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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묵상글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0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6: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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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수고와 땀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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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17 04:58
- 결합되어있는 공동체
연중 1주 금요일-2021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 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늦잠 자기도 했고,
다른 준비할 것들도 많아
전의 강론을 올렸습니다.
어쩌면 내일도 그럴지 모릅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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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17 05:53
어느 여행자가 마을 입구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 마을 사정은 어떠합니까? 이곳 주민들은 어떤가요?”
노인은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다음날, 다른 여행자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노인은 마찬가지로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인상을 쓰면서, “마을 전체가 끔찍했습니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이었고, 저한테 아주 못되게 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즉, 긍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보이고, 부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나’의 문제인데, 우리는 늘 ‘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향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6)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율법 학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놀라운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선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면서,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감춰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일이 전혀 드러날 수 없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율법 학자가 아닌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덕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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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동이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행동 없는 행복이란 없다(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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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이는 ‘죄를 용서 받은’ 우리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로 영광의 그 상처로 지니고 다닙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도 그 상처를 축복의 표시로 지니고 다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요, 구원의 표지요, 당신 자녀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 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렇습니다. 치유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없앨 필요도, 매여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니듯, ‘상처’도 기꺼이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하느님의 집으로 데려가고 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를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의 보혈로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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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신부님 두 분이 왔습니다. 두 분 모두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했었습니다. 한 분은 선교와 전례 담당 사목을 하였고, 다른 한 분은 직장인 사목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 사목’을 했습니다. 2002년의 일이니, 어느덧 23년이 지났습니다. 40대 초반의 우리는 열정과 힘이 넘쳤습니다. 교회의 현실과 미래에 관해서 밤을 새워 토론했습니다. 우리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성격 유형 검사를 받기도 했고, 강화도로 연수를 가기도 했습니다. 한 분은 그 뒤 2013년에 교구청에서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저는 성소 국장으로 일했고, 신부님은 해외 선교 사목 국장으로 일했습니다. 공자께서는 “멀리 벗이 찾아와서 함께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마고우가 이 먼 곳까지 찾아주었으니 얼마나 기쁜가, 같이 밤새도록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눠야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난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같은 동행자, 같은 길을 걷는 도반, 또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를 뜻합니다. 예전처럼 열정과 힘이 넘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미처 갖추지 못했던 덕과 온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지구장으로 사목하면서 교구장님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전시와 내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국회가 말을 듣지 않아서 조금 겁을 주려고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비상계엄, 국민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비상계엄을 쉽게 선포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비상계엄은 또 다는 헌법기관인 ‘국회’만이 해제를 결의할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선포한 지 3시간이 안 되어서 해제되었습니다. 헬기가 국회의 마당에 내렸고, 무장한 군인이 국회에 난입했습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이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잘못된 비상계엄을 해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국회로 돌아온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진압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인 군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탱크와 총구를 맨몸으로 막아선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의 부당함을 당당하게 알린 언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이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회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 조직은 책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신앙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삶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원칙입니다.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기에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희망의 불이 켜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소중한 것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옮겨서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4명의 이웃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를 보시고 비상계엄처럼 사람의 존엄을 침해했던 중풍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중풍이라는 비상계엄을 해제해 주셨습니다. 그 이웃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알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이웃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중풍 병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웃들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소중한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25년 1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결심한 것을 끝까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구급차를 타고, 신앙에 목마른 사람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안내하는 따뜻한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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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흔히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혼자는 살 수 없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병자들을 치유 하십니다. 특히 지붕을 뚫고 들어온 병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런데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 나았나요? 자신의 노력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자는 단지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병자를 도와준 병자의 이웃들, 즉 친구들의 덕으로 병자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병자는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감자나 고구마 캐 보셨나요? 그 줄기를 들어 올렸을 때 하나만 올라온다면 우리는 얼마나 실망할까요? 주렁주렁 따라 올라오는 것이 좋겠지요? 실제로 주렁주렁 따라 올라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우리가 하늘나라에 도착 했을 때 우리만 하늘나라에 도달한다면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복음을 전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우리만 딸랑 하늘나라에 도달한다면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생애는 복음을 전하는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삶은 바로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늘나라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만이 하늘나라에,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함께 하느님을 만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한 형제들에게도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지 말아야하는 것.
