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게 말한다
바람은 안 보인다 하는가
나뭇잎 수런거림이
바람의 모습
강기슭 잔물결은
바람의 문양
앞뒤좌우 바람손님이니 나는
바람과의 동거여라
바람에게 말한다
긴 세월 바람 있어 환하게 잘 지냈는데
오늘도 눈 밝고 귀 밝아
바람을 알아보니
지극 감사하다고
바람에게 말한다
세상에 못다 갚을 내 모든 은혜의 빚을
바람에게 물려줄 일
미리 사죄한다고
바람과 살았으니 바람 외엔
상속자가 없다고
나무와 그림자
나무와 나무그림자
나무는 그림자를 굽어보고
그림자는 나무를 올려다 본다
밤이 되어도
비가 와도
그림자 거기 있다
나무는 안다
모닥불 감동
종이에 성냥 그었을 뿐인데
믿을 수 없는 일,
바람 거들어
불의 풍선 부풀고 부푼다
종이와 성냥과 바람이 작심하여
마른 나무에게 어찌했기에
이런 무서운 일 생겼나
불의 자식들 여럿 태어나
아이마다 한 찰나도 멈추지 않고
수직으로 곤두서며
이리 펄럭이다니
모닥불 둘레의 사람들도
불에 홀려 이상해져서
먼젓세상에 다녀온 듯도 싶고
공연히 눈물 글썽이는 등
이리 되었다
축원
내 시린 어깨를 보듬어주는
노숙한 연민
그대 누군신가
그대도 나처럼 늙지 않았다면
내 삐걱이는 뼈마디 어이 알고 짚어 주리
그대를 나의 앞 순서에 세워
신령한 큰 어른이 임하실 때
먼저 치유 받아 아름답게 하리
이는 내 축원이네
혈서
은밀한 혈서 몇 줄은
누구의 가슴에나 필연 있으리
시간의 시냇물 흐르는 동안
글씨들 어른 되고 늙었으리
적멸의 집 한 채엔
고요가 꽉 찼으리
너무 늦었다거나
아직 아니라거나
그런 말소리도 잦아들었으리
사람의 음성은
핏자국보다 단명하기에
이름을 쓴다
이름을 쓴다
음악의 해일 왔다 가면서
아뿔사 글씨가 뭉개졌다
이름 다시 쓴다
두 손 펴서 해가리개로
그늘 드리워준다
역시 안 되겠다
어둑하고 쓸쓸하다
이름 한 번 더 쓴다
몇 번을 써도 오직 이 이름
‘사람아’라고 쓴다
낮과 밤
햇살 붉은 한낮과
안식의 푸른 밤이 맞물려
낮 기울면 밤
밤 다하면 낮인 거
지극 호사여라
더하여 그 심오한 갈피에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구만리 강물
나의 시에게∙5
출타한 네가
백 년 이백 년 에도 귀가하지 않아
내 순정의 기다림은
기다림의 혼령 되어
세월의 분말을 가르며 날아갔다
달이 한참거리의
흙을 굽어보듯 하는 눈짓,
시여 이제 돌아왔는가
그 사이 실을 꿴 바늘자국을 남기며
어떤 심각한 공부로
동서남북을 떠돌았기에
이리 초췌한 모습인가
하여 이번에도
나는 용서할 입장 그 아니고
용서 받을 처지라고
기죽여 머리 끄득이느니
시여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시여
치유의 가을
치유의 가을이 온다
영험한 약품으로
줄을 서 기다리던 모든 다친 이를
고쳐 주면서 온다
가을의 사람들이 온다
기다리던 그 사람도 온다
의심하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가을을 여러 번 만났고
모두 좋은 가을이었는데
또 다시 가을이 오는
이 빛부심이
그 사람 아니고 누구이리
평화
누구라도 그를 부를 때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 가락으로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의 출중한 아름다움
그가 만인의 연인이며
새 천 년 이쪽저쪽의 최고 인물인
평화여 평화여 부디 오십시오, 라고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그 이름 연호해야 한다
그러나 호명만으론
안 올지 몰라
평화가 모자라 죽어간 형제들이
세상에 남긴 그 수저로
못다 먹은 저들의 밥과 희망을 먹여 주고
우리의 밥과 희망도 먹으면서
인류의 이름으로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고백할 때
아아 평화여
신성한 심장이여
비로소 그가 오리라
위로가 동이 났다
당신을 위로할 수 없다
그 절망적 경련에 맞추어
나의 심장이 뛰게 할 수 없다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기도한 다음
그 손에 수저를 권할 수 없다
나의 미소로는
누구도 웃게 못하며
나의 자장가는 누구도 아련한 꿈나라로
업어 넘길 수 없다
위로가 동이 났다
위로의 씨앗을 가득 실은
마차가 와야 한다
준수한 젊은 마부가 타고 있어야 하고
착한 농부들이 와아와아 붐비며
일하러 모여야 한다
그 아니라면
우리 모두 어쩔거나
탄피
조금 먹인 사람과
내 마음 아픈 곳도 봐버린 사람이
저승인가 하는 데서
함께 배를 타고 느릿느릿 흔들린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탄피 조각으로 내 안에 박혀 있다
허수아비
실바람에도 흐느적이는
헐렁한 단벌옷으로
해 저문 논두렁에 서 있는 허수아비
누군가의 모습 같고
나의 모습 같다
배고파도 허리 곧은 자세
덩그러니 혼자여도
햇빛 향해 두 팔 벌린 점을
나는 닮고 싶고 내 자식도
닮았으면 좋겠다
어휘들
시 쓰다 버린 어휘들
지나치게 맨살결이거나
과장, 요설, 안온한 수사법 등은 안 되지
말의 계율 앞에서
나는 매번 겁먹는다
제외한 말들은
과녁을 못 맞춘 화살로
공중을 맴돌다가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럴 테지
나의 토양에서 돋아나 자랐으니
달리 익숙한 곳이 없겠지
내 허름한 땅 가장자리에나마
허리 펴고 눈감아 쉬거라
노병
나는 노병입니다
태어나면서 입대하여
최고령 병사 되었습니다
이젠 허리 굽어지고
머릿결 하얗게 세었으나
퇴역명단에 이름 나붙지 않았으니
여전히 현역 병사입니다
나의 병무는 삶입니다
|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 & 조수미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할까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
|
첫댓글 어제 한국국제학교 학부모 반모임 때 만난 루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인
새길 어머니와 국어선생님이신 새길 아버지를 위하여 시와 음악을 올립니다.
좋은 만남은 우리를 늘 설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올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직암선교회 카페글을 지인들에게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