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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7일 금요일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좋음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20,10-13
† 복음 요한 10,31-42
◈ 오늘의 묵상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 이유는 그분을 ‘신성
모독자’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의
행동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으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여 일하고 계시는 당신의 참모습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진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뒷부분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으며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고 계신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와 폭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전쟁과 폭력이 주는 해악에 대해서도 반성하게 됩니다.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을 존중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주장과 판단은
한계를 지닙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밝혀집니다.
신앙인은 온유와 겸손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목숨의 위협과 박해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체득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2017년 가해 4월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어떤 광고에서 보았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오빠, 나 요즘 살 찐 것 같지?”
이 질문에 남자 친구는 망설이면서 “쪼금”이라고 말하지요. 그러자
여자 친구는 화를 내면서 “쪼금? 뚱뚱한 여자랑 다녀서 되게 힘들겠다.
우리 헤어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고는 다시 처음 질문의 화면으로
되돌아가서 남자 친구가 다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번에는
“아냐, 옛날하고 완전 똑같아.”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러면
옛날에도 뚱뚱했다는 거잖아. 우리 그만 만나자.” 다시 광고는 처음
질문의 화면으로 되돌아가서 남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여자 친구는 다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잘 모르겠어? 오빤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어? 우리 그만
하자.”
과연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어떤 심리학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선 이야기의 정답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사랑해.”
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듯합니다. 실제로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은 그 너머에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고 또 들리는 질문 자체에만 매여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2천 년 전의 예수님 말씀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말만을 들으려했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을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가 있지요.
유대인들의 비난은 예수님께서 돌 맞을 짓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당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이 이렇게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인성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완고함을 깨드리기 위해서 당신께서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이 표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취한 적은 없었을까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고 단죄했던 적은 없나요?
분명히 옳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평가절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바로 이러한 완고함과 남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쫓아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행복은 결코 큰 데 있지 않다. 작은 것으로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법정).
광야에 세운 조지수도원.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 계십니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고고학자, 신부, 목동이라는 직업을 가진 세 사람이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에 갔습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협곡으로 유명하지요.
이 놀라운 경치를 보고서 고고학자는 “정말로 놀라운 과학의
경지로다.”라고 말했고,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작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목동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제기랄! 작품이고 나발이고... 소 잃어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네.”
서로 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 생각과 똑같을 것이라고 착각할까요? 그러한 착각이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조금 만 더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은 내 생각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야에 앉으니 참으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좋음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행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8)
좋음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행복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사람들의 멸시와 모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소명을 주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절규합니다. 그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찬미하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수난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10,31).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았다며 시비를 걸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5,18; 10,33). 사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11,48-57 참조).
예수님께서 시비를 걸고 죽이려드는 유다인들에게,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10,32)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일 하신 것’은 인정하면서도, 결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며(10,33) 완고한 태도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태도에 답답하신 나머지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10,38)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거듭 초대하십니다. 모든 선(善)은 선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자기 민족만을 구원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관념 속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들은 모든 이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열린 창조의 하느님’, 좋은 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편견과 기득권에 집착한 그들 안에,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은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지요.
오늘 나의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서로에게 무심코 던지는 모진 말,
상처를 입히는 행동, 무관심, 불신, 보복하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이 던지려 했던 돌멩이들입니다(10,31). 나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언제든 무심코 던진 비인격적인 말 한마디, 냉정한 태도, 왜곡된 시선,
부정적 비난, 자기중심적인 감정표현 등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고 엄청난 상처를 줄 수 있지요. 이제 우리 모두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고, 주님을 슬프게 하는 돌을 내려놓으며, 예수님께
달려가야겠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을 “모든 선이시고 으뜸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분”(시간경마다 바치는 찬미)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하실 좋은
뜻과 좋은 말, 좋은 일, 좋은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떠 그 좋은 것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선을 보고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진정 신성모독임을 되새겨야겠지요. 오늘도 부정의 눈길과 말과
행동을 멈추고, 좋은 일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오늘도 주님께서는 거부당하시고
2017년 가해 4월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요한 10,31-42)
오늘도 주님께서는 거부당하시고
볼일이 있어서 번잡한 중심가에 차를 몰고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차도
큰데다가 너무나 번잡한 동네여서 주차공간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목적지를 지나 블록을 몇 바퀴나 돌다가 아주 반가운
입간판을 하나 만났습니다. ‘○○ 천주교회’
‘이게 웬 떡이냐?’하며 성당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꽤나 협소했지만
마침 여유 공간이 있어 멋진 폼으로 후진 주차를 할 때였습니다.
사무실에 앉아계시던 형제님이 비호처럼 달려 나오셔서 제 차 앞을
가로막더니 팔로 크게 ×자를 긋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이 근처에 긴한 볼일이 있어 그러는데 잠깐만
주차하면 안 될까요?” 그런데 도통 제 말이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그런데 제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안됩니다. 빨리 차 빼주세요.” “저는 살레시오회
신부다. 어디 산다.” 아무리 저를 설명해도 그분은 제 말을 절대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저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몰고 간 차는 1톤 봉고
트럭이었습니다. 짐칸에는 축제물품이 가득 적재되어 있었습니다.
백미러로 제 모습을 바라보니 책임감 강한 그 형제님 심정이 백번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누군가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 내 말이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위에서 왔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 앞에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마다 비웃음을 던졌습니다.
철저한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끝끝내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다인들의 모습,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자신들의 발로 차버렸습니다. 거의 다 잡은 대어를 눈앞까지 끌고
왔다가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맞이하는 예의 없고 몰지각한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히 환영해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완전 개무시했습니다. 갖은 협박과 완력으로 그분을 궁지로 몰고
갔습니다. 그분을 살상하려고 손에 큰 돌들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으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을 자신들의 손으로 저질렀습니다. 끝끝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처절한 파괴와
멸망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동족들에게 당하셨던 것처럼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주변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의 독선과 교만으로 인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수모와 박해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두 손으로 예수님을 성전 밖으로 밀쳐내고 벼랑
끝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7년 가해 4월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 10,31-42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습니다. 3년이 지났고 세월호는 인양되었습니다. 세월호와
관련된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짧은 노래였지만 강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2017년 4월 16일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습니다. 3번이나 넘어지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도 여러분을 향한 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은 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위는 단단하고, 계란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계란이 함께하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민심은 천심이고, 천심이
함께하면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드러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작은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나라’는
마치 계란과 같았습니다. 율법과 전통으로 바위처럼 단단해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로마와
손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던 대사제와 빌라도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하셨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빛을 보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르침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통념과 기준을 과감하게 허물었습니다. 죄인들로 여겨지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에게 율법의 참된 뜻을
가르쳐 주었고, 지탄을 받았던 세리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을 하고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수업료도
받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사람들에게 진실과 진리를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예와 권력을 향해서 무한 경쟁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미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로 왔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랑을 원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려던 예레미야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라도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검찰과 판사가 되어서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합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예수님을
고발하고 재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중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자선, 희생, 선행은 힘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는 나눔, 사랑, 봉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 발,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비우면 더 큰 것으로 채워지는 신비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나를 비우면 더 큰 것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 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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