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시인, 시인 의사
김연종
내가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동료 의사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시가 돈이 되느냐”였다. 반면, 시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의사가 “왜 시를 쓰는가”이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속내는 비슷하다. 시인이 결코 직업은 될 수 없다는 게 질문의 요지가 아닐까.
누군가는 나를 일컬어 의사 시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시인 의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단에 이름을 내민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나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해 본 적은 없다. 의사라는 꽤 단단한 명함은 내게 시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좀처럼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엊그제 퇴근 후에는 모임 장소조차 생소했던 번개 모임에 갔다. 내비게이션도 찾기 힘든 골목 끄트머리에 절간처럼 한적한 서점이었다. 저자 사인회를 겸한 모임인데도 고작 서너 명이 전부였다. 뜸을 놓듯 간절한 마음을 새긴 작고 얄팍한 시집만이 오롯했다. 무릎을 맞대고 시 낭송을 하고 식은 피자 한 쪽씩을 나누고 헤어졌다. 저자가 직접 독자를 찾아가는 독립서점은 지역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서점의 작은 불빛은 따스했지만 어쩐지 등이 시렸다.
시인이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받고 문득 떠오른 생각은 '선비가 과연 직업이었을까' 이다.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 선비에 대한 설명이다. 선비士란 돈보다는 명예에 가까운 직책으로 진정한 의미의 직업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인이란 언어를 최고의 가치와 존엄으로 받들며 살아가는 사람, 거대 담론보다는 사소한 감정과 정서를 파고드는 사람으로서 얼핏 선비와 비슷한 속성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소심하게 자문해본다.
나는 의료 현장에서 풍기는 문학의 체취와 문학의 현장에서 느낀 의학적 소감을 풀어 글로 쓴다. 나의 작품들은 '의학 시'를 쓰면서 체득한 나름의 문학적 기록이다. 문학이든 의학이든 깊숙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의료 현장은 시의 현장과 무척 닮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것은 ‘체험 삶의 현장’이고 ‘극한 작업의 현장’이고 ‘고통과 죽음이 맞닿는 현장’이기도 하다. 의료 현장을 시詩에 접목하려는 작업, 그것은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생의 연약지반에 맺힌 물방울을 닦기 위해 휴지 한 장 뽑아 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의사 시인'의 존재 의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재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의사 시인은 대략 50명가량이다. 이전에 활동하였거나 파악하지 못한 시인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한국의사시인회>는 2012년 6월 9일 서울역 KTX 5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열며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의업을 숭상하면서도 문학에 이끌린 의사들이 함께 모인 것이다. 2012년에 발족한 <한국의사시인회>는 첫 사화집 『닥터 K』를 시작으로 『환자가 경전이다』 『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코로나 19블루』 『진료실에 갇힌 말들』까지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화집을 상재上梓했다. 코로나로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문학적 교류는 지속하고 있다.
누구는 가운을 입은 채 냉혹한 의료 현장을 분석하고, 누구는 가운을 벗은 채 낮은 삶의 현장을 들여다본다. 비록 의사 시인들의 소박한 글쓰기이지만 시대를 배경으로 한 나름의 자화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과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다. 의사 시인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기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글을 쓰는 고충을 자연스럽게 토로할 기회가 되었다. 육체의 병을 치유하는 의사들이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어루만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도 속 시원한 답을 내어놓지 못한 채 또 다른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학이 치유의 효과가 있을까. 치유는커녕 시 쓴답시고 의사의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문학을 핑계로 오히려 환자에게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닐까. 고충을 토로하다 고민만 키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문학에도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는지 모르지만, 정년퇴임 후 오히려 왕성한 집필 의지를 불태운 선배 의사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창작의 열정을 불태운다. 의사로서 바쁘게 보내는 시간보다 은퇴 후의 안정된 시간이야말로 지속해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일지 모른다. 하지만 글쓰기의 동력이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의 태도와 인생의 주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문학으로 향하는 길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에 가치를 두느냐, 시인이라는 주체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의사 시인’이라고도 하고 ‘시인 의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직업과 글쓰기의 관점에 따라 편의상 그렇게 분류하지만 뚜렷한 구별 점은 없다. 명칭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의사 시인일까, 시인 의사일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먼동이 터온다. 날이 밝으면 나는 다시 진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당분간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지속될 것이다. 아니, 나의 육체와 정신이 혼미해져 키보드를 두드리기 힘든 날까지 나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 그저 의료 현장을 시라는 형식을 빌려, 쓰고 또 쓴다. 부질없는 행위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보잘것없는 나의 문학 이력을 되짚어 본다.
