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2
9월16일[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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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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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eYPueiQCdY
[서울대교구 이승화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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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신앙인이 아님에도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이웃을 보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뵐 때마다 밀려오는 큰 부끄러움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반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부담이요 민폐로 각인된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듣고, 규칙적인 성사 생활과 기도 안에 살아가는 저희 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뒷골이 당겨옵니다. 이걸 지금 받아야 해, 말아야 해, 망설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백인대장은 정통 신앙을 자랑하는 유다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 언어와 믿음은 얼마나 탁월한 것이었던지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들도 받지 못하던 칭찬을 그가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든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치유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백인 대장의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예수님을 감탄하게 만든 것이 있었는데, 백인대장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위해 걸어가고 계실 때, 그는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백인대장이 얼마나 말을 예쁘게 하는지?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태도까지 겸비했으니, 극찬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백인 대장은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완벽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 죽어가는 자신의 노예를 반드시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닌 분임을 확신한 강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세례받은 세월이 길다 해서 절대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옷이 결코 예수님의 칭찬을 불러오는 표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이 나를 위한 것보다는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청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의 건설 같은 큰 것이어야겠습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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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Co_jE94r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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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 살길은 최대한 많이 베푸는 일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주고 자기 하인을 위해 그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치유를 청합니다. 그가 종교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신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새라면,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라는 몸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위로 오르려는 의지가 있을수록 믿음과 희망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뜻도 됩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왕비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이들은 남편 루트비히를 설득하여 그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관료들과 함께 그녀가 옷에 무언가 숨기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로트비히는 국고를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벳에게 옷에 무엇을 숨기고 나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옷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한겨울이었음에도 장미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기적을 부르고 기적은 그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하루는 문둥병자를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궁궐을 병으로 물들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루트비히는 또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뒤져야 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간병하는 침대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도 이제 가난한 이들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둘은 남의 눈치 안 보고 병원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사랑에 대한 의지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달립니다. 알렉시스 카렐은 혈관을 꿰매는 기술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저명한 의사입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통에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2년, 카렐 박사의 친구인 한 의사가 리옹에서 루르드로 가는 기차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돕도록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우정과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없어서 기차에 탑승합니다.
그는 기차에서 급성 결핵성 복막염과 큰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상당한 복부 팽창을 앓고 있는
마리 바이를 만납니다. 마리 바이는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카렐은 루르드에 도착한 후, 아니면 그 전에 그녀가 매우 빨리 죽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차에 탄 다른 의사들도 이 진단에 동의했습니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마리는 동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 개의 물병이 그녀의 팽창한 복부에 쏟아졌습니다. 첫 번째 부은 후, 그녀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부은 후,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은 후, 그녀는 기분 좋은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배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캐럴은 마리(다른 의사들과 함께) 뒤에 서서, 그녀의 복부에 물이 부어지는 동안 메모를 적었습니다.
“엄청나게 팽창하고 딱딱한 복부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30분 이내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몸에서 분비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토하지 않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음 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상쾌한 기분으로 리옹에 도착했습니다.
캐럴은 여전히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4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와 의사의 모니터링을 요청했습니다. 병이 나은 후 마리는 자선 자매회에 입회하여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약 35년을 더 살아 193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카렐 박사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임에도 종교와 과학이 상반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말해 의학과 과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작은 봉사의 마음에서 다시 불붙여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시다. 믿음과 희망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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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8년 5월에 저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복학하기 전까지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중, 고등학생 반을 맡아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2월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학생 중의 한 명은 취직이 되었고, 첫 월급을 타는 날 제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5시에 ‘대학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천마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생각난 저는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었고, 다방 문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기에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다방 문을 열었습니다. 다방 한구석에 저를 기다리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학생에게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4년 뒤에 저는 그 친구가 근무하던 자동차 대리점에서 승용차를 샀습니다. 저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주었던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값싼 믿음과 진정한 믿음입니다. 값싼 믿음은 하느님과 거래하려는 믿음입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기를 원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성공과 권력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신앙이 본래 지닌 깊이와 진지함을 잃어버린 형태의 믿음이 값싼 믿음입니다. 이는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회개나 변화 없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죄의 진정한 회개 없이 쉽게 용서받으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희생 없이 은혜만을 바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배반한 유다의 믿음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주어지는 상황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될 상황까지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약혼한 요셉에게 파혼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3번이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예수님의 얼굴에는 피와 땀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외롭게 죽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삶을 변화시키는 깊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픈 종을 보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미 이런 모습만으로도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든 이들에게서 오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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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10: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 주실 수 있는 병이다.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주고 계시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게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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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16장까지 있는 마르코 복음서의 8장, 곧 한가운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시작한 이 책에서, 진도를 절반쯤 나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분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겠지요.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부터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겠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툽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상상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전하는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에게 구원되라고 하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수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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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루카 7,2-3)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저는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의사들은 여러 가지 약을 사용하거나 의술을 사용해서 병을 치료하지만,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에게 “병자에게서 떠나라.”라고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떠나라고 명령하시면,‘병’이 그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입니다.
