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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소통, 혹은 다양한 층위의 표현
[시사사 리뷰]
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 강인한
진안(鎭安)에서/ 김규진
꿈의 대화/ 장석원
떠도는 문장/ 정푸른
분열하는 가위/ 이담하
1. prologue
건축물을 짓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축설계도면과 목수이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소쉬르(Saussure, F.)의 기호연산식에 따르자면 기의(記意)가 기표(記標) 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한다. 이런 논거를 전제로 하여 말하면 건축설계도면은 외계에 의해 인지된 의미 표상을 대체하는 형식으로 시니피앙(signifiant, 記標)이거나, 또는 건축의 결정사항이나 지시사항일 뿐이다. 더 이상의 융통성이라는 것은 없다. 더 이상 빠져 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억압이며,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즉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만을 가질 뿐이다. 예를 들면 건축설계도면에 H빔으로 건물기둥을 세우라고 어떤 기호로 표시 되어 있다면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됨이 없이 그대로 치수대로 시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언어학에서 말하는 시니피앙, 즉 기표가 건축설계도면이다.
목수는 건축설계도면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개념이 언어에 의해서 표시된 표상체로서 말에 있어 소리로 표시되는 의미를 지닌 시니피에(signifie)와 같다. 즉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인 것이다. 가령 ‘냇물’이라는 시니피앙은 어떤 의미, 즉 이미지를 상기시킬 수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설명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그 까닭은 ‘냇물’이라는 개념은 시내, 강(江), 내(川)와 같은 또 다른 시니피앙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수는 건축설계도면에 표시된 H빔을 세우되, 제품을 생산한 회사, 그에 관계되는 가장 적합한 어떤 종류의 H빔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에겐 선택할 권한과 자유는 무한정이다. 기둥의 크기, 길이, 너비 등은 기표로서 더 이상의 다른 재로로 대체가 불가능하겠지만 건축의 모양과 색깔, 무늬 등의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것은 목수의 생각(사유)에 달려있다.
목수와 건축설계도면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두 개의 개념이 지니고 있는 역할에 대해 명확히 구별 짓기 위함이다. 건축설계도면과 목수를 놓고 볼 때 전자는 시의 구조가 될 뿐 시인은 될 수 없다. 그러나 목수는 시를 짓는 시인으로서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목수가 지니는 사유로부터 미의 창조가 시작된다. 건축설계도면은 원으로 된 창문을 만들라고 할 뿐 창틀에 꽃무늬를 입히고, 스테인리스 유리창을 끼우고 하는 것들은 목수의 생각(사유)에 달려 있다. 건축설계도면은 시를 지을 때 필요한 형식을 제공할 뿐 어떤 내용의 시를 지으라고는 할 수 없다. 시어의 선택이라든지 사유의 방향이 서정적이든 서사적이든, 아니면 아방가르드를 추구하든, 모더니즘을 시도하든, 아니면 키치든 그것은 순전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목수에게 있다.
본 글에서 지난 1~2월호에 실린 《시사사》의 신작시 코너에 실린 다수의 작품 중에서 특별히 제 각각 색깔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오인오색의 시작품을 선별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2. 다섯 갈래의 목소리
금년에 출간된 《시사사》 1~2월호의 신작시 코너에 다성 담론의 시작품들이 무성하게 실려 있었다. 각각의 시작품들은 원색의 빛깔로 제 모습을 소리 높여 노래했다. 어떤 시인은 은유적 목소리로, 어떤 시인은 성찰의 목소리로, 누구는 스토리형식의 서사적 목소리로 《시사사》의 시적 수준을 가일층 높였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다섯 편의 시작품을 선정하는 데에 많은 고심이 따랐다. 그중에서 선별의 기준은 독특한 제 목소리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을 선정했다. 그 작품들은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과 김규진 시인의 「진안鎭安에서」, 그리고 정석원 시인의 「꿈의 대화」 와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 이담하 시인의 「분열하는 가위」이다. 이 다섯 작품의 고유한 색깔의 목소리를 다시 리뷰 하고자 한다.
*강인한 : 풍자-악의 교정
알레고리(allegory)의 어원인 ‘allegorein’은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것은 형식적 차원에서 보조관념만으로 원관념을 드러낸다는 점은 상징과 유사하다. 주지하다시피 풍유(諷諭, allegory)는 의도하는 본래의 의미는 숨기고 다른 또는 이야기를 내세워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비유법이다. 즉 사실에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약간 빗대거나 에돌리면서 독자로 하여금 수긍하게 하는 비유법이다. 그러므로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작품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상징과 유사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풍자·비판·교훈성을 적극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징과 사뭇 다르며, 상징에 비해 의미의 진폭이 일천하다. 게다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다의적이지 못하고 일의적이라는 다른 면도 가지고 있다.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은 풍자와 비판을 핵심으로 하는 시작품이다. 물론 교훈성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풍자(諷刺)·비판·교훈 중에서 풍자는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나 인간들의 결점, 또는 모순 등을 빗대어 비웃으면서 비판한다. 그렇다면 풍자문학이라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에 관하여 조롱, 멸시 등의 여러 정서 상태를 통해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문학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제를 전제로 하여 다음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밤 그 여자의 하얀 레이스 달린 파란 실크 잠옷 그림자가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침실 창문에 검정나비 실루엣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피폐해진 주민들의 안녕 위로 사금파리가 싸락눈처럼 한 줄 두 줄 아프게 흩날리는 그 시간. 잿빛 어두운 마음의 문을 열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 차가운 손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내게 당신의 피를 넣어주시면 당신을 주인으로 섬길게요. 붉은 가방을 손에 들고 여자가 자신에게 날아온 동박새를 도끼눈으로 내쫓으며 말했다. 저리가, 가버려. 가방의 아가리는 이를 악물고 닫혔으나 벌어진 지퍼의 잇바디 사이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한 연기는 뱀의 혀처럼 갈라져 주민들의 한두 가닥 가냘픈 희망을 단숨에 빨아들였다.
리아스식 해안 가까운 바다에서는 날마다 빈사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허옇게 배를 내밀고 떠올랐다. 안간힘을 써서 검은 수면 위로 뛰어올라 그 여자가 손짓을 하면 물고기들은 가끔씩 날개 달린 뱀처럼 날았다. 죽은 아버지의 망령도 그 틈에 끼어 선글라스를 쓰고 날아올랐다. 신화 속에서 끄집어 낸 시간의 비늘들은 단단한 쇠줄로 꼬여 그 여자의 믿음직한 허리띠가 되었다. 그 여자를 에워싼 제국의 부로들이 구세주를 대하듯 엄숙히 가스통을 어깨에 메고 나서는 아침, 그들의 빨간 내복에 여자가 손키스를 뿌리자 제국의 겨울은 일제히 바닷가 검은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강철같이 뭉쳐진 제국의 겨울은 불타는 돌멩이가 되어 가망 없는 미래에 연합하기 위하여 허공을 날아갔다.
