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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근대 유산이 숨쉬는 힙한 관광지로 유명한 군산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모습을 담은 르포르타주. 2017년 7월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 가동 중단, 2018년 5월 한국지엠 군산 공장 운영 중단 이후, 저자는 '몰락한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군산으로 향했다. 6주 동안 30여 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공장이 떠난 뒤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이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매달 지급되던 180만 원 실업 급여 지급이 마감되는 순간, 재취업을 희망했으나 결국 치킨집을 차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 실직한 남편 대신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아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떠받치던 원룸촌과 상가에 남은 떠돌이 개들, 역사와 문화의 도시에서 기업과 함께 사람들도 빠져나가는 과정 등은 단순히 서쪽 끝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2019년 7월 《한겨레21》 커버 기사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을 바탕으로 이후의 변화와 저자의 소회까지 담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 저자 소개
방준호
1986년 태어났다. 2013년부터 《한겨레》 기자로 일했다. 2019년부터 《한겨레21》에 속해 있다. 주로 현장을 돌아다니며 르포 비슷한 기사를 썼다. 사람 만나는 일을 힘들어하지만, 사람 이야기 듣는 일은 좋아한다. 힘들게 좋아하는 일을 한다.
📜 목차
프롤로그: 군산 가는 길
1. 토박이: 유별나고 애틋한 사람들
2. 운명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3. 찬란: 세계 도시를 꿈꾸다
4. 균열: 불안한 여유
5. 그날: 공장이 떠나던 날
6. 이별: 남은 사람 떠난 사람
7. 풍경들: 치킨집과 원룸촌
8. 정체성: 어디서 무엇을 할까
9. 1년: 전환과 머뭇거림
10. 쉬어 가는 이야기: 익숙한 도시에서
11. 다시: 그저 평소 같은 하루
에필로그: 혼란으로 엮인
📖 책 속으로
프롤로그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2017년 7월 가동을 ‘중단’했다. 한국지엠 군산 공장이 2018년 5월 31일 완전히 문을 ‘닫았다’. 공장 노동자, 협력 업체 노동자, 그 가족을 더하면 군산 사람 4분의 1이 덕분에 벌고, 먹고, 살았다고 여겼던 곳이다. (20쪽)
1. 토박이: 유별나고 애틋한 사람들
산단을 남북으로 가르는 왕복 5차선 도로인 자유로 아래쪽에는 대우차의 협력 업체가 자리잡았다. 협력 업체 창원금속공업은 대우차 공장이 가동하기 직전인 1995년 말 군산에 공장을 세웠다. 모기업인 주식회사 창원은 원래도 부평에서 대우차에 부품을 납품했으니 대공장을 따라오는 게 당연했다. 자동차 펜더 따위를 만들어 납품했다.
국가 산업 단지가 생겨난 이후에도 바다를 메워 공장 부지를 짓는 일은 멎지 않았다. 오식도부터 비응도까지를 메운 군산 제2국가 산업 단지가 만들어진 건 2000년대다. 군산 제2국가 산업 단지 대표 기업이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다. 전국 현대중공업 조선소의 막내다. 이번에는 조선소를 따라 선박 블록, 기자재 업체들이 따라왔다.
그 밑으로 새만금 산업 단지를 2010년대부터 조성했다. 여전히 땅을 메운다. 도시는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넓어지고 있다. (70~71쪽)
2. 운명들: 정규직과 비정규직
글로벌 기업의 숱한 생산 기지 가운데 한 곳인 한국 중소 도시의 삶과 노동자의 생계는 계획하는 곳에서는 ‘비용’으로 읽힐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얼굴, 공장과 도시의 관계를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지엠 이사회가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비용 대비 효율을 기준으로 공장의 생과 사, 노동 조건, 삶의 지평이 갈린다. 엄혹하다. 그 안에서 벌어질 미묘한 갈등이나 소외감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질서를 짜고 그 안에서 군산 역시 무럭무럭 성장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대개 형편이 나아졌다. 누군가는 그 성장만큼, 누군가는 그 성장보다 못하게 나아졌다.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면 도시가 처한 위기만큼만 아찔했던 사람도 있고, 도시의 위기보다 더 크게 무너진 사람도 있다. 도시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은 얽혔다. 다만 서로 달리 얽혔다.
