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권환
오늘은
기어만
간판이 떼이고 말았다.
오 년 동안이나 셋집으로 을러메어 다니던 이 간판이
오 년 전 그 때의 ××부원 지금은 서울시 ×××고 있는 박(朴)이 손수 쓰고 간
그 굵다란 먹 글자가
벌써 바람에 스치고 비에 씻겨 희미하게 된 이 간판이
오늘은 기어만 떼이고 말았다.
그리고 또 집이
기어만 닫기도 말았다.
이태 동안을 몇 번이나 집임자한테 쫓겨 들어간 이 집이!
낡은 테이블 한 개 의자 한 개
옛 벽에 차개 걸린 ××포스터 밖에 없는
초가 이 칸 다 헐어져 가는 이 집이!
괭이 지게를 문밖에 세워 두고
먼지 떨어지는 머리들을 맞대어 가지고
우리들의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이 안에서 의논하던 이 집이
기어만 닫기도 말았다.
그렇지만 어린 동무들아! 늙은 동무들아!
두 눈은 왜 그리 동그래지고
맥은 왜 그리 풀어지나?
용감하게 끝끝내 할 일을
석 자도 못 된 이 나무 조각 간판이 떼어졌다고
이 칸밖에 안 된 이 낡은 초가집이 닫겨졌다고 못할 것은 없는데
먹 글자 쓰인 간판이야 같건 말았건
나무 간판 달린 화관집이야 있건 없건
용감하게 끝끝내 할 일을 못할 것은 없는데
(『조선일보』, 1933. 6.22)
[어휘풀이]
-기어만 : 기어이
-이태 : 두 해, 이 개년(二個年)
[작품해설]
권환은 계급문학 운동을 펼친 카프의 맹원(盟員)으로, 그의 시작(詩作)
목표는 노동자, 농민의 의식 함양과 더불어 일제의 폭압에 맞서 치열한 투
쟁 의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이 시가 발표된 1933년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카프가 그 활동을 거의 멈추었던 시기로, 이 시는 바로 그 같은 상황
하에서의 계급문학 활동의 어려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화자와 청
자가 분명히 드러난 소통 구조를 지닌 까닭에 강한 화자 지향성을 갖고 있
다. 또한 이 시의 중심 소재는 정신의 지주였던 ‘간판’이 외부의 압력으로 강
제로 떼이게 된 사건이며, 작품 창작 모티프는 이 사실에 대한 화자의 울분
을 토로하고, 그러한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자는 동지들에
대한 격려와 스스로의 다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간판’은 화자를 중심
으로 한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간판’은 단순한 나무 조각에 머무르지 않고, 화자를 비롯한 동
무들의 가치와 이상이 결부된 상징물이자 온갖 어려움을 함게 해 온 대상물로
의 성격을 갖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간판’이 겪은 고난사는 바로 ‘우리들’의
고난의 활동상을 표현한 것으로, 이 ‘간판’의 외부적 탄압은 곧 ‘우리들’의 활동
에대한 외부의 탄압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부의 탄압에 대해 화자는 ‘기어만
떼이고(닫기고) 말았다’라는 진술의 반복을 통해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울분에만 잠겨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기에 화자는 새로운
전환을 준비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간판’의 가치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진다. 이미
‘간판’이 떼이고 없는 상황에서 ‘간판’에 대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떼인 ‘간판’을 한갓 나무 조각에 지나
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물론 그 ‘간판’을 붙일 수 없다 하여 자신들이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소개]
권환(權煥)
본명 : 권경완(權景完)
1903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일본 교토 저국대학 독문과 졸업
1925년 『학조』에 처음 작품 발표
1929년 『학조』 필화사건으로 일제에 구금. 이후 사회주의 문학운동에 투신하여
『무산자』 발간에 참여
1930년 임화, 이북만 등돠 함께 볼셰비키화론 주도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때 불기소 처분을 받음
1935년 카프 제2차 검거 때 유죄판결 받은 후 집행유예로 석방됨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기자 역임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의 농민문학 부위원장 역임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됨
1954년 월북하지 못하고 남한에 남아 있다가 6.25 직후 마산에서 폐병으로 사망
시집 : 『자화상』(1943), 『윤리』(1944), 『동결』(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