장난감 공룡을 손에 든 채 태어난 차세대의 아이들은 엉덩이에 벗을 수 없는 형극을 문신으로 두르고 불온한 소문의 식물로 성장했다. 그 밤에 저주받고 태어난 아이들은 아홉 개 꼬리를 가진 붉은 여우의 울음을 좇아 몽골의 사막으로 떠나갔다고도 하며 일부는 페리호를 타고 후쿠시마로 떠났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돌려줘, 내 피를 돌려줘. 여자의 이름은 소리쳐 부르다가 죽은 아이들은 타다 남은 약속의 숲에서 흰 숯으로 발견되었다. 번쩍번쩍 손을 들어 번개를 내리칠 때마다 그 여자의 증오심은 청동 지붕에서 유황연기를 피워 올렸고, 깊은 새벽이면 행복한 신음을 흘리며 핏발 선 눈이 항상 지상을 두리번거렸다.
-강인한,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 전문
풍자나 우화는 서로 유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세태풍자란 점이다. 이 같은 풍자가 가져다주는 결론은 ‘사회적인 공리’-‘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 끝난다. 이 결론이 보편적 타당성을 얻기 위해 이야기 속의 복선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의 머리에 이미 들어 있는 감정이나 상식을 활용한다. 그러나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은 조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달리 설명하자면 시인 자신이 이성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원초적 감정들을 풍자하고 있다. 즉 본능적이며 자기 부정적 감정이 우세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그의 시는 시적 진술을 하는데 있어서 미의식보다는 직관에 의한 풍자를 앞세우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9세기 초엽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그 당시 사대부 계층인 양반 귀족들의 부패와 부조리, 그리고 부도덕성과 죄악상, 비인도성을 폭로하고 풍자한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시작품들이 종은 예라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반항과 울분을 특유의 해학으로 쏟아낸 그의 풍자시는 특히 사회의 부조리를 배경으로 한다. 대표작으로 육담풍월(肉談風月)과 언문풍월(諺文風月)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강인한 시인은 해악이나 위트, 골계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매우 교훈적이다.
풍자시에 대해 오규원은 “시 속의 어떤 사물이나 구체적 정황이 숨겨진 관념을 전달하는 형태를 관념의 풍유(allegory of ideas)”라고 정의한 바 있다. 위의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 중에서 ‘내게 당신의 피를 넣어주시면 당신을 주인으로 섬길게요. 붉은 가방을 손에 들고 여자가 자신에게 날아온 동박새를 도끼눈으로 내쫓으며 말했다’는 부분을 주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들이 바로 관념의 풍유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관념과 인간생활에 대한 합리적 의식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흔히 풍자는 해학과 결부시켜 설명되는데 풍자의 웃음이 공격성을 띠는 데에 반해, 해학의 웃음은 연민을 유발하는 점이 서로 다르다.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의 시는 전개해 가는 스토리 그 자체가 풍자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알레고리라고 하는 이유이다.
또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은 과거에 대한 회고적 성격이나 현실체제에 대한 불만을 관찰자적 수법으로 표출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조망을 예시하는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또 강력한 경계와 고발로 다른 일반적인 시작품에 비해 의미부여가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그만의 고유한 시작품의 특질을 표상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증오심은 청동 지붕에서 유황연기를 피워 올렸고, 깊은 새벽이면 행복한 신음을 흘리며 핏발 선 눈이 항상 지상을 두리번거렸다’고 했다. 이 시구에서 ‘행복한 신음’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매우 역설적인 풍자로 들리는 대목이다. 이런 부분들이 풍자하고자 하는 관념에 빗대어 비웃음으로써의 비판이다.
다른 측면에서 강인한 시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유도하고, 참다운 삶의 가치와 실천이 어떠한 것인가를 교훈적으로 들려준다. 이것은 윤리적 가치의 공유와 그 실천을 절대 권유하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풍자성이 담보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들은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강인한 시인은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 앞세워 현실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을 통하여 ‘사회악을 교정’하는 중이다.
*김규진 : 해체-노마드(nomad)적 사유
포장도로가 문화와 예술의 혼합이라면, 길은 자연과 철학의 합금이다. 이 같은 명제를 받아들일 때 김규진 시인은 「진안鎭安에서」를 통해 길의 존재와 인간의 삶과는 독립된 실체임을 증명하며, 그런 가운데에서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동일성의 원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길의 세계에 대한 독자들의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이해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길은 자연이요, 자연이 길임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에겐 또 길이 삶이요, 삶이 길이다. 또 자연이 길이요, 길이 자연이라는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가치를 우리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인간은 자연철학과 나눌 수 없는 연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 길은 어떠한 것이든 이동의 공간이다. 길은 천·지·인(天·地·人)의 모두에게 있다. 하늘에는 항로와 천상의 계단(내적인)이 있고, 땅에는 오솔길, 신작로, 포장도로, 언덕길 등이 있다. 심지어 바다에도 바닷길이 있다. 심지어 허공도 바람들이 흐르는 강이면서 동시에 길이다. 그러나 인간 내부에는 어떤 길이 존재할까. 바로 이 인간의 삶속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길, 그 길이 무엇인가를 진술하는 김규진 시인의 「진안鎭安에서」를 살펴보자.
까마득한 산촌에
목판화木版畵 같은 밤이 온다.
밤이 되면 모든 길들은 돌아간다.
어떤 길은 신발을 끌며 천천히 골짜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들어가 낙엽을 덮어 눕고,
어떤 길은 생선 몇 토막 흔들며 게딱지 엎드린 지붕 밑으로 사라진다.
어둠보다 늦게
고단한 길 하나는 개울에서 황톳빛 하루를 씻어내고 냉갈내 나는 마을을 바라본다.
네온 아래 헤매임 없는 곳.
밤이 되면 모든 길들은 아침에 걸어 나왔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길섶의 들꽃만 저희들끼리 남겨져
시린 어깨를 부벼댄다.
