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7주일[2019. 10. 06]
오늘 하바쿡 예언서 장면은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 연장이다. 주님께서 하바쿡으로 하여금 환시(그리스어로 apokalypsis, 라틴어로 visio)를 기록하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이다(하바 2,2; 탈출 34,28 비교). 이로써 현실에 대한 시간적 차원의 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4차 산업의 문을 연 스티브 잡스에 의하면, ‘혁신은 대상(사물)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대상화된 시간의 세 가지 큰 차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할 때라야 새로운 현실이 태동하는 법이다. 작금의 상황이 불의에 기반한 억압과 폭력뿐일지라도(하바 1,2-3), 환시를 보게되면, 곧 비전이 생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환시를 통해 본 것이 이제 새로운 현실을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증언(martyria)이다. 새로운 현실의 알파이자 오메가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것은 우리 안에 주어져 비전을 보여주시는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2티모 1,7ㄴ)이시다. 사랑에 기반해야 진정한 힘이요, 진정한 힘은 절제된 것임을 보여주시는 영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작별하시며 약속하신 바로 그 ‘다른 보호자’(요한 14,15), ‘진리의 영’(15,26; 16,13)이시다. 이러한 주님의 영은 바오로 사도로 하여금 수인 처지가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신다(2티모 1,8ㄴ). 바오로는 영 안에서 파트모스섬의 환시자와 동일한 처지가 된 것이다(묵시 1,9). 그의 감방이 파트모스섬이 되었고, 바로 거기서 하늘에 열린 문 하나(4,1)를 통해 천상 어좌로까지 들여 높여지게 된다. 일종의 ‘천상적 전망’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 따로 분절된 것으로 보이던 것들 것이 이제 그 연관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21,1)이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2,4ㄴ)는 하바쿡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상대로 한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성실함(히브리어로 ‘에무나’, 그리스어로 ‘피스티스’, 라틴어로 ‘피데스’)’만이 살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주님만을 상대로 온 세상이 복종하는 것(그리스어로 ‘휘파쿠오’)을 보게되는 것(루카 17,6 참조), 바로 그것이 제대로 된 대상을 상대로 제대로 복종하는 것에 대한 필수 전제 조건(condition sine qua non)이다. 주님께서는 돌무화과나무뿐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상대로도 그러한 복종을 요구하신다.
‘복종하는 자’는 진실로 창의적(creative)이며 자주적인 인간(authentic self)이다. 에덴에서 인간이 보인 모습이 자주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아담은 벌어진 일에 대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핑계 대었고, 하와 역시 뱀에게 모든 것을 전가시켰다. 이렇듯 첫 인간은 남 흉내 내며 타인의 말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아니면 과장하고 왜곡하였던 것이다(창세기 3장). 아담은 좀 더 창의적이고 자주적이어야 했다. 주어진 대상들 사이의 연관성을 보아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복종하지 못했다. 죄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창의적이고 자주적이지 못한 복종을 강요당한 자들의 제일 대표적 예가 어쩌면 군인일 수 있다. 군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통속적으로 명령과 복종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기존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거나 새로운 것에 혐오감과 증오심을 표출한다면, ‘군인’이 된 것이다. ‘군인’이 새로운 본을 보여줄 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이 보이시는 ‘새로운 본보기’(요한 13,15)를 보고 복종하였기에, 베드로는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비전을 지녀서 복종하는 것도 맞지만, 제대로 된 분을 상대로 한 복종을 통해 비전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의 아들을 상대로 한 복종은 이렇듯 ‘새 창조’를 위한 옵션이 아니라, 필수 전제 조건인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인간에게는 복종하지 않는다.’를 주창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하기에, 이 사람에게 복종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