그렇게 되었다. (97~98쪽)
3. 찬란: 세계 도시를 꿈꾸다
군산이 전북 지역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이즈음 처음 20퍼센트를 넘긴다(2008년, 21.2퍼센트). 당시 한 신문 기사는 택시 기사의 당연한 말로 들썩이던 군산 분위기를 전한다. “현대중공업이 대단한 기업이긴 한가 봐요. 군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요.”
마침내 도시는 2000년대 중반 한국 산업을 대표하는 자동차에 이어 조선이라는 구색까지 갖추었다.
한국 조선 산업은 2003년 일본을 제친 뒤 세계 1위를 독주했다. 2008년 조선업은 총수출액에서 처음 반도체와 자동차를 제쳤다. 수출의 10.1퍼센트를 점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2001년 이후 전 세계 상품 교역량이 가파르게 늘었다. 생산 과정은 전 세계로 분산됐고, 작은 부품 하나하나 바다를 건너 다니며 조립되었다.
자유 무역의 확대는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배 만드는 일을 둘러싼 낙관이 따듯한 볕이 내리쬐던 5월, 군산의 서쪽 끝에서 정점에 이른 건 당연한 일이다. (110~111쪽)
4. 균열: 불안한 여유
정순철의 생활도 비슷했다. 그는 관리자 아닌 직원이었으니, 잔업ㆍ특근을 기대할 수 없는 공장에서 받는 임금은 꽤 줄었지만, “기본적으로 돈보다 사람들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클럽에 나가 탁구를 치거나 배드민턴을 쳤다. 동료들과 재미 삼아 동네에서 찍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농민 분장을 하고 얼굴을 모은 채 사진을 찍었다. 참 해맑게 웃었다. “맨날 봐도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그냥 같이 모여서 얼굴만 봐도 계속 웃겼어요.”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는 흥행에 대실패했는데(무슨 영화인지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게 또 그렇게 웃겼다. “망했어, 완전히 망해 부렀어.” (134~135쪽)
5. 그날: 공장이 떠나던 날
한국지엠 비정규직 강민우가 자기가 속한 사내 하청업체 대표의 부름을 받은 것은 2월 26일이다. 이미 아수라장인 공장 한 켠에 있는 협력 업체 사무실로 들어갔다. 비정규직 노동조합 대신 꾸려진 노사협의회 위원들이 모여 있다. 그 역시 위원 가운데 한 명이다. “회사가 망해 계약이 해지된다. 3월 31일자로 해고된다”고 했다. 그 말을 다른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분위기가 격해졌다. 옆에 있던 다른 위원이 얼굴 붉혔다. “우리한테 전하라고 하지 말고, 전 직원한테 직접 일일이 다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외쳤다. 예상했던 일인데 생각보다 참담했다. 십수 년을 일한 일터와 작별이 황당하리만치 간편했다. (165쪽)
6. 이별: 남은 사람 떠난 사람
아내는 전주에서 일을 구했다고 한다. 한 정육 공장에서 고기를 포장하고 한 달 150만 원 정도 받는다. 군산 공장 폐쇄를 겪고 아내는 지독히 아끼고 모으려고 한다. 한번 겪었던 위기로 배운 건,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모아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아내 모습을 보며 밥은 최대한 회사에서 먹겠다고 다짐한다. 군산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휘황찬란한 창원 도심에 나가 보는 일은 없다. 동료들도 그렇다. 다들 비슷하다.