불이 켜지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소리 들리고
아홉시 뉴스의 쌀값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어떤 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오늘 오후, 산기슭에 묻힌 늙고 구부러진 길 하나도 있었다.
서편에는 사과조각 같은 하현달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산등성이.
하나둘씩 불빛 가라앉고
어떤 길은 한숨으로 홑이불 같은 어둠을 눈썹까지 끌어올리고
어떤 길은 슬금 다가오는 술 취한 손을 팽하니 뿌리치며 돌아눕고
어떤 길은 옹이진 다른 길은 껴안으며
새삼 불룩해진 아랫배를 쓰다듬는다.
─이 길은 어디를 걸어갈까
이 길도 나처럼 힘겨울까
슬픔도 기쁨도 하나인 듯
어둠속에서는 결국 한 색깔이 되고
부다다다다─.
갑자기 광포한 다다이즘처럼
낄낄대는 파란 길들이 어둠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간다.
갈라진 어둠을 황급히 뒤 채우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꽁꽁한 어둠.
문득, 오늘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길 하나가 부스럭 일어나
길게 깜박이는 불빛 하나를 밝힌다.
하늘에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팔을 뻗는 별자리들.
문득, 손 놓친 별 하나
밤하늘에 사금파리처럼 날카로운 금을 긋고.
*다다이즘(Dadaisme) : ‘다다’는 ‘아무 뜻이 없다’는 말. 1차 대전 말 모든 가치와 질서를 부정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운동
-김규진, 「진안(鎭安)에서」 전문
길이란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땅 위에 존재하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뜻한다. 이런 정의는 단순히 사전적 정의에 포함된다. 그러나 김규진 시인은 ‘어떤 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고 다르게 말한다. 이 메시지는 인간내면의 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경구와 같다. 이를테면 운명의 길이며, 죽음의 길이며, 현세 우리들의 삶의 길이며, 그리고 타락의 길과 욕망의 길이다. 달리 말하면 누구에겐 황폐한 길인 반면 누구에겐 꽃길일 수도 있다. 또 어떤 길은 악취가 진동하는 길인가하면 어떤 길은 가로수가 있고, 그 나무에 새들이 지저귀는 길이다. 따라서 길은 삶의 그 자체이며 통로이다. 그리고 역사와 함께 늘 뻗어있다. 길은 역사를 담고 있는 필사본이다. 또 우리들의 삶이 표출되는 자연과 철학의 집합체이다.
김규진 시인에겐 ‘아홉시 뉴스의 쌀값 떨어지는 소리 들리’는 일도 길이다. 이 쌀값 떨어지는 소리에 ‘어떤 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쌀값 떨어지는 소리에 ‘오늘 오후, 산기슭에 묻힌 늙고 구부러진 길 하나’가 생겨나기도 한다. 김 시인이 사유하는 길은 삶과의 동일성 증명이고, 모든 인간의 아우성이다. 그러므로 ‘어떤 길은 슬금 다가오는 술 취한 손을 팽하니 뿌리치며 돌아눕고/어떤 길은 옹이진 다른 길은(을?) 껴안으며/새삼 불룩해진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아직도 끝이 어딘지를 모르는 자신의 길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길은 어디를 걸어갈까
이 길도 나처럼 힘겨울까
김규진 시인은 일찍이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밤이 되면 모든 길들은 아침에 걸어 나왔던 제자리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면서 또 묻는다. 결국 성경구절처럼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길을 통해 태어나고 길을 통해 죽어간다. 세월이 흘러 ‘밤이 되면 모든 길들은 돌아’가는 반면에 ‘문득, 오늘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길 하나가 부스럭 일어나/길게 깜박이는 불빛 하나를 밝히’는 일도 있다. 극히 자연의 섭리이고, 이치이지만 그러나 김규진 시인이 말하는 길은 그 이상의 무엇을 담고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상징을 통해 독자들에게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정신세계를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길’의 의미를 해석하는 진술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길의 의미가 이런 것이라는 주장이겠지만 내면적으로 독자들에게 수용의 태도를 권유한다. 때로는 회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것, 때로는 필연적인 탄생의 환희,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애환을 수용하라는 권유이다. 어찌 보면 통속적인 표현 방법이거나 진부한 소재의 선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진안鎭安에서」가 독자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은 두 가지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다름이 아닌 ‘길섶의 들꽃만 저희들끼리 남겨져/시린 어깨를 부벼댄다.’는 표현에서 이해하듯이 성찰이다. 즉 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성찰이라는 숲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찰이란 무엇인가. 가톨릭대사전에 따르자면 ‘고해성사를 받을 준비를 할 때 먼저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자기 양심을 살피어 죄를 범한 것들을 생각해 내는 일이며, 사랑의 계명이 금하는 바를 감히 행함으로써 범한 죄뿐만 아니라, 그 계명이 명하는 바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잘못도 반성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이 아닌 ‘길섶의 들꽃’들이 어깨를 맞대고 산다. 우리는 지금 이웃과 어깨를 맞대고 사는가.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피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들을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하나’라는 시구이다. 그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 관계를 해체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계층구조의 타파와 다원주의의 흡수이다. 한편으로는 두 개의 단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주체 및 경계의 해체이다. 다시 말해 슬픔과 기쁨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정의와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가령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 표현의 하나이다. 이것은 탈력감, 실망감이나 좌절감을 동반하고 가슴이 맺히는 등의 신체적 감각과 함께 눈물이 나오고, 표정이 굳어지며, 의욕, 행동력, 운동력 저하 등이 관찰된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말로 할 수 없는 소리를 내어 '우는' 행동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다. 행복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의 기쁨은 긍정적인 피드백 매커니즘으로 기술된다.
이렇듯이 두 개념은 확연히 다른, 그리고 별개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규진 시인은 두 개의 개념을 동일한 성질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김규진 시인을 바로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로의 통합이며, 결코 파괴가 아니다. 또 무엇인가를 조형하는 행위는 근본 바탕을 풀어 헤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로 결론이 나버린다. 즉 기존의 입장을 답습하는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행위로는 결코 진정한 창조를 이루어낼 수가 없다는 김규진 시인의 남다른 예술정신이다. 따라서 ‘슬픔’과 ‘기쁨’을 해체하려는 그을 단지 파괴라는 부정적인 면을 넘어 긍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약하면 김규진 시인이 의도하는 해체는 단순히 파괴하고 분리하고 떼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그래서 하나로 통합되는, 이 통합에 의해 새로움을 창조해 내려는 행위로서의 해체이다. 곧 해체가 새로운 건설이다.
