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천 살둔 마을.
이 말을 하자마자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들린다.
수려한 산봉우리들과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이 보인다.
지금은 깊은 가을.
내린천 살둔 마을에서는 하루 종일 바람 소리 물소리만 들리다가 금방 밤이 된다.
별들이 하나 둘 돌아온다.
별 하나 돌아올 때마다 풀섶에서는 벌레들이 깨어나 별빛처럼 운다.
그리하여 뭇 별이 다 나온 한밤중이면 살아남은 벌레들이 일제히 깨어나 운다.
이미 죽어, 빈 껍질로 남은 벌레들까지 찬란하게 울어댄다.
몇 해 전 가을, 내린천의 한 산장에서 그런 밤을 만났다.
있는 술을 다 마시고 설 취해서 빈 술병의 찝찔한 술방울까지 짜 마시고 있을 때 이웃에 있는 분교로 전화가 왔다.
20리 밖 광원리 마을의 가게에서 온 전화였다.
"거기 가려면 어떻게 가지요?"
풀벌레처럼 가녀린 여성의 음성이었다.
"어떻게 오긴요.걸어 오셔야지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초행이고 밤길이라서... 죄송하지만 누가 마중 좀 나와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그 말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참이라 얼른 대답했다.
"제가 가지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대신 소주 몇 병 사세요."
후닥닥 후닥닥, 새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놓고서 그 밤에 내린천을 거슬러 오르던 내 가슴은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술 몇 병과 풀벌레처럼 가녀린 음성의 여성이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을 벗는 나뭇가지 사이로 내린천은 은하수 빛으로 흘러갔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90분은 걸리는 20리 길을 한 시간에 갔다. 걸었다기 보다 뛰어간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 여성은 잿빛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비구니였다. 게다가 또 한 분의 노비구니를 모시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암자를 지을 조용한 자리를 물색하러 다니는 중입니다. 이 근처가 자꾸 마음에 끌려서 왔다가 살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노비구니의 입가에는 보일듯 말듯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곡차는 스님 바랑 속에 들었습니다. 산장에 가서 드리지요."
젊은 바구니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산장에 도착할 때가지 술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향과 초, 그리고 들깨 냄새가 나는 스님 두 분을 모시고 살둔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깊은 공상에 빠졌다.
이 근처 어디에 저 스님들이 암자를 지으면 암자의 불목하니로 살까부다.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불 때고 장에 나가 쌀 사오고, 초파일날 연등도 만들까 부다.
용돈을 받으면 가끔 광원리 가게에 나가 곡차도 한 사발 마시고 별빛 어린 내린천을 흥얼거리며 돌아올까부다......
서울의 모습, 서울에서의 내 모습도 떠올랐다. 지하철 차창에 비치던 초췌한 몰골,자판기가 커피 덜궈주기를 기다리는 구부정한 뒷모습, 생맥주 집에서 노래 부르던 목의 핏대.......
노비구니는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바랑에서 꺼냈다. 술병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 걸로 미루어 분명히 두 병은 될텐데 한 병만 꺼냈다.
"한 병 더 있습니다만 이것은 내일 아침 저희가 떠날 때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술이 열 병 있어도 모자랄 것 같은 밤입니다."
"죄송합니다. 노스님께서는 선생님의 기색이 염려스러우신가 봅니다. 이런 밤에는 한 병도 열 병처럼 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젊은 비구니의 나직한 음성에는 뭔지 모를 설들력이 있었다.
술병을 거머 쥐고 묵묵히 툇마루로 나왔다.
허공엔 어느새 달빛이 가득하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서글펐다.
별빛도 달빛도 정작은 서글펐다. 술병은 금방 바닥이 났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뒷밭에서 마른 옥수수대가 서걱이고 빈 술병에서는 희미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밤의 항구가 떠오르고, 슬픈 영화의 주인공처럼 어디론가 또 떠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가. 인기척이 있어서 돌아보니 젊은 비구니였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달빛 걸린 마루 한쪽 끝에 술병을 가만히 내려놓고 합장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그 때의 내 마음을 나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나는 그 술을 거기 그대로 두고 오래오래 바라보았다는 것만 말해 둔다.
내린천 살둔 산장. 이 말을 할 때마다 달빛 걸린 마루 위에 오두마니 놓여있던 2홉들이 소주병이 떠오른다.
덧없이 비워버린 첫번째 술병 속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던 먼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친구여, 지금은 뭇 목숨이 모두 애처러운 게절이다. 술 몇 병 들고 내린천 따라 끝없이 흘러가보고 싶은 가을이다.(1990년)
지금은 네팔에 있는 큰 오빠의 글을 옮겼다.
내일이라도 가을이 깊어가는 내린천으로 떠날 수 있다면....
더 깊은 계곡에 발 담그고 큰 오빠가 덧없이 비운 소주병 하나 있고
말을 이어줄 좋은 친구 옆에 있다면 가을 오는 소릴
끝없이 들을수 있을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