잘 살리라 다짐하며 가지고 온 낚싯대와 골프채는 방 한쪽에 밀어 뒀다. 꺼내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매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가족은 동료들 차를 얻어 타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보고 오는 게 고작이다. 전주 집에 가 봐야 잠만 자다 돌아온다. (189쪽)
7. 풍경들: 치킨집과 원룸촌
정순철도 자영업의 불안정성 모르지 않는다. 희망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차린다니! IMF 이래 숱하게 듣고 보아 왔던 전형적인 실직자 고난의 경로가 아닌가. 그 역시 실직 직전까지는 재취업을 최고로 쳤다. 역시 재취업할 일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도시에서 이전 수준은 아니라도 그에 버금가는 일을 찾기는 쉽지 않다. 서비스업은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았다. 일단 희망퇴직금이라는 목돈도 들어온 상태다.
보증금 8000만 원에 권리금 6000만 원 정도를 주고 수송동 롯데마트 뒤 상가 건물에 자리 잡았다. 원래 살던 지곡동 아파트는 세를 주었다. 가게 근처 새 아파트를 전세로 구해 이사했다. 노동 시간을 따져 보니 출퇴근 시간을 넣을 자리가 없다. 가게에 드는 이런저런 비용에 집세를 더하니 얼추 회사에서 나오며 받은 희망퇴직금을 거의 썼다. “가게를 좀 비싸게 들어온 것 같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 보니 타협도 제대로 못해 봤어요.” (198쪽)
8. 정체성: 어디서 무엇을 할까
“요양 보호사 실습 교육받으면서 옆에 죽 둘러보는데, 중년 남자가 나밖에 없는 거야. 창피했어.” 굵직하고 털이 숭숭한 자기 손가락이 문득 부끄러울 때면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사회 복지 일자리는 고령화에 따라 점점 수요가 많아질 거고 남자는 부족하다고 하잖아.” 맞는 말이다.
창피함을 견디고 자격증을 따 왔으나 요양 보호사로의 전직은 머뭇거린다. “원래 노인 봉사 되게 즐겁게 열심히 하던 동료가 있었어. 그 친구는 한 200만 원 받으면서 요양 보호사 시작했다더라고. 어제 전화해서 ‘뭐하냐?’ 물어봤더니 ‘똥 귀저귀 갈어’ 그러더라고. 말투가 짜증이 난 투여. 일이 되니까 괴로운 거야. 봉사로 할 때는 좋아도.” (219~220쪽)
9. 1년: 전환과 머뭇거림
지역에게 일자리는 무엇인가. 사람에게 일자리는 무엇인가.
산업과 일자리는 들고 나길 반복한다. 도시를 쓰다듬고 할퀴고 지나간다. 들고 나는 산업과 일자리에 따라 모습은 바뀐대도, 아무튼 도시는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시에는 “제가 군산에서 태어나…”로 운을 떼는, 이해하기 어려운 도시에 대한 정념을 표현해 대곤 하는, 차마 도시에서 떠날 수 없는 25만 명의 사람이 있다. 그들이 엮는 수억 개의 관계가 있다. 사람을 위해, 이 숱한 관계를 위해 일자리가 존재할 수도 있는 거였다. 거기 맞는 일자리를 지역이 구상할 수도 있는 거였다.
김현철 교수는 그런 것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우선 군산형 일자리에서 지우고 가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정한다. (246~247쪽)
11. 다시: 그저 평소 같은 하루
이정권은 2020년 말 창원금속공업을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결별이라기보다 연장선이다. 창원금속공업에서 시작했던 자동차 대체 부품 사업을 좀 더 확장하기 위해 ‘더넥스트’라는 회사를 차렸다고 했다. 필요한 대체 부품을 파악하고 역설계한 뒤 위탁 생산한다. 새로 이 일에 뛰어들려는 사업가를 지원한다.
