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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마태복음15장29~39절
제목 : 고치시고 먹이시는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지나 대표적인 이방 지역 데가볼리에서도(막7:31) 잃어버린 양을 치유하시고 먹이시는 목자의 사역을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을 뿐 아니라, 굶주린 수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1. 고치시는 예수님(29~32절)
1)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29절)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막 7:31은 예수가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있는 시돈으로 가신 다음에 다시 헤롯의 통치 영역의 밖, 즉 갈릴리 호수 남동 쪽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정(旅程)은 예수님께서 사악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관할 지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까지 유대 지경이 아인 이방인의 땅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곳에서의 병고침과 4천명의 급식(supply of food) 사건은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부스러기, 즉 한정된 축복 밖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시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이는 산상수훈의 장면(5:1)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 여행자로서의 여독으로 인해 잠시 휴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휴식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동적(動的)인 휴식이었습니다.
즉 본 기사를 영적으로 살필 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자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 찾아오시는 자를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합니다.
2) 병든자를 고치시고 온전케하십니다(30~31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막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 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자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모여 예수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주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사야가 언급했던(사35:5, 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9:1,2)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현재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신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잘 지나 다니지 않는 곳인 이방 땅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점과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을 통해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방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 이방인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의 권능은 바알세불 등의 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2. 먹이시는 예수님(32~38절)
1)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32절)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 5천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반(反)해서, 여기서는 예수님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내가...불쌍히 여기노라 - 이번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줍니다.
즉 예수님은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줍니다.
실로 바로 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됩니다(14:14;눅7:13).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 '함께 있다'라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로, 행 11: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해 있는 무리들은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는 참 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病)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미 사흘이매 - 이는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들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한편 팔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이 문장은 예수께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한편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합니다.
2)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절)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히 무지하고 불 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3)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불 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可能性)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일곱 개 - 이 '일곱' 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적 측면에서보다 그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중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생선(잎뒤디온)- 이 말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적어도 하찮은 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금은 과소평가 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4)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35절)
땅에 앉게 하시고 - 이 때의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14:19에서 푸른 잔디(막6:39)에 앉게 하셨을 때의 계절이 우기(雨基)가 막 지나고 유월절이 가까와 오는 봄이었다면 이방 땅에서의 전도 여행을 끝맺음 하려는 이때는 유월절이 훨씬 지난 건조기의 여름에 해당합니다.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순종과 질서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5) 무리를 돌보시고 먹이십니다(36~38절)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1) 축사 하시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축사하시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화(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습관처럼 드렸습니다(14:19).
(2)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만족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즉 각자가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광주리는 유대인들이 여행 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인 바구니(코피노스 ;14:20) 와는 달리, 광주리 '스퓌리스'는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입니다.
조각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다는 것은 5,000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 보다 더 많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3)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이는 예수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재림 때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줍니다.
한편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 사방 (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닙니다.
따라서 4,000(4*1,000)이란 영으로 세계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전 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케 하고도 남을 만큼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유대로 돌아오신 예수님(39절)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프로스메노;32절) 사람들을 이제 '흩어 보내시다'(아폴뤼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보낸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사실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1)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이나 전토(田土),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christian)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그를 좇아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옹위(擁衛)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3) 더욱이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갔고 gms히 이들은 이방 교회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가단 지경 - 막8:10에는 '달마누다지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의 어떤 사본(바질 사본, 오전시스 사본)에는 '막달라 지경'으로(KJV에도 이를 따름) 나와 있기도 합니다.
'마가단'의 이름의 뜻은 '망대'로 그 위치는 불명확하나 아마도 디베랴의
북쪽5km 지점의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에 있었던 성읍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온전케 하십니다(30,31절).
예수님은 각양각색의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치심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치유사역(이사야 35장 5~6절)을 성취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약속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치유하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시다.
2)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32,37절).
예수님은 치유를 받기 위해 모인 무리에게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기진맥진하지 않도록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모두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필요와 형편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속사정을 모두 다 아룁시다.
3)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십니다(36~38절).
예수님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잃어버린 양을 찾고 먹이시는 참 목자입니다(에스겔 34장 11~15절).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사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배고파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부족함 없이 채우시며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이런 저런 필요에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의 훈련을 지속해 나갑시다.
4)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32절).
몸을 가진 우리에게 먹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예수님처럼 굶주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구제하는 일을 복음 전하는 일과 늘 병행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2장 10절; 디도서 3장 13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빈곤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는 가난한 이웃을 얼마나 돌보고 있습니까?
또 우리 교회는 구제에 얼마나 많은 자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기도
공동체-저를 돌보시고 먹이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이 주신 것을 굶주린 이들과 나누겠습니다.
열방-나이지리아 북부에서는 종교 경찰이 이슬람법을 엄격히 집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있다. 지역 정부가 강력한 이슬람법 적용을 지양하고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