해체주의의 사유가 발아된 상태에서 그가「진안鎭安에서」를 노래했다면 더더욱 해체주의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3가지로 구분한다. 먼저 절충주의가 있으며, 두 번째로 탈형식주의, 세 번째가 콜라주 개념이다. 절충주의는 기존의 형태를 파괴하거나 단순한 형태로 조합, 중첩, 회전 등을 시키며, 다양한 의미를 담아낸다. 또 탈형식주의는 결과물들이 하나의 공통된 모습을 가지지 않고 각각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양식화된 틀에 얽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콜라주 개념은 단편화된 이미지를 조합하는 개념이다. 부연하면 역사적 이미지, 다양한 이미지를 단편화 시키고, 이를 재구성하여 혼성의 상태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에서 발생된 것이다.
해체주의에 특징을 요약 정리하면서 김규진 시인은 절충주의에 입각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슬픔’과 ‘기쁨’이라는 단순한 개념을 ‘슬픔이 기쁨의 하나’라는 중첩내지 조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김규진 시인의 길은, 아니 우리들의 길은 고향에서 등 떠밀려 나온 뒤 계속적으로 ‘가고’, ‘떠나고’, ‘비우고’, ‘미끄러지고’, ‘흐르고’, ‘지워지는’ 방랑의 운명 그 자체로 존재한다.
*정석원 : 반복-그리고 차이의 생성
우리들의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다. 아침이면 해가 반복적으로 뜨고, 저녁이면 반복적으로 해가진다. 달이 반복적으로 뜨고 지고, 반복적으로 절기가 찾아오고 간다. 매양 아침마다 아침식사를 반복적으로 섭취하고, 어두워지면 반복적으로 수면을 취하기 마련이다. 다만 반복의 질료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어제 저녁은 밥을 먹었다면 오늘 저녁은 빵을 먹었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이런 유(類)의 물질적이고 헐벗은 반복은 차이를 낳지 않는다. 결코 낳을 수가 없다. 일상성은 반복이 반복을 낳을 뿐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그러나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이 두 반복은 내적이며 풍요로운 반복이다. 곧 내적 반복과 외적 반복의 구분은 차이를 낳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 외적 반복은 재현에 불과하다. 재현은 창조성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 과학은 반복이 가져다주는 질서를 거느리고, 그것은 다시 탐구의 기본적인 근간이 된다. 그러나 내적 반복에서는 외적 반복과는 다르게 반복이 내적 존재들로 수축하면서 질적인 차이를 생성한다. 이것이 정석원 시인이「꿈의 대화」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차이의 생성이다. 이런 점이 그의 꿈의 대화」를 리뷰하게 된 이유이다. 따라서 그는 반복과 반복 사이에서 무엇을 추출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의 시를 살펴보자.
여기 수기한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제어하는 공통의 것입니다
진입합니다 손을 놓지 마세요
동지의 흉곽, 상자 속에 누운 내가 보여
쓸린 가슴과 외로운 등, 그 누가 사랑하는 목덜미
위선과 정치에 대해
나는 말한다, 소년의 이름은 희였다 발자국이 되려고 했다 칡소가 일어설 때까지 누워 있었다 그는 엉겅퀴처럼 눈을 뜨고 한 발 한 발 국가를 분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진했다 의지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권력과 투쟁에 대해
다른 나는 말한다, 정육점은 벌써 닫혔어요 안에 고기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샀어요 우리에게는 잡아먹을 것이 많아요 육즙이 풍부한 살점을 나눠 드시죠
폭동과 현실에 대해
나는 다시 말한다, 당신의 말을 탔어요 같이 탔어요 활성탄처럼 욕망이 달그락거리고 말 위의 두 두상도 행복했죠 근육이 생기려고 했어요 우리의 책임은 무한해요
눈물과 봉기에 대해
제3의 나는 말한다,파란 자두가 매달려 있구나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릴게 우리의 단결과 우리의 패퇴 우리의 결탁 도가니 속에는 삶의 커다란 욕구
푸딩과 한 여자 기라지 거라지 미라지 더럽고 숨가빠
나의 복수들이 말한다, 최초의 영양분을 준 권력자의 가슴팍에 슬픔이 피어오르네 두 아이의 아버지라지 나는 흐믈거리는데 그는 게맛살답네 사랑과 굶주림이 만나 자두는 붉어졌지 정말로 져버렸지 버러지가 파먹었지 육체에 구멍 구멍 그곳에서 근원이 기립했고 독재자는 돌아오고 나의 울음 후엔 부스러기
파괴와 건설에 대해
나는 말한다, 순종하라 나의 순정한 순록들이여 껍질을 벗겨 내가 피륙으로 쓰겠다 맹인의 성기 앞에 앉아 있는 그녀도 맹인인데 그녀가 나를 보고 있네 볼 수 없는데 큰 것을 보는 능력 그녀가 나를 뚫었네 피가 줄줄 샜지 배경에서 내가 분리되고 스며들고 화려해지고 나는 사라지고 나는 붉은 점이 되어 떨어지고 선연한 것 그녀의 송곳
모국과 사회에 대해
우리가 최후로 말한다, 망치 낫 그녀의 내부에서 흘러내린 붉은 제국의 동토 들어차는 맹인의 육체 냄비 빗자루 슈크림빵 빵꾸 난 약속 거덜 난 지갑 벌어진 입 찢어진 옆구리 스테인레스 스위스 소망원의 은사시나무들 수다의 은사시들 오후 네 시에 발언하는 잎사귀들 지저귀는 잎새들 민중의 입 우리들의 구순구개열
-정석원, 「꿈의 대화」 전문
위의 정석원 시인의 「꿈의 대화」를 보면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미끄러지고 또 횡단한다. 주지하듯이 ‘위선과 정치에 대해’에서부터 시작하여 ‘모국과 사회에 대해’라는 그의 시가 끝날 때까지 일관되게 ‘~대해’라는 말을 반복한다. 들뢰즈가 말하기를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고 했듯이 반복 속에서 그는 차이를 낳는다. ‘위선과 정치에 대해’, ‘권력과 투쟁에 대해’, ‘폭동과 현실에 대해’, ‘눈물과 봉기에 대해’, ‘파괴와 건설에 대해’, ‘모국과 사회에 대해’라는 시의 소제목에서 보듯이 정석원 시인은 반복과 반복 사이에서 차이를 낳으며, 횡단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렇게 그는 노마드(Nomad)적 사유로 「진안鎭安에서」를 끌고 간다. 이런 점이 한 곳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탈영토화이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매려는 일체의 코드를 거부하는 유목민의 모험과 도전정신의 사유를 표출한다.