“못 본 새 많은 일이 있었다니까요.” 막 두 번째 대체 부품을 출시하며 기뻐하던 이정권은 이제 사업가, 공무원, 활동가를 적당히 뭉쳐 놓은 듯한 모습이 되어 있다. 예산을 받아다 대체 부품 생산자 지원 센터를 만들었다. 이제 50여 개 업체가 대체 부품 생산에 참여한다. 강의를 다니며 더 많은 참여자를 모은다. 꿈은 여전하다. “대체 부품의 목표는 세계 시장이잖아요.” (289~290쪽)
에필로그
다만 그런 이야기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질을 떠나)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믿었던 공간의 질서가 의지와 무관하게 무너질 때, 무너지는 까닭이 그저 세상이 변해서일 때, 변한 세상에서 나와 내 공간이 의미를 잃었다고 모두가 말할 때, 사람은 어떻게 슬퍼하고 또 무엇으로 위로받는지.
그 비슷한 혼란을 나도, 당신도 함께 겪는다는 건 분명 불행인데,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그나마 우리를 한데 엮을 몇 안 남은 공통 감각일지도 모른다. 저기, 그들의 황망함을 여기, 우리가 들여다볼 여지일지도 모른다. 실직,
🖋 출판사 서평
군산 토박이 김성우(가명)는 최근 6개월짜리 계약직에 사인했다. 전기차 기업 ‘명신’이 새 일터다. 사실 명신에 입사하기 직전 정규직 조건의 사료 공장 면접까지 마친 참이었다. 하지만 명신이 20년 넘게 그가 몸담았던 옛 한국지엠 군산 공장 자리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실직 후 어떻게든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던 그에게 ‘6개월’이니 ‘계약직’이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282쪽)
스물여섯에 당시 대우자동차 공장에 취직했다. 대우에 다니면 1등 신랑감이던 시절이었고, 시쳇말로 공기업 같은 대접을 받았다.(70쪽) 그랬던 한국지엠(대우자동차) 군산 공장이 운영을 중단했다. 경제 구조가 변했기 때문이었고, 자본의 논리를 따른 결정이었다. 김성우는 고민 끝에 희망퇴직서를 냈다. 그리고 10개월 뒤 청소업체를 시작했다. 녹록지 않았다. 사업을 접고 이번에는 페인트 공장과 마스크 공장을 거쳤다. ‘깨끗한 공장에서만 일해 본’ 그에게 작고 열악한 공장은 성에 차지 않았다.(281쪽)
김성우의 삶은 한때 화려했으나 지금은 몰락한 제조업 도시 군산을 닮았다. 젊어서부터 고향에 터를 잡았고, 안정된 중산층 가정을 이뤘다.(129쪽)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날 일자리가 사라졌다. 퇴직금을 받고 새로운 일을 찾아봤으나 마뜩잖았다. 쫓기듯 구한 새 직장은 어디 내놓기가 부끄러웠다.(222쪽) 세상에 처음 내쳐지며 존엄 없는 일의 비루함(234쪽)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그나마 저자가 군산에서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다시 제조업 현장으로 돌아간 사람이라는 점(287쪽)이 김성우의 삶과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이 책은 군산이라는 도시가 제조업 도시로 편입되고 몰락하는 과정을 여러 명의 김성우를 통해 바라본다. 그 중심에 선 ‘현대중공업’과 ‘한국지엠(대우자동차)’은 기업과 공장의 흥망성쇠가 도시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수도권 본사와 지역 생산 기지 등, 군산의 질서가 확립되고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냄으로써 제4차 산업 혁명 이후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를 소도시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제조업 도시 군산의 흥망성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개발 바람에서 비켜나 있던 군산은,(61쪽) ‘균형 성장’과 ‘서해안 시대’의 바람을 타고 제조업 도시로 성장했다.(66쪽)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가 군산 국가 산업 단지에 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그룹 해체와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라는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지엠이라는 새 주인을 찾았다. 곧이어 군산 제2국가 산업 단지에는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자리 잡았다. 조선소를 따라 선박 블록, 기자재 업체들도 군산으로 몰려들었다.(69~71쪽) 양적인 발전은 30여 년간 계속되었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에 대한 믿음으로 생활 기반을 도시에 단단히 뿌리 박았다.