등에 불을 훅 끄고 널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차츰차츰 새어오는 회색빛 하늘에는 별들이 까뭇거렸다.
어머니는 예쁜이가 주는 주걱을 받아들고 그릇을 포개 담은 양푼을 부뚜막 위에 놓은 후 솥깨를 열었다. 무역무역 올라오는 훈훈한 김이 그의 볼을 스치고 올라간다.
"진지들 잡수시오."
뒤이어 예쁜 아버지는,
"밥들 먹고 하지."
그들은 우중우중 사립문으로 들어서 방안으로 들어앉았다.
"상 들여라."
방 문턱에 비껴서서 딸이 가져오는 상을 받아 차례로 그들 앞에 갖다 놓았다.
예쁜이는 통통 걸음을 쳐서 잔심부름을 다하고 숭늉까지 퍼들인 후 뒷대문 옆에 가만히 붙어 서서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분간하여 들으며 읍등새 좌우로 총총 들어선 솔밭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눈결에라도 이 솔밭이 띄게 되면 지난 일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무섭고도 어딘가 모르게 귀염성스러운 둘째의 얼굴은 항상 솔밭 속에 숨어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컴컴하던 솔밭도 새어온다. 옆으로 돌아가며 간 당추밭에는 빨간 당추고추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수수 하는 바람결에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놀라 굽어보니 밤 한 알이 앞으로 굴러왔다. 깜빡 잊었음을 느끼고 그는 치마 앞을 벌리고 울 바자 밑에 서 있는 밤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주먹 같은 밤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보암직스러웠다.
밤알을 다 줍고 난 그는 치마 앞을 연해 들여다보며 밤나무를 쳐다보았다. 예쁜이는 가을철이 들자 눈만 뜨면 밤나무 아래로 달려가서 살펴보다가 밤아람이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옹골차고 그중 큰 알로 따로 골라서 어머니도 세인이도 모르게 뚜란독 속에 깊이깊이 간직해 두었다가 마가을에 가는 어머님께 부탁하여 팔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지고 싶던 것을 사서 가지곤 했다.
그는 가만가만히 허청간으로 달려가서 방석을 열고 독 속으로부터 커다란 시승 배아지를 꺼내자 치마 앞에 밤을 골라 옮겨 놓고 보니 배아지 전과 비슷하였다. 그는 쫑깃 웃고 배아지를 독 속에 넣은 후 허튼 짚으로 덮고 부엌으로 나왔다.
방안에서는 담뱃대 터는 소리가 나자 웃음소리가 왁 쓸어 나왔다. 뒤미처,
"상 받아라."
그들은 밖으로 밀려나갔다. 예쁜이는 짐짓 섰다가 어머니가 주는 상을 받아 부엌으로 날랐다.
어머니는 세인에게 젖을 빨리며 밥을 먹었다. 세인은 예쁜이에게로 손을 내밀며,
"나, 밤."
예쁜이는 부엌으로 나가서 밤 담은 종다래끼를 갖다 세인의 앞에 놓았다. 그는 종다래끼를 잔뜩 껴 앉고 갸웃갸웃 들여다보며 어머니의 떠 넣어 주는 밥을 먹었다. 세인의 보기 좋게 볼록이는 두 볼에는 오목오목 우물이 잡히었다.
밖에서는 벼알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저녁때가 되어 말 되는 소리가 들렸다. 예쁜이는 밥을 잦혀놓고 밥상을 보아 놓은 후 사립문 뒤에 붙어 서서 졸이는 가슴으로 엿보았다.
아버지는 그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 수를 세고 있었다.
옆으로 농장지기, 낯설은 양복쟁이, 돈 장사하는 김만수, 그밖에 마당질한 일꾼들이 쭉 둘러섰다. 벌써 엿 섬째 묶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은 호기심이 빛났다.
"열한 섬 반!"
여러 사람 입에서 똑같이 굴러 떨어졌다. 만수는 데리고 온 일꾼에게 눈짓하여 닷 섬을 구루마 위에 탕탕 실어 놓았다.
예쁜이 아버지는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자 구루마는 털털 구르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처신이도 볏섬을 구루마 위에 실어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굴러갔다.
예쁜 아버지는 벼씌움을 한 먼지머리를 뒤집어쓴 채 짚북데기를 손에 들고 금방 울듯 울듯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멀리 들리는 구루마 바퀴소리는 마치 그들의 가슴 한복판을 굴러가는 듯 요란스럽게 울리는 것이었다.