아득한 내 유년을 관통하는 커다란 두 물줄기는 가난과 병마였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아픈 기억이지만 내 서정의 바탕을 이루는 문학적 토양이기도 하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겠지만 당시 농촌의 궁핍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암울했다.
시골의 읍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님이 국어 담당이었다. 서울에서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첫 부임지로 발령받은 선생님은 시골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나는 선생님의 배려로 호남예술제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었는데 그건 문학성보다는 성적순이었을 것이다. 운문과 산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는 짧은 글을 선택했다.
「거울은 왼손잡이다」라는 제목으로 쓴 시로 우수상을 받았는데 그 정도 성적만으로도 지방지에 이름이 소개될 정도였다. 얼결에 문학 소년이 된 것이다. 그 후 파브르 곤충기를 읽고 쓴 독후감이 최우수상으로 채택되어 교내 방송국에서 낭독하는 기회를 얻었으나 나의 문학적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중3이 되어 기침과 객혈을 시작했고 왜소한 체격에 체중감량이 지속되어 병색이 완연했다. 더는 학교에 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내 청춘을 온전히 갉아 먹었던 폐결핵, 많은 문학작품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진 그 병이 내게는 실존적 가난과 병마의 상징이었다.
결국 휴학과 재수를 반복한 끝에 동료들보다 2년 늦게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가난과 병마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도를 찾았지만 언제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문학은 아득히 멀리 있었다.
중고 시절, 국정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시나 소설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금서였고 대학 시절에도 문학은 사치스러운 장식품처럼 느껴졌다. 의사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교양과정에서조차 문학은커녕 인문학 강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주어진 커리큘럼에 순응하는 자만 살아남았고 한눈을 파는 자는 여지없이 나가떨어졌다. 나는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허울 좋은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내면의 어떤 갈증 때문에 중병을 앓듯 또다시 시름시름 앓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을 거쳐 내과 의사로 수련을 마칠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군의관이 되어서야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인문학이나 철학 등 전공 밖의 책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나를 찾아 떠나는 충만한 여행이었다. 문예지와 소설들을 탐독하면서 내 안 깊은 곳에 숨어 보이지 않았던 감성들이 하나씩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렇게 문학이란 섬을 향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부단하게 헤엄쳐 나갔다. 마흔을 넘어서야 문학판에 발을 담그고 때늦은 문청의 열병을 다시 앓았다.
늦깎이 등단으로 열혈 문학청년이 된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시를 구상하며 문학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처녀시집 『극락강역』으로 ‘의사 문학상’을 받게 되는 행운까지 누렸다. 하지만 ‘의사 문학상’이라는 묵직한 의미처럼 문학가로 사는 삶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하리라 생각했던 문학의 현장은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비정한 의학 현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학에 관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시름도 깊어졌다. 내 글쓰기의 자의식은 무엇인가, 텍스트로서의 시론은 가지지 못할지라도 시 쓰기의 당위성은 어디서 도래하는가. 점점 관념화되고 누구의 가슴도 울리지 못할 넋두리를 계속 쏟아내야 할 것인가.
나는 문학 모임에 나가면 건강에 대해서만 질문받고 의사 모임에 가면 문학에 관한 질문만 받는다. 필시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경계인의 삶을 말하지만 나는 이들을 떠나서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뿌리를 가졌으나 동질성의 나뭇결로 변신한 하나의 몸통인 것일까, 마치 나의 모호한 정체성처럼.
러시아의 유명작가이자 의사인 안톤 체호프는 “의학은 아내, 문학은 정부情婦”라는 말로 이 둘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어쩌면 내게도 문학과 의학은 운명처럼 엉겨 붙은 연리지일지도 모른다.
의학은 인간을 논하는 학문이다. 그러기에 의학은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학문과의 소통이 절실하다. 이제 현대의학은 과학적 사고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놀랄만한 진단 기술의 발전과 획기적인 치료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로부터 받는 불신의 벽은 오히려 높아졌다. 환자의 인간적인 면은 고려하지 않고 질병의 속성만을 보고 치료한 결과이다. 의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고의 진전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은 여전히 지식만을 강요한다. 도약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날개가 필요하다. 이는 내 문학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의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의사 시인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할까. 청진기와 함께 한 지 어언 30년이 지났지만 나는 도무지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의사와 시인. 양쪽에 발을 담그고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나를 돌아본다. 동네 의사로, 변방의 시인으로 문학과 의학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오늘도 나의 시는 진료실에서 탄생한다. 의학의 현장이야말로 지난한 문학의 현장이다. 문진과 청진은 신산한 삶의 언어이고 처방전은 진솔한 몸의 언어이다. 은유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할 순 없지만 황량한 벌판에서 외치는 그 현장의 목소리를 나는 계속해서 받아 적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