(186쪽) 사람들은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을 보며 세계 도시를 꿈꿨다.(110쪽) 유난히 토박이가 많은 도시 군산은 그곳 사람들에게 일터이자, 삶터이자, 놀이터였다.(47쪽)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도 군산의 위기감은 크지 않았다. IMF도 견딘 그들이었다. 오히려 고유가 덕에 군산 공장에서 생산되는 소형차가 잘 팔려 나갔다.(127쪽) 하지만 치솟던 유가가 2013년 하락세로 접어들자 군산의 연비 낮은 차는 더 이상 세계 시장에서 인기 품목이 아니었다. 생산량이 줄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엠 본사는 쉐보레 브랜드를 유럽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으로 팔려 나가는 쉐보레 차는 군산 공장의 생존과 절대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132쪽) 하지만 ‘늘 그랬듯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잔업에 특근까지, 오로지 회사와 일이 전부였던 사람들이었기에 생산량 감소는 애써 무시하고 우아하고 평온한 일상을 즐겼다.(136~137쪽) 재미 삼아 동네에서 찍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보고,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특히 가족과 함께 있을 땐 ‘아 이런 게 사는 거지’ 싶었다.(135쪽)
2018년 2월 13일, 설을 사흘 앞둔 화요일. 한국지엠 군산 공장은 3개월 보름여 뒤 공장을 패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151쪽) 이미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2015년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2017년엔 호주에서 공장이 문을 닫았다. 지엠 본사의 눈에 군산 공장은 누군가의 좋은 일터나 지역 사회의 대들보 같은 게 아니었다. 주주 이익에 충실하지 못한, 그저 이윤을 초과하는 비용일 뿐이었다. 사실 군산이야말로 이러한 효율성과 엄혹한 구조 덕에 호황을 누려 성장한 도시였다.(137~139쪽) 한국지엠 종업원 2044명과 164개 협력 업체 직원 1028명이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었다. 1년 전 조선소 가동 중단으로 이미 4859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이었다.(185쪽)
공장이 떠난 뒤 얽히고설킨 운명들
고현창(가명)은 살아남았다. 희망퇴직 대신 회사에 남아 전환 배치되기를 기다렸다. 그가 향한 곳은 군산에서 210킬로미터 떨어진 창원 공장이었다. 아이들 대학 들어갈 때까지 6, 7년만 버티기로 했다.(183쪽) 하지만 불안은 새로운 도시에서도 계속됐다. 언젠가부터 창원 공장에서도 주말 특근이 사라졌다. 곧 2교대 근무가 1교대로 바뀔 분위기다. 공장은 비정규직부터 차례로 직원을 내보낼 것이고, 근무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공장이 떠나기 전 군산의 모습이 정확히 그랬다.(188쪽)
정순철(가명)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도시에서 이전 수준이 아닌 그에 버금가는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197쪽) 차선으로 치킨집을 차렸다. 가게에 드는 이런저런 비용과 집세로 퇴직금을 거의 다 썼다.(198쪽) 돈보다 가족과 여유라 생각해 왔지만, 가족을 위해 여유를 포기했다. 여유를 포기하니 가족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199쪽) 장사 6개월 차에 몸에 이상이 왔다. 손님을 몰아내고 문을 닫을 수 없어 새벽 1시까지 버티다 응급실에 가서 쓰러졌다. 다음 날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출근해서 양파를 썰었다.(201쪽)
공장이 떠난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민첩함을 부러워했다. ‘세상에 나와 보니 정규직들이 완전히 뒤처져 있었다.’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이 등한시하는 힘든 일을 비정규직들이 더 많이 했으니까 능력 면에서도 낫고 생존 능력 자체가 강했다.(230쪽) 실직자가 새 일을 찾는다는 것은 ‘눈을 낮추는 과정’이다.(228쪽) 정규직들은 망설였다. 요양 보호사, 청소업체 경영, 당구장 주인 등 새로운 삶 앞에서 창피함, 부끄러움, 과거의 기준, 자존감과 최소한의 존엄 같은 것을 먼저 떠올렸다.(219~228쪽)