예쁜이네 모녀는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일꾼들은 벌써 가버리고 담뱃내만 자욱한 방에 예쁜이 아버지는 시름없이 째한 앞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밖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진지들 잡수셨나요?"
"어, 그 누구이?"
예쁜이는 윗방으로 올라갔다.
"처신이오."
그는 의외라는 듯 벌컥 일어나며,
"무엇이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처신은 방안으로 들어앉았다. 예쁜이 어머니는 등불을 헤어 놓았다.
"아뇨, 오늘 퍽 섭섭하셨겠지요."
이 말에 그는 너무 황공하여 눈물까지 글썽글썽해졌다.
"오늘 나와 같이 오셨던 어룬이 바로 우리 농장 주인이십니다."
"뭐?"
예쁜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에는 늘 대리로 보내시더니 올해는 친히 오셨습니다."
한층을 낮추어서,
"마침 참한 소실을 구하신다는 말을 하기에 내가 집에 따님 이야기를 하였더니 영감님께 말씀해보라고 하시기에 왔습니다."
예쁜 아버지는 너무나 생각 밖인 까닭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이 칵 막히었다. 영감이 잠잠함에 예쁜 어머니는 답답하여,
"그런 어룬이 우리 딸 같은 것을 어떻게…….."
이제야 예쁜 아버지도,
"글쎄, 그런 돈 많으신 어룬이……"
"원 별 말씀도 다 하십니다. 전에 세월 같으면야 어림이나 있습니까마는 요새 세월은 그렇지 않다오. 그런 걱정은 말으시고 얼른 작정하시오."
부부는 잠잠하였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담 처신의 말이 미덥지 않았다. 한참 후에 영감은,
"글쎄, 원…… 그럴 리가……"
처신이는 눈을 슴벅슴벅하며,
"어서 작정하시오. 이런 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런 부자를 사위로 맞이하는 판인데 설마한들 영감님네를 굶으라 하겠수?
부부의 머리는 지끈해지며 나오려던 말이 한층 더 막혔다.
처신이는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어찌 하겠수…… 좀 좋소? 딸은 호사여 치여 죽을 지경이겠구려. 동자도 바누질도 안 하고 오도카니 앉어 손톱에 물만 튕기구 앉았겠구려. 수 생겼소"
영감은 예쁜 어머니를 보았다.
"어쩔까?"
"글쎄요…… 어찌했던 한 번 가셔서 손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봅시다. 갑자기 되니 내니 알겠소."
처신은 벌컥 일어났다.
"가십시다."
영감은 왜자자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뭐 그러고 가시럅니까?"
"그럼"
아래를 굽어보았다. 처신은 문밖으로 나가며,
"원, 어서 가십시다. 농사꾼이 아모려면 상관 있습니까."
영감은 두말없이 뒤를 따랐다.
예쁜 어머니는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질수록 아까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였다. 어느덧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나이 많은 자기 남편이 여름내 그 달디단 잠도 못 자고 밤새워 가며 봇등의 물을 논에 대느라고 애쓰던 것이 아까웠다. 벼이삭이 보암직스러이 패어올때 영감의 좋아하던 꼴, 그는 폭 엎드려서 흑흑 느껴 울었다. 한참 울고 나니 이번에는 예쁜이 일, 아까 본 그 양복쟁이가 새삼스럽게 뚜렷해 보였다.
"참이라면 어쩔까?"
이렇게 부르짖으며 웃방을 향하여,
"예쁜아!"
몇 번이나 불렀으나 잠잠하였다. 그도 세인의 옆에 입은 채로 누워서 하던 생각을 되풀이하였다.
밤이 적이 깊어서 남편은 돌아왔다. 곁에 펄썩 주저앉자 술내가 훅 끼쳤다.
"무어랍디까?"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비틀걸음으로 윗방 문을 열었다.
"예쁜아!"
텁텁한 소리였다. 뒤로 따라 선 예쁜 어머니는,
"자요, 자요. 할 말 있으면 내일 하구려."
"응, 취한다. 내 딸 자니?"
눈을 지리쳐 감고 예쁜 어머니께로 탁 실린다.
"우리는 살았네. 내 딸 때문이지. 에이! 고얀놈! 이놈아! 만수란 놈아! 날도적놈아!"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떤다. 그는 겨우 남편을 끌어다 옷을 벗기고 자리 위에 뉘었다. 눕자마자 코를 골아 넘긴다.