사제 피정 중 선배 신부님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한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뭘까?
나는 분열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세포들이거든
성장하려면 세포는 계속 분열해야 해
쪼개지고 또 쪼개지고….
만약 그 쪼개짐을 두려워해서 분열하지 않는다면
그 세포는 썩어들어가는 세포가 되고 말 거야.
우리는 그런 세포를 ‘암’이라고 부르지.
참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포이고 쪼개져야 한다는 것.
분열은 성장의 동력이라는 것.
이렇게 ‘분열’은 제 기도의 묵상 주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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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
“주님이 영원한 안식처이다”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엄중하고 엄연한 진리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놀라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축적된 삶이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251년에 태어나 356년까지, 즉105세까지 천수를 누렸던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안토니오의 생애”가 성 안토니오의 삶을 잘 소개합니다. 성인의 생애를 잠시 소개합니다.
‘3세기 중엽, 이집트 중부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안토니오는 부모가 돌아가자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자신과 누이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만큼 남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눕니다. 바로 다음 두 성서 말씀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1)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4)
그는 21살에 은둔자가 되어 가난과 겸손, 거룩함과 자기훈련의 모범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유혹을 물리치며 고향 인근에서 살다가 35세 산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성의 폐허로 이동해 무려 20년을 독수자로 살았고, 그동안 6개월마다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자신도 혼자 살면서 필요할 때만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엄격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활기차고 즐거운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그의 쾌활함으로 한눈에 그를 알아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배웠고 성인도 그들에게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60세 때, 종교적 박해 시기에는 순교를 바라며 악렉산드레아에 갔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과도 치열히 싸웠습니다. 이어 끝까지 사막에 은수자로 105세까지 사는 동안 병에 걸린적도 없었고 시력도 좋았으며 치아도 건강했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인 믿음의 대가, 은수자들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 아빠스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삶을 통해서도 하루하루 한결같은 하느님을 찾는 진리추구의 믿음의 삶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무슬림 지도자와의 대화에서, 분열이 아닌 일치의 평화를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종교인들의 믿음의 자세를 환기시켰습니다. 교황님 말씀입니다.
“종교들은 평화의 가교들을 찾기 위해 더불어 일해야 한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을 찾는 공부에 항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공부하며 쌓은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지만, 공부해나갔던 자세만큼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다.”<다산>
“군자가 도리에 맞게 학문을 깊이 파고드는 까닭은 스스로 경험해 얻고자 함이다.”
살아온 대로 정직하게 새겨지는 삶의 나이테요, 세월의 풍화작용도 견뎌내는 삶에 새겨진 신망애의 나이테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을 찾아 노력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축구하는 바, 참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예수님께서도 안식처를 찾듯이 아버지와의 만남이 필요한 새벽마다 외딴곳을 찾아 머물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처에 들어가는데 믿음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이 좋은 동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처임을 믿음의 눈으로 알아봤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주님을 찾으십시오. 멀리 밖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주님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의 안식처입니다. 그러니 안식처를 찾아 엉뚱한 밖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안식처임은 다음 주님의 초대 말씀이 입증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참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은 중풍병자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눈물겨운 믿음의 노력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어 곧장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육신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느님의 권능이 참된 안식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그대로 발휘되는 틍쾌한 장면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죄의 용서로 영혼이 치유되자 저절로 육신의 치유가 뒤따릅니다. 정말 죄의 용서로 영혼치유가, 영혼건강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 장면을 대할 때 마다 생각나는 다음의 미사경문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혼자의 믿음은 약하나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우리 약한 믿음도 더불어 주님의 교회공동체 믿음에 뿌리내릴 때 강한 믿음이 됩니다. 새삼 교회 공동체의 믿음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믿음 좋은 동료들 덕분에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우리 역시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영육의 치유와 구원을 받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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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오롯이 믿으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마음껏 희망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가득히 빛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어엿이 거룩하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한없이 자비로우시게나
하느님 한 분 외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대에게 맡기셨으니
땅 위의 그대
하느님의 사람아
하느님께 미루지 말고
죽도록 살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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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마르 2,2)
구원의 보편성
예수님께서 집 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께서 유대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그 말씀을 들으러 들어갈 수도 없었던 우리가 믿음에 이르러 마침내 누리게 된 구원을 상징합니다. 비록 우리가 멀리 있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까지 당신 가르침의 말씀을 펼쳐 주셨고, 당신 성인들의 설교로써 우리를 불러 모아 주셨으며 , 말씀이 선포되던 회당 밖에 있던 우리마저 당신 복음에 한 몫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나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가난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진리에 기대어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이제부터 나누려고 하는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내게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도대체 가난이란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제부터 이 물음에 답해 봅시다.