정규직이 머뭇거리는 동안 비정규직은 부두 노동자, 아파트 관리 사무소 직원, 시내버스 운전 노동자 등으로 재취업했다.(230쪽)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특히 30~40대 젊은 노동자들은 정부와 고용 기관에 모범적인 케이스로 불린다. 독려나 관리 없이도 알아서들 새 일자리를 구했다. 비정규직으로 살아왔기에 임금과 처우에 까다롭지 않고, 희망퇴직금을 받지 못해 다급했으며, 무엇보다 옮겨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229쪽) 20여 년 전 IMF 외환 위기가 낳은 노동자로 볼 수 있는 이들은 새로운 경제 위기 앞에서도 잘 적응한 것만 같다.(230쪽)
다만 해고 과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의 없는, 비합리적인, 납득할 수 없는 해고는 잘린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했다. 한국지엠이 아닌 협력 업체 대표 말 한마디로 내쳐진 기억, 나란히 옆에서 일했던 정규직에게 주어졌던 희망퇴직금이나 퇴직 이후 삶에 대한 배려를 전부 받지 못했다는 충격이 컸다.(232쪽) 회사가 뒤늦게 마련한 위로금 1000만 원을 포기하고 비정규직들끼리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시작했다.(233쪽)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
공장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시점, 군산에 본격적으로 전환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역이 대기업 생산 기지만으로 성장하는 모델은 10년짜리다.’ 산업의 사이클에 따라 핵심 기능이 없는 지역 생산 기지는 먼저 잘려 나간다. 기업은 호황일 때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채운다.(241쪽) 따라서 대기업의 생산 기지에 머무는 방식은 안 된다. 노동자 격차나 기업 간 격차를 벌리는 산업도 안 된다. 지역에서 경영과 노동에 관한 의사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작아도 지역에 뿌리 박은 기업 여러 곳이 자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47쪽)
경제 위기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IMF 사태나 세계 금융 위기를 떠올린다. 트라우마로 남은 그 시절을 두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야기와 분석을 쏟아 낸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제4차 산업 혁명으로의 움직임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에 다시 한번 커다란 변화를 예고한다.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이 새로운 위기는 지난번의 그것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군산은 물론 거제, 울산 동구, 통영, 고성, 창원 진해구, 목포, 영암, 해남까지 자동차와 조선을 경제의 중추로 삼았던 도시들은 모두 고용 위기에 빠져 있다.
한순간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운명들, 불안과 절망이 삶을 잠식하는 순간들, 놓지 못한 영광의 기억들, 억지 희망을 비웃는 허망한 풍경들이 쇳소리와 불꽃 대신 제조업 도시를 채우고 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군산의 반성과 노력이 그들만의 바람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은 군산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실험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큰 변화를 맞는 세계 산업과 노동, 도시 정책 일반의 실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247쪽)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이 한 문장을 풀어내기 위해 저자 방준호 기자는 6주 동안 군산에 머물며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2019년 7월 둘째 주 《한겨레21》 커버 기사로 소개되었다. 그 후 2년 반이 지났다. 그곳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궁금해 다시 찾았다. 이 책에는 그 뒷얘기를 담았다. 지방에 대한 서울 사람의 무심함과 기자의 타산적 태도를 반성하는 마음도 담았다. 저자는 ‘누군가의 혼란이 나의 혼란이 된다는 것은 불행이되 우리를 한데 엮을 공통 감각’이라 말한다. 따라서 저기 군산의 황망함을 여기 우리가 들여다볼 여지가 있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