그는 한층 더 눈이 똑똑해졌다. 고요한 방안에 숨소리만이 가득하고 이때마다 들리느니 가을벌레 울음이다. 훅 불을 끄고 나니 뒷문에 달이 비쳤다.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하여 딸의 혼인은 이미 결정된 듯싶었다. 무엇보다도 섭섭한 것은 소실이라는 것이었다. 자기의 귀한 딸을 남의 눈에 가시로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못할 짓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남편 곁에 누워 어느덧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남편에게 흔들리어 깨어난 그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혼인은 다 되었네."
"뭐야요. 좀 생각해보고 하지."
"공연한 소리를 또 하네그려. 그런 자리가 쉽겠나. 그러고 며칠 있다가는 가겠다니까 예쁜이를 따라 보내야 하겠네."
예쁜 어머니는 기가 막혔다. 이어서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렸다.
"이 사람은 쩍 하면 울기는…… 그럼 시집도 안 주고 끼고 있을 텐가?"
마누라는 돌아 누우며 세인이를 꼭 껴안았다.
훤히 밝자 예쁜이는 일어났다. 가만히 샛문을 열자 그의 어머니는.
"왜 벌써 일어나니? 곤할 텐데."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부엌으로 나가서 앞뒤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산뜻한 바람이 그의 정신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는 우두커니 차츰 새어오는 하늘을 쳐다볼 때 컴컴한 솔밭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제 새벽만 하여도 무섭던 솔밭이 이 순간에 있어서는 눈물이 날 만치 정들어 보였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긴 한숨을 내쉬고 저적저적 밤나무 아래로 가보았다. 어제보다도 더 많이 떨어졌다. 그는 맥없이 치마 앞을 벌려 한 알씩 두 알씩 줍기 시작할 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밤을 채 줍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방문 소리가 나자 어머니가 나왔다.
"아부지가 너 들어오란다."
그의 가슴은 지끈하였다. 예쁜이는 머리를 푹 숙이고 나무 꼬챙이로 부엌 바닥만 이리저리 긋고 있었다. 이 꼴을 본 그의 어머니도 저 애가 벌써 다 들었구나 하였다.
"어서 들어가라, 왜 그리고 있니, 아모러면……"
발이 떨어지기도 전에 훌쩍훌쩍 울음이 터졌다.
방안에서는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다.
"예쁜아, 들어오너라."
어머니의 딸의 우는 양을 보니 가슴이 뻐근해지며 ‘저런 것이 어찌 남의 첩노릇을 할까, 아무것도 모르고 아비 어미밖에는 모르는 저것이……’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예쁜 아버지도 부엌으로 나왔다.
"내, 내 딸 왜 우니, 너무 좋아서? 허허허……"
그는 너털웃음을 내치고,
"어서 들어가자. 밥을랑 네 어미더라 하라자, 응."
그는 예쁜의 곁으로 바싹 대들었다.
"그만둬요. 저도 다 들은 모양인데."
"어디서 들었어?"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영감을 밀치며,
"그만둬요. 새벽부터 말 안 하기로서니 틈이 없을까."
그는 하는 수 없이 중얼중얼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야! 울지 말라구, 누구나 한 번씩은 겪는 일인데 무얼. 내가 열네 살에 너의 아부지한테 왔겠니."
예쁜이는 가만히 일어서서 뒤 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밤나무 옆에 착 가리어 앉아 치마폭으로 얼굴을 폭 가리고 흑흑 느껴 울었다.
조반을 퍼놓은 예쁜 어머니는 뒤 안으로 나와서 밤나무 옆으로 왔다.
"들어가서 밥 먹자. 야, 말 들어, 속 태이지 말고"
예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내 딸 왜 그래! 공연히 그리누나. 이제 서울 가면 좋은 구경하고 좀 좋으냐?“
예쁜 어머니는
"그만둬요. 자꼬만 우는 애를 가지고 여러 말 하시우…… 괜히 밥도 못 먹게스리."
어머니의 들려주는 숟갈을 들고 밥을 퍼먹으려니 기가 꽉 찼다. 며칠만 있으면 아버지의 말대로 가야 하니 그러면 다시는 어머니 아버지 세인이도 못 보겠지. 이런 생각에 슬그머니 숟갈을 놓고 윗방으로 올라갔다. 그의 어머니도 따라 밥술을 놓고 말았다.
<계속>
첫댓글 댓글로 문학인의 향기를 남겨 주세요
좋은 자료 주심에 댓글로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