2) 뒤의 8장에,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물결을 고요하게 만드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루카 8,24-25)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만 보면,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앞에 있고, 제자들의 질문이 뒤에 있지만,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들의 순서가 꼭 시간적인 순서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들과 표징들을 체험하면서 줄곧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그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찾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3)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이 백인대장이 처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것은 그 백인대장이 최초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어떻게 해서 그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과정을 모릅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말씀과 체험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신앙에 다가갔고,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신앙에 완전히 도달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리고 요한 사도는 그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4)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자기가 믿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학이나 신학 지식 같은 없어도 상관없는데, 최소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 부활하신 다음에는 우리 안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분,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들은 결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목숨과 인생을 모두 바쳐서 완성해야 할 ‘나의 삶’이고, ‘나의 신앙’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여기서, 나에게(우리에게) 여러 가지 경로로 말씀하시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주의 깊게 듣고 계십니다. “늘 나만 바라보시는 분, 늘 나를 걱정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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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유다인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백인대장이 이방인이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 만한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종을 살려 달라고 하는 백인대장의 인품도 훌륭해 보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한낱 종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매우 강했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이방인이므로 예수님을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정말 그의 믿음은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믿음은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십니다. 이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은 오늘도 전례 중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기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상급을 받을 공로’와 ‘은총을 받을 자격’에 대해 알려 줍니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가 당연히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격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 자격의 척도는 믿음입니다.
하늘의 상급을 받을 공로는 우리가 이웃에게 베푼 선행으로 파악됩니다. 우리가 실천한 애덕은 하늘의 천사들이 기억하고 하늘의 보물 창고에 잘 보관해 둡니다. 우리가 받을 상급은 믿음 안에서 얻은 은총으로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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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예진광 이레네오 신부님]
<백인대장>
“나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몽당연필에 불과합니다. 그 분이 쓰시고, 생각하시고, 그 분이 결정하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이 말은 누가 하였을까요?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어머니였던 마더 데레사입니다.
평생을 헌신하신 수녀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이겨나갔습니다. 겸손하신 수녀님은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학자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의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은 말 그대로 백사람을 부하로 두고 있는 대장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속국의 치안과 통치를 위해서 이스라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냅니다. 자신이 아끼는 하인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살려주십사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인대장의 간절한 청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집에 예수님께서 거의 당도하시기 전에 사람들을 보내어 자신의 말을 전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잘 알고 있는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 아니 ‘만나 뵐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그의 겸손함이 배어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인대장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방문하지 않으시고도 그의 종을 낫게 해 주십니다. 겸손과 신뢰. 겸손과 신뢰는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성체를 모시기 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미사 중에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청한 백인대장처럼 간청합니다. 지존하신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기에는 너무나도 우리자신이 부당하다고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병든 이를 낫게 하시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우리 영혼의 병이 나으리라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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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명현 미카엘 신부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
성경에 예수님이 감탄했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는 오직 백인대장의 사화에만 등장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백인대장은 로마의 장교였지만 자신의 노예를 아꼈으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유다인을 착취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는 좋은 이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거나 제자로 선택된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님에 대한 풍문을 듣고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스스로 주님을 집에 모실 자격도 없고,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했고, 진정한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라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했습니다.
우린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기 전 백인대장이 고백했던 내용을 반복합니다. 곧 사제가 거양성체를 하며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 안에 백인대장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이웃 사랑의 실천, 겸손과 의탁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면서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백인대장의 사랑과 믿음, 겸손과 의탁의 자세를 우리 삶에서도 가꾸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고 감탄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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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7,7)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살아가는 게 인생살이지만, 내가 만난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삶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그렇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문득 다가온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헨리 W 롱펠로우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는 시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항상 푸른 잎새로 살아가는 사람을 오늘 만나고 싶다. (...) 언제 보아도 언제 바람으로 스쳐 만나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나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인 백인대장과 백인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유다 원로들, 물론 이들의 진솔한 말을 듣고 먼 길 마다하지 않으시고 죽어가고 있는 백인대장의 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한걸음에 달려가시는 예수님, 이 모든 분은 참으로 아름다운 분들이시며, 오늘 우리가 이분들을 만남으로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우리 또한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나요.