알베르투스 마뉴스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이 지으신 만물에게서 어떠한 만족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을 이보다 더 좋게 말할 수 있고, 더 고상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 가지 요점 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명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때문에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진리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316)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강론 60
여러분은 “모든 것을 읽고 말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 속에 골머리를 썩이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속적이고 헛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재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하느님의 지혜를 들으십시오. 이 지혜보다 더 현명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 6,
19 이하).
사랑하는 여러분,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성서의 대목들 중에서 어떤 대목이 저를 가장 사로잡는 지에 대해 이미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또 다시 언급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오실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 (마태 25 참조) 생각해 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한 부류는 그분의 오룬편에, 다른 부류는 왼편에 서 있게 됩니다.
그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마련해 둔 나라를 상속받아라.” 임금은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심부름꾼들을 위해서 마련된 영원한 불속으로 가라.”(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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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
박윤식 [big-llight] 2025-01-16 ㅣNo.179347
겨울로 가는 고즈넉한 늦가을에, 하늘을 떼 지어 나는 기러기들 모양은 대개가 삼각형이다. 혼자 나는 것보다 이 모양이 공기저항을 덜 받는다나. 또 삼각 모양의 상승기류로 그리 힘을 덜 드리고 더 난단다. 더군다나 맨 앞의 새는 공기저항에 쉽게 지쳐, 시간을 재가며 다른 새와 자리를 바꾸기도. 그들은 가면서 울음소리를 내는데, 이는 서로 격려하며 특히 맨 앞 새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라나. 물론 처지는 새에게는 동료 두 마리가 함께 내려와 회복되도록 돕고, 회복되면 다시 대열에 합류한단다. 이렇게 기러기는 ‘협동심과 우애’가 대단히 돈독하다나.
그때에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다. 그 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들었는데,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어,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치 고해소에서 신부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 예수님께서도 중풍 병자의 죄를 본 것이 아니라, 그를 들것에 들고 온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을 치유해 주셨다. 하느님 권능을 대신해서.
사실 예수님께서 계신 카파르나움의 그 집에 수많은 이가 모여들었다. 그때 들것을 든 네 사람이 중풍환자를 데리고 왔지만, 너무 많은 이가 모였기에 그분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이가 모였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지붕을 벗기고 그를 내려 보냈다나. 지붕을 벗기는 그들의 열정, 뚫은 지붕 사이로 내려오는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인내심은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음을 드러낸다. 신앙의 신비다. 그래서 살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주위의 작은 도움으로 큰 힘을 얻는다. 마치 기러기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에 서로 격려하고 어려울 때에 함께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먼저 선언하신다. 이는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시고 치유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더 나아가 단순히 신체의 자유를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이시는 거다. 우리 역시 고해소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신부님께 진정 우리를 치유하시기를 ‘겸손’하게 청하는지 되돌아보자.