유목의 길을 선택한 정석원 시인에게 공간이란 말뚝을 박아 금줄을 치고 기둥을 세워 벽을 만들기 위한 '기하학'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는 붙박이 문화 안에서 코드화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를 노래한다. 또한 유목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 삶이란 모험이자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끝없는 해방의 과정이다. 그가 ‘위선과 정치에 대해-국가를 분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진했다 의지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차이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한 질서로 이동하게 만든다는 점에 대한 강조이다. 그래서 가브리엘 타르드가 지적했듯이 변증법적 전개 역시 반복이다. 이 반복은 어떤 일반적 차이들의 상태로부터 독특한 차이로 옮겨가는 이행이며, 외적 차이들로부터 내적 차이로 향하는 이행인 것이다.
한편, 그가 「꿈의 대화」에서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며 다양성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서사)에 지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눈물과 봉기에 대해’의 부분에서 이성을 자기보존 수단이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독단의 세계로 인식하며 비판한다. 가령 ‘나는 말한다, 파란 자두가 매달려 있구나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릴게 우리의 단결과 우리의 패퇴 우리의 결탁 도가니 속에는 삶의 커다란 욕구/푸딩과 한 여자 기라지 거라지 미라지 더럽고 숨가빠’라고 비판한다. 이 시구를 읽으면서 일전에 소설을 영화화 <도가니>가 떠오른다.
정석원 시인의 「꿈의 대화」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은 대칭적인 구조를 가진 모더니즘과 다르게 비대칭적이다. 따라서 그의 시작품은 늘 열려 있고, 언제나 이어져 갈 수 있다. ‘~대해’, ‘~대해’, ‘~대해’라고 이어져 간다. 소위 열린시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것은 들뢰즈의 리좀(rhizome) 사유와 맥을 같이 하며, 현대적 사유의 주체로서 근대적 사유를 파괴한다. 그의 「진안鎭安에서」가 지니는 시적 사유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의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그리고’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심이 없는 장은 탈계층구조를 뜻한다. 이것은 다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고 언제나 탈주선(脫主線, ligne de fuite)이 흐른다. 이런 흐름을 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이 영토화는 탈영토화를 늘 힘겹게 누른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름 영토와 접속하여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탈영토화는 재영토화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 된다. 이같이 「꿈의 대화」가 앞에서 논의했던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반복하며 누수 되고 있다. 이를테면 ‘권력과 투쟁에 대해’라는 영토화는 누수로 인한 탈영토화로, ‘폭동과 현실에 대해’라는 재영토화가 반복되고 있다. 차이의 생성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정석원 시인이 추구하는 시세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정석원 시인은 리좀(rhizome) 사유를 통하여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형성하고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킨다. 이것은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일이다. 논의 한 바와 같이 ‘~대해’라는 반복은 ‘그리고’로 이어진다. 이런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위선과 정치에 대해’, ‘권력과 투쟁에 대해’, ‘폭동과 현실에 대해’, ‘눈물과 봉기에 대해’, ‘파괴와 건설에 대해’, ‘모국과 사회에 대해’-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출하는 장(場)이 된다.
그의 「꿈의 대화」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일깨워준다. 분절(화)(articulation), 또는 절편성(segmentation)이다. 여기의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tion)이라 함은 삶을 일정한 방식으로 분할하는 방식을 뜻한다. 즉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의 뜻’이다. 대부분의 사물들은 한 덩어리가 아닌,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分節)된 하나, 즉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대나무가 그 대표적이다. 이런 분절들의 개수와 분포가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 된다. 따라서 「꿈의 대화」는 몇 개의 마디를 가지고 있으며, 분절되어 있다. 이런 마디들은 우리들의 삶의 마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정석원 시인의 「꿈의 대화」는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어떤 요소나 경우들이 서로 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다시 말해 떨어져 있는 관계가 아니라, 내부로 수축한 차이로 이행하는 것이다.
또 정석원 시인이 「꿈의 대화」에서 분절화 또는 절편성을 시적 구조로 삼은 것은 시의 짜임이 느슨해지고 전지적 작가시점보다는 ‘나는 말한다’에서처럼 ‘나’라는 1인칭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현실감을 증대시키고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정석원 시인은 인습과 관습으로는 태양아래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예술의 극치를 이루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정푸른 : 블라종(blason)-여성의 몸
16세기 초·중반에 유행했던 여성 몸의 블라종(blason) 기법을 상기 시키는 작품이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이다. 이 블라종은 1535년경에 유행했던 것으로 에로틱한 풍자시의 일종이다. 이것은 16세기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유행되었다. 그 당시 시인들은 블라종 기법으로 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아닌 것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것은 몸이라는 신체에만 국한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인체의 일부는 마땅히 소재로써 사용되었지만 의상 장식(머리핀이나, 거울 등)도 대상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 시인 클레망 마로(1496~1544)가 쓴 「예쁜 유방」과 「추한 유방」은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블라종의 기법으로 여성의 신체 부위를 소재로 하는 시들은 어떠한 존재, 혹은 현실 풍자와 찬양하는 이중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 대상에 대한 끝없는 찬미와 찬송, 그리고 욕설과 비난이다. 그 당시 유럽의 시인들은 여성의 몸을 찬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시)을 블라종으로 보았고, 풍자적 비난을 반(反)블라종으로 보았다. 이런 형태의 글쓰기와 초현실주의가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과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보들레르, 셍 존 페르스 등이 즐겨 사용했던 블라종 기법에 대해 조윤경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몸의 상상력』에서 “블라종이라는 용어는 원래 문장(紋章)을 지칭했으나 더 보편적으로는 그것을 기술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규칙을 의미했다. 그 후 15세기 중엽 여성 몸의 블라종 기법이 문학 장르로 나타나면서 특히 1536~43년에 시인 마로에 의해 꽃을 피웠다. 또한 인체에 대한 지식의 진보는 블라종의 개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블라종에는 인체의 블라종, 반(反)블라종, 인체가 아닌 주제에 관한 블라종이라는 세 유형이 있다. 첫 번째 블라종은 여성의 신체 한 부위를 찬양하는 기법이며, 두 번째 블라종은 그것을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블라종을 하다blasonner’라는 용어는 상반된 두 의미,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난하다’, ‘비판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여성 몸에 대해 블라종 작가들의 모순되는 두 태도를 보여주는 이 동사는 서양 철학사에서 몸에 대한 가치부여와 평가 절하 사이의 끝없는 왕래를 반영하는 듯 보인다.”고 했다.