물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종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자기 종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더욱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정말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런 백인대장의 평소 삶과 그의 진심을 알고 있는 원로들 역시 거절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와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7,4.5)라는 말씀을 듣고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은 채 예수님 또한 기꺼이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회당을 지어 준 것도 잘한 일이지만 이방인인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한다, 는 그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기 종을 아끼고 염려하는 그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훌륭한 성품을 겸비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을 보내어 그들 편에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7,7)라고 청합니다. 이방인 백인대장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하는 마음과 겸손한 말마디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또한 그 진정성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진심 어린 말과 전혀 느껴보지 못한 당신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더 나아가서,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7,8)라는 말에 그의 인품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함과 진정성을 예수님은 알아보십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감탄하시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7,9) 하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찬사는 정말 당신에게도 이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많은 위로와 힘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는 곧 세상을 살면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게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하고 예수님께서 그의 겸손하고 확고한 믿음을 인정해 주셨기에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 백인대장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7,6.7)라는 표현은 미사 전례 안의 영성체를 모시기 전의 기도문에 삽입되어 지속되어오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라는 기도문으로 백인대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백인대장처럼 마음이 아름다운 예수님의 마음에 머물면서 우리도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고 고백하는 하루가 됩시다.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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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 자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세 자녀의 육아 대부분을 그녀 혼자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리, 청소, 빨래, 아이들 숙제 도와주기, 아이들 등하교 운전 등 모조리 자기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남편은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고, 요리나 청소도 해주던데 자기 남편은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자매의 불만은 정당할까요?
그런데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졌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계속 누워있으며 투병하는 남편을 통해, 이 자매는 불공평한 역할 분담을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기 전까지 잔업을 많이 하면서 넉넉한 수입을 가져다준 남편이었습니다. 또 고장난 집 안 수리는 늘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나서, 수입이 끊기고 청구서가 쌓여만 갔습니다. 여기에 고장난 가전제품에 막막해 하면서 남편이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힘든지, 또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해야 할 몫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른 남편은 안 그런데, 다른 아내는 안 그런데….’라며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친구, 내 자녀, 내 부모…. 이 모두가 자기의 큰 몫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고마움을 갖지 않으면 불평의 크기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몫을 대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만이 감사의 삶, 기쁨의 삶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자기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살려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려고 하자, 친구들을 보내어서 이렇게 아룁니다.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몫을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백인대장의 뜻대로 노예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행복의 크기를 잽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굳이 그 크기를 재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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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 하나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 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불만 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 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에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 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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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루카 7,1-10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보여주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말씀드릴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들어주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모실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다가가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마주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마주하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함께할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함께하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차마
품을 수조차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기꺼이
안기시는
당신처럼
나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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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든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백인대장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종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 뿐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백인대장’에게서 배웁니다.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리고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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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루카 7,7)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머리 위에 계시되 누르지 않으시는 분,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소유하시되 속박하지 않으시는 분,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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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엇이 주님을 감동시켜 치유케 하는가?>
-겸손한 믿음-
겸손한 믿음이 지혜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입니다. 겸손한 믿음 또한 은총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켜 치유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청하고 싶은 은총이 겸손한 믿음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겸손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좋은 것을 배울 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 허물을 고칠 때는 우레처럼 과감하게 하라.”<다산>
이런 이들이 겸손한 믿음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네가 참으로 예수님을 알아간다면 모든 것은 변화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 때 겸손한 믿음과 더불어 참나를 알게 되고 정화와 성화, 치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장거리, 장시간의 해외 사목 방문후에도 한결같이 쉴사이 없이 일상에 충실하십니다. 사목여행후 함께 했던 분의 요약글 끝부분도 감동적이며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황님 자체가 신비로웠다. 사람들은 아열대 기후의 나라들안에서 이런 긴 여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의아해 한다. 그 반대다. 그것은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이었다! 숱한 이동과 거리, 비행시간으로 날마다 피곤했던 대신, 그분은 힘을 얻었다(gained energy)! 그분은 다양한 나라의 젊은이들을 만났고, 수시로 준비했던 원고를 버렸고, 대화자들에 따라 대화 내용도 바꿨다. 자신의 영과 몸을 새롭게 하면서(refrsehing his spirit and body)! 88세 생신을 얼마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이들가운데에서는 젊게 되었다(became young).”
피곤으로 지친 '아래에로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활력이 더해가는 '위에로의 내적 여정'이었으니 그대로 겸손한 믿음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제가 10년전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여정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발바닥 물집 하나 없었고 피곤도 전혀 못느꼈으며, 산티아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벼이 날을 듯 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은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두분 다 겸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충실히 섬겼던 친구들이였습니다. 251년 고르넬리오가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직면한 것은 박해가 아니라 교회내의 분열이었습니다. 교황의 입장은 배교자들도 회개 절차를 밟아 교회의 품안에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교한 이들은 물론 살인, 간통, 두 번째 결혼의 경우 역시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대립 교황으로 맞선 극단의 엄격주의자 로마의 사제 노바티우스의 이단에 맞서 교황은 치열히 투쟁했고, 여기에 결정적 도움으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해 주었던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였습니다.