위의 글을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블라종은 프랑스어로 문장(紋章), 가문(家紋), 문장학(紋章學)이란 뜻이다. 혹은 (의자의 두 앞다리를 연결하는) 조각으로 장식된 가로재(材), 즉 16세기 시 형식의 일종으로 찬사, 비난의 표현에 사용하기도 했다. 영어로는 해럴드리(heraldry)이다. 그 유형으로는 첫째 인체의 블라종이 있고, 두 번째로는 반(反)블라종이 있으며, 세 번째로는 인체에 아닌 주제에 관한 블라종이 있다. 첫 번째의 것은 인체의 부위를 찬양하는 것이고, 두 번째의 유형은 인체의 부위를 폄하하는 표현을 말한다. 세 번째의 것은 인체의 부위를 폄하하지도 않으며, 그렇다면 찬양하지도 않는다. 곧 시의 주제로 삼을 뿐이다. 그러면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은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인체 부위를 찬양하지도, 그렇다고 폄하하지도 않는 주제에 관한 블라종이다. 앞의 글을 전제로 할 때만이 그의 「떠도는 문장」에 대해 온전한 평가가 될 수 있다.
고속도로는 질문을 유기하기 좋은 곳이다
세상의 고막을 향해 길을 떠나는 미아들
이 길은 세상의 긴 성대다
달리는 동안 나는 자음이고 모음이며
이지러진 말들의 비루한 모성이다
나는 속도와 내통한 여자
온몸이 성기인 속도를 끌어안고
산란하지 못한 질문들을 풀어낸다
하혈의 문장 속에 갇힌 토막 난 속내가
가로수에 걸려 미친 듯이 펄럭인다
스피커는 신생아처럼 찢어질 듯 울어대고
룸미러 속에서 먼 배경으로 멀어지는 허기진 질문들
구겨진 질문들이 세상 모든 구석을 떠돈다
나는 상행선과 하행선 사이 키가 자라는
분리대를 끼고 끝없이 달려간다
바람만이 행방을 아는 흩어진 행려의 날들
터널 속에서 어둠을 삼킨다
가시로 된 기도를 중얼거리며
피 냄새가 밴 페달을 밟는다
이 모든 것이 한 몸인 문장에 흰 꽃핀을 달고
창을 내린다
나는 삶이라는,
젖이 불지 않는 시간을 유기하고 있다
-정푸른, 「떠도는 문장」 전문
정푸른 시인의 시적 탐험은 자신의 몸과 맞닿아 있다. 즉 그의「떠도는 문장」의 시세계는 몸이다. 정 시인은 여러 질문을 통해 자신의 몸을 풍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질문하는 주제들이 신체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것은 몸과 풍경의 동일화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정적이면서도 매우 역동적이다. 폐쇄적인 것 같으면서도 개방적이다. 환대하면서도 도망가는 그의 ‘몸-풍경’은 시인 자신의 시적 자아로서 시세계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도로와 몸’을 ‘관계’ 내지 ‘결합’하고자 한다. 가령 ‘길은 세상의 긴 성대’라든지 ‘온몸이 성기인 속도’, 또는 ‘모든 것이 한 몸인 문장’이나 ‘피 냄새가 밴 페달’, 그리고 ‘젖이 불지 않는 시간’들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건대 그의 몸과 세계가 경계를 허물고 ‘질문’으로 확장되는 우리들의 존재 가치를 묻는 일이다.
누구든 삶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생성하고 변화하는 세계와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의무이다. 정푸른 시인은 자신의 ‘몸과 도로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생성하는 수많은 관계를 역동적으로 형상화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떠도는 문장」에서 어떤 무엇과 결합하려고 할 때 늘 여성의 신체부위가 동반된다. ‘성대’, ‘신생아’, ‘키’, ‘피’, ‘몸’, ‘젖’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결합하고 관계하려는 이유는 한 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건대 정푸른 시인은 다양한 질문을 통해 미완성의 몸을 완성 쪽으로 만드는 풍경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온몸이 성기인 속도를 끌어안고/산란하지 못한 질문들을 풀어’낼 때 ‘문장에 흰 꽃핀을 달고/창을 내리’고 있는 그는, 질문 속으로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산란하지 못한 질문들’이나 ‘룸미러 속에서 먼 배경으로 멀어지는 허기진 질문들’, 그리고 ‘구겨진 질문들’이다. 무엇이 산란하지 못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었으며, 또 허기진 질문과 구겨진 질문을 하게 했을까. 그것도 ‘젖이 불지 않는 시간을 유기하’면서 말이다. 그에겐 모든 것이 한 몸이다. ‘바람만이 행방을 아는 흩어진 행려의 날들’도, ‘하혈의 문장 속에 갇힌 토막 난 속내가/가로수에 걸려 미친 듯이 펄럭’이는 일도 한 몸이다. 길이 성대이고, 모성이다. 혹은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몸이다.
정푸른 시인이 이렇게 블라종 기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인상 깊은 강렬한 이미지와 극도의 긴장감을 일으켜 독자들을 흡입하기 위한 시적 전략으로 판단된다.
*이담하 : 분열-그리고 트라우마
현대는 분열의 시대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분업화가 오늘날의 분열을 가속화한다. 의학의 분열, 핵의 분열, 전문성, 핵가족, 심지어는 인간의 정신까지 분열하는 양상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분열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트라우마(trauma)이다.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이다. 외상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보상을 받고자하는 욕구 따위가 원인이 되어 외상과 관계없이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신체증상이 나타나는 심적 외상도 포함된다.
여러 시작품 중에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통해 현대인이 감수해야 할 삶의 무게,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업보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래한 시들이 많이 있다. 병마와 싸우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으로 시를 쓰는 시인도 있고, 불특정 다수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과 제도, 그리고 법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자행되는 교묘한 현대 사회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시를 쓰는 시인들도 있다. 이처럼 각각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아니면 개인적으로 병마와 시달린 트라우마를 가진 시인이든, 자신의 시 속에 트라우마를 용해시킨 시인들이 특히 `70~80년대에 주류를 이루고 왔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이 잘 대변해 준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이 격동의 세월이었던 점이 원인일 것이다.
시는 시인의 특별한 체험을 모티브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실로 시인들의 내면에 들어차있는 외상들이다. 이런 외상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입는 경우도 있지만 사소한 일로도 크게 받을 수도 있다. 이 트라우마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공존하는 외상 증후군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증상이기도 한다. 다만 시인은 그 트라우마를 시적으로 표출할 뿐이고, 시인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슴에 안고 있을 뿐이다. 이 트라우마는 정치적인 억압을 비롯하여, 소위 학교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는 왕따라든지, 성추행과 성폭력 등과 같이 심리적, 정신적, 경제적 등 모든 부분에 총망라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더 경계해야할 부분은 이것으로 인하여 무기력증과 자기부정, 현실감각의 퇴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의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이담하의 「분열하는 가위」는 전문용어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불리는 현대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던 아픈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간 해방의 역사라는 도덕적, 정치적 차원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시작품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한 편의 시를 감상하고, 그 감상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며, 우리들 주변에서 늘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분열하는 가위」가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는 이담하 시인의 증언과 인간 심리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력은 인간 조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몇 달째 거꾸로 매달린 비방
몇 겹의 종이를 접고 자르면 그만큼 분열하는 것
다산하는 뱃속에 가위가 있어
가족들도 결국엔 증식과 분열을 반복한다
단절과 외연을 지닌 가위
무뎌져서 병원에 보낸 지 여러 날 째
꽃을 자르거나 오릴 수 없다
무딘 날이 지나간 자리
뼈 없는 나비들이 꽃 머리를 들추고 꿀을 빤다
가위에 눌려 잠이 든 꽃밭
누가 붙인 벽보에서
이무치치 내한공연이 끝날 시각
두고 온 아이울음 소릴 내는 고양이의 불안으로
허영이 사라지는 봄
개업 때 들어 온 돈나무 대신 잡풀이 커가는 여름
지정거린 빗물이 새도 꼭 꽃잎에만 떨어지는
염병하게 추운 곳은 염병하게 더운 곳
어디선가 잔가시가 많은 생선 굽는 냄새
나와 나의 꽃처럼 습기와 곰팡이에게 붙들리려고
반지하로 들어온다
태어날 때부터 집을 갖고 있는 달팽이는 왜
축축한 이 집으로 들어올까
벽에서 포스터 떨어지는 소리
철모르고 핀 꽃들이 깨기 전에 꽃밭을 옮겨야 한다
-이담하, 「분열하는 가위」전문
위의 「분열하는 가위」 중에 2연의 ‘몇 겹의 종이를 접고 자르면 그만큼 분열하는 것/다산하는 뱃속에 가위가 있어/가족들도 결국엔 증식과 분열을 반복’하는 것은 가위의 이중적 분열에 대한 비판이다. 피하고 싶고 더 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는 두 가지의 길을 보여준다. 먼저 그 기억과 과거 때문에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항상 회피하고 싶은 공포로 만들어 간다. 그것을 어디에 ‘두고 온 아이울음 소릴 내는 고양이의 불안으로/허영이 사라지는 봄’으로 위안을 삼는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오히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단절과 외연을 지닌 가위/무뎌져서 병원에 보낸 지 여러 날 째/꽃을 자르거나 오릴 수 없다’고 분열하는 가위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하나는 가위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고 다른 하나는 무디어져서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자기 모순적인 정당성이다. 뱃속의 가위는 폭력성의 트라우마이고, 그로인해 가족들이 증식하고 분열하는 것은 이 지구를 떠받칠 종족번식의 본능을 이해하려는 정당성의 트라우마이다.
가위는 트라우마의 절대적 가해자이다. 이런 가위가 날이 무뎌진 것은 가위의 자업자득의 모순성이다. 트라우마를 위한 트라우마를 지닌 것이다. 이런 모순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가위를 병원으로 보낸 시적화자는 스스로 ‘어디선가 잔가시가 많은 생선 굽는 냄새/나와 나의 꽃처럼 습기와 곰팡이에게 붙들리려고/반지하로 들어’가고 있다. 이처럼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트라우마는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적 주체들의 욕망과 억압된 무의식, 피로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의문점은 ‘태어날 때부터 집을 갖고 있는 달팽이는 왜/축축한 이 집으로 들어올까’이다. 이것은 자기모순에 대한 성찰의 역설적 표현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의 잔혹한 힘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는 의식. 그리고 그 가면 뒤에서 끝없이 탈주를 꿈꾸는 욕망을 비판하고 성찰한다.
특히 한국의 여성들은 누구나 트라우마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 아직도 유교주의에서 비롯된 가부장제적인 권위의식과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히 여성들의 정신적 외상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시적화자는 밤마다 ‘가위에 눌려 잠이 든 꽃밭’이 된다. 가위는 부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으며, 꽃밭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가위에 눌린 밤이지만 꽃밭이 되는 자기모순을 숨김없이 표출한다. 이렇게 한국의 여성 시인들은 시 창작이라는 고양된 정신세계를 통하여 자신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트라우마를 표출하고 히스테리 혹은 신경증을 극복한다. 또 심리적 또는 정신적 억압이나 일상생활에서 오는 과도한 긴장을 풀어주는 해방 차원으로써의 시적 장치는 분열되는 현대사회에서 그것의 역할은 매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피하고 싶고 더 이상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 더구나 치료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이담하 시인이 「분열하는 가위」를 통해 이 같은 우리들에게 상기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자기모순에 대한 성찰이며, 둘째로는 시를 통한 자기구원이며, 우라들의 비루한 삶의 대한 구원이다. 이와 같이 시에서 구체적인 메시지가 분명할 때만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모두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3. epilogue