치프리아노는 일찍이, “하느님이 우리중 하나에게 곧 죽을 은총을 주신다면, 우리의 우정은 주님 앞에서 계속될 것이다.”라는 대목의 서한도 교황에게 보내며 영적우정을 돈독히 했습니다. 고르넬리오 교황은 갈루스 황제가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253년에 순교했고, 교황중 최초로 무덤에 라틴어로 새겨진 “고르넬리우스 순교자(Cornelius Matyr)”라는 비문도 세워집니다. 이어 치프리아노 주교도 258년 발레리우스 박해시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마지막 임종어는 “하느님께 감사!”(Thanks be to God!) 였습니다. 역시 주교님의 전생애를 요약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게 됩니다. 병든 종을 고쳐주기 위한 그의 사랑이 겸손한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자기의 청에 오시겠다는 주님을 극구 사양하는 백인대장이요, 백인대장의 진정성에,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 만찬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주님의 만찬이 서로 배려와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지향하는 만찬의 취지를 자상히 설명한 후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라고 간곡히 권합니다.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함께 하는 것 역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서로 배려하는 사랑, 겸손한 믿음이 주님의 만찬을 위한 최상의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공동체의 일치와 치유의 은총이겠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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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아주 따끔하게 야단칩니다. 코린토 교회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아주 분열적인 교회입니다. 오늘은 11장의 말씀인데 3장에서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분열을 꾸짖었지요.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며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차원에서 분열을 꾸짖고 있습니다. 3장이 파당적인 분열이라면 11장은 그런 분열이 아니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킨 분열입니다.
부자들은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 자기들끼리 배부르게 먹고, 가난한 이들은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어 굶주리고 있었지요.
교회 안에서마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이 업신여긴 것입니까?
재물이 없다고 사람을 업신여긴 곧 ’없이 여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과 함께 있는데도 없는 사람인 양 여긴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속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행위는 가난한 이를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까지 바오로 사도는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사실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 비유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한 것이 당신께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코린토 교회가 더 꾸지람 들어야 할 것은 자기의 만찬으로 주님의 만찬을 모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현재 우리 번역에서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라고 된 것을 직역하면 ‘식사 때 자기 만찬’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해야 할 공동체가 자기 만찬을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찬은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하고, 부자들의 만찬은 자기들끼리 먹어야 할 것을 굳이 교회 공동체 집회에서 함으로써 주님의 만찬 곧 성찬례를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모시는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자기가 싸 온 자기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이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론 그렇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자기 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의식 없이 먹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하고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하면서 여전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사랑과 나눔에서 그를 배제하고 있다면 같이 주님의 만찬을 했어도 실은 자기 만찬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가운데 나는 어떤 만찬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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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ㄴ)
<백인대장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 7,1-10)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백인대장'은 군인 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장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에 있었기 때문에, 백인대장은 그들로부터 이방인 중에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유다인의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병든 자신의 노예를 살려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인대장의 첫 번째 위대함'입니다. 물건 취급을 받고 있었던 노예를 살리려고 하는 '백인대장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 위대함'은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노예를 고쳐주시려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실 때,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ㄷ-7)
백인대장의 큰 믿음과 노예에 대한 사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크게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노예가 건강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모시기 바로 직전에 백인대장의 이 큰 믿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17-26.33)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사제는 매일 '최후만찬의 재현인 미사'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삶의 자리에서 나의 구체적인 사랑 실천으로 '살아있는 미사'를 거행합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전합니다.
우리도 백인대장의 믿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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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 7)
점점
둥글게
커져가는
풍성한
달빛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만납니다.
아낀만큼
아픈 것이
우리들의
진실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울어야 할 때
우는 마음이
가장 소중한
마음입니다.
사랑보다
더 깊고
사랑만큼
소중한 마음은
이 세상에 더는
없을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마음은
간절히 기도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마음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기도는
낮아지는
겸손이
더해져야
더욱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겸손한
백인대장은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을 압니다.
그러기에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낮아지는
겸손의 깊이가
참된 믿음의
깊이입니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어느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있기에
다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장 먼저
주님께로
나가는 마음이
주님을 진실로
믿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더욱 낮아지는
가운데 만나는
참된
믿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한없이
낮아지면
아끼고 아끼는
사람을
치유하여 주시는
분이 누군지를
보게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뜻깊은
한가위 연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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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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