오인오색의 시편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시인들은 문학성 내지 작품성, 또는 예술성을 끊임없이 격상시키려고 일상 언어와 다른 형태로 시적 대상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시만큼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도 드물다. 이런 표현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이 상상력은 시인으로서 해야 할 시 쓰기의 1차적인 목표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력이 시쓰기의 1차적인 목표라고 해도 인간의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지금까지 논의했던 다섯 시편들이 다섯 색깔로 표현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인한 시인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에 관하여 조롱, 멸시 등의 여러 정서 상태를 통해 비판하고 고발하는 풍자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리아스식 해변의 검은 겨울」은 최초로 만들어냈다는 창작요소와 사물의 선악이나 시비, 또는 미추와 같은 것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비평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또 강인한 시인이 시도했던 풍자의 목적은 도덕성의 획득과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부조리에 대해 존 드라이든이 주장했던 것처럼 ‘악의 교정’으로 사회정의가 구현되는 것에 대한 촉구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지적했던 실천적 타성태(実践的惰性態)로써 불편한 국가적, 사회적 규범과 생활상, 심지어는 잘못된 제도로 ‘장난감 공룡을 손에 든 채 태어난 차세대 아이들은 엉덩이에 벗을 수 없는 형극을 문신으로 두르고 불온한 소문의 식물로 성장’하고 있다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는 태생적 한계를 비판했다. 인간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김규진 시인은 「진안(鎭安)에서」라는 시를 통해 인간내면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를테면 우리들의 내면에는 운명의 길과 죽음의 길,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할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현세의 삶의 길이 무엇이며, 그리고 타락의 길과 욕망의 길은 또 무엇인가를 말한다. 같은 길일지라도 누구에겐 ‘생선 몇 토막 흔들며 게딱지 엎드린 지붕 밑으로 사라’지는 길이 있는가하면, 누구에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길도 있다. 인적이 끊어지는 저녁이면 ‘한숨으로 홑이불 같은 어두운 눈썹까지 끌어올리’는 길이 있다. 그러나 밤이 오면 되돌아 가야하는 길은 우리들이다. 그의 「진안鎭安에서」는 공감과 감동을 일시에 몰고 온다. 프랑스의 역사가 샤를르 세뇨보(Charles Seignobos)도 길에 대해 “문명이란 결국 길, 항구, 그리고 부두”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길은 우리들이 떠나가고 찾아오는 항구이다. 김규진 시인이 「진안鎭安에서」에서 던지는 화두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은 오로지 길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평범한 경험을 통해서 완성된 현대인의 기본 원리를 배운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정석원 시인은 「꿈의 대화」에서 반복을 통해 차이를 발견했다. 그는 여섯 개의 테마를 가지고 반복하고, 미끄러지고, 횡단하며 놀이를 했다. 그의 사유는 노마드적이다. 반복하며 차이를 발견하지만 결과를 지속적으로 연기했다. 그 속에는 복수(複數)의 자아가 우글거렸다. 즉, 그의 목소리는 단일 자아가 아니라 복수의 자아로 노래했다. ‘위선과 정치에 대해’에서도 결론은 없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전진’할뿐이며, 그저 ‘나는 말’할 뿐이다. 그는 ‘위선과 정치’로부터 ‘권력과 투쟁’으로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폭동과 현실’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방식은 놀이하는 형식을 취한다. 정석원 시인은 ‘다시 말한다’로 운을 뗀다. ‘우리의 책임은 무한’하다는 말을 남기고 ‘눈물과 봉기’로 이동한다. 제1의 나에서 그는 ‘제3의 나’가 되었다. 익지 않은 파란 자두를 먹어치운 자들의 대해 복수(復讐)의 방법은 설명하지 않았다. ‘나의 복수들이 말’하는 것은 겨우 그의 ‘울음 후엔 부스러기’뿐이다. 그는 ‘나는 말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복수(複數)의 자아들이 모여 한 목소리로 비판의 따발총을 쏘는 중이었다.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이 특별하다는 것은 앞에서 논의했듯이 16세기에 유럽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여성의 신체 일부를 노래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성의 몸에 대해 찬양하는 시편들도 있지만 비판과 비난, 폄하하는 시작품도 있다. 그리고 찬미와 찬양도, 폄하도 비판도 아닌 단순히 시의 주제로 사용하는 시가 있다. 정푸른 시인의 「떠도는 문장」은 세 번째에 해당된다. 이것 또한 여성의 몸을 소재로 삼았던 유형의 시창작으로 풍자가 목적이었다. 여성의 몸을 풍자하는 일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빗대어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된 점과 같은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몸의 풍경을 보이면서 비루하게 축적된 시간들을 훌훌 떨쳐버리기 위해 종종 낯선 공간과 조우를 시도한다. 그 속도는 관조하는 자세가 아닌 매우 숨 가쁜 태도로 일관한다. 김규진 시인이 「진안鎭安에서」에서 물었던 ‘이 길은 어디를 걸어갈까’, ‘이 길도 나처럼 힘겨울까’라는 질문을 곱씹으며 정푸른 시인은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그의 질문들은 구체적이다. 허기진 질문이고, 구겨진 질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은연중에 ‘나는 속도와 내통한 여자이고’ ‘온 몸이 성기인 속도를 끌어안’는다. 이것은 현대의 삶이 과속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터널 속에서 어둠을 삼키’는 날도 있었고, ‘피 냄새가 밴 페달을 밟는’날도 있었다. 한참 달려온 그는 ‘젖이 불지 않는 시간을 유기하’는 ‘나’로 굳어있었다.
이담하 시인의 「분열하는 가위」 는 현대인이면 누구나 하나쯤 안고 사는 트라우마에 대한 고통을 노래했다. 분열은 하나로 존재하던 사물이나 집단, 사상 따위가 갈라져 나누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분열은 곧 아픔이다. 이 분열은-분열성인격장애, 분열형성격장애, 분열정동정애, 단합이 아닌 조직의 분열, 남북분단과 같은 일종의 분열, 이별-등과 같은 것으로 다양한 아픔이다. 이 같은 아픔을 가위를 통해 치유하고자 했다. 그는 ‘철모르고 핀 꽃들이 깨기 전에 꽃밭에 옮’기는 일을 서두른다. 무엇이든 ‘옮기는 것’도 분열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도 이별이고, 아픔이고 분열이다. 그러나 이담하 시인은 장소를 옮김으로서 생존을 지키려한다.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환경이 조성된 꽃밭으로의 이동이다. 이것은 트라우마를 한 번쯤 겪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생존비결이다. 그는 ‘몇 겹의 종이를 접고 자르며 그만큼 분열하는 것’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분열은 증식을 위한 조건으로 분열의 아픔을 긍정하는 면도 보였다. 이런 사유는 초월적인 시정신의 발로로 받아들여진다.
오인오색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다섯 목소리 모두가 독특한 색깔로 이 세상을 밝게 하려는 의도를 표출했다. 이런 행위는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권리이고 동시에 부여된 의무이다. 이렇게 세계가 부여한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시인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아름답기에 예술인이고, 문인이고, 메시아이고, 견자(見者)이다. 러시아 자연문학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투르게네프 시인은 시를 “신의 목소리”라고 했다. 시인들을 늘 괴롭혀온 시의 정의다.
—《시사사》2014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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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섭/ 1957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04년 《심상》, 2006년〈경인일보〉로 시, 2008년《시와 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현재 관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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