아무튼 중풍 병자를 들것으로 데려온 이들, 그들이 그 환자의 친척인지 또는 이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붕을 뚫고라도 그 고통 받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 실천의 모습을 본다. 우리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를 도울 줄 아는, 이런 작은 향기를 내는 믿음의 삶을 살자. 예수님의 치유는 병자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은총이었다. 그 이웃이 없었다면 아마도 치유 받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믿음으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한 저들이기에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이웃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는 기쁨은 받는 것보다 더욱 크기에.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실린 중풍 병자의 그 믿음이 아니라, 들것을 들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고치셨다. 네 사람의 정성스런 믿음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가 온전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그토록 잘나서 용서받고 의인처럼 산 것은 결단코 아니리라.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부단한 기도와 노력을 했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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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를 죄의 멍에에서 풀어 주는 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요한 9,2 참조).
몸이 마비되어 이전에 누리던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신의 병고를 조금은 동정해 주는 듯하면서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수군덕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려고 해도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을 단죄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도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들것에 싣고 와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 예수님 앞에 이르게 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 말씀과 행위로 당신께서는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히시면서도 그를 해방시키시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주십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구세주께 데려다주었고,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과 동료들, 새로 만나게 된 감사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추억과 은총을 빼앗기지 말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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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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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중풍 병자 한 명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려보냅니다.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치유를 위해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만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장애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 다가갈 방도를 고민했고
그들은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만 하면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그가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를 지붕 위에서 들것에 달아
내려보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할 수 없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군중이 많아서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려는 것을 막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지붕 위로 올라가는
번뜩이는 지혜를 그들에게 선물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믿음은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처음에 생각한 방식으로 할 수 없으면
다른 방식을 찾으면 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야한다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나의 방식만 고집했다면
들것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길을
사람들이 열어주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면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으면서
그들에게 비켜주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원하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은
기쁘게 넘어갈 수 있는 지혜도
함께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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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 11)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건강한 삶입니다.
건강한 삶은
믿음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합니다.
믿음은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가
자유로운 행복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믿음의 생활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겉모양만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 속의
변화입니다.
마음 속의
변화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마음가짐이
수도생활입니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세상을 위한
믿음입니다.
사람을 위한
믿음은
죄의 용서와
삶의 이유를
치유하여
줍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더 적극적인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삶으로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향해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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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는 아픈 동료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 황다미, stellakang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이 간단한 표현 안에 한 가련한 인생의 길고 고통스럽고 슬픈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깊어질 대로 깊어졌습니다.
오랜 병고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힘으로 걷기는커녕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보니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심각한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증세가 겹쳐 죽을 고생을 한적이 있습니다.
삶의 질이 그야말로 심각히 떨어지더군요.
평소 식은 죽 먹기던 샤워하는 일, 옷 입는 일, 걸어다니는 일이 언제나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양손을 들어 올리는 일조차 버거워서 정말이지 우울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다녀오는데 10분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세가 심각해지다보니 돌아눕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식사하는 일, 용변보는 일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버겁고 참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암담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에게 하루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분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그 어떤 불치병 환자이든 상관없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는 데...
그러나 그는 사지가 마비되어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적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평소 그를 가엾이 여긴 네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네 사람은 즉석에서 그를 위한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긴 막대기 두 개 사이에 천을 대고 묶었습니다. 들것 위에 환자를 눕힌 네 사람은 보조를 맞추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환자와 함께 먼길을 걸어온 네 사람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산 너머 산이라고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안팎은 그분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완장을 어깨에 차고 질서 유지를 하고 있던 사도들이 번호표를 나눠주었는데, 순번에 따르면 이박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습니다.
정문, 후문이 모두 봉쇄되었으니,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네 사람은 환자와 함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유다인들 가옥의 지붕은 개폐식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공간의 지붕을 연 네 사람은 환자의 들것 네 귀퉁이에 긴 끈을 매달아 조심스럽게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그들의 기상천외한 방법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과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네 사람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 강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의인이 지니고 있었던 아픈 동료 인간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을 어떻게 하면 치유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하고픈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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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ia 1월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의 ‘집단 따돌림’과 집요한 가혹 행위, 그리고 즉시 다가온 심리적 충격, 굴욕감, 좌절감,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이루어진 ‘극단적 선택!’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 계속되는 상실감, 분노와 죄책감, 집단 우울증, 신경정신과 치료, 사직서 제출...
조금 어눌하고 착하다는 이유로 시작된 한 친구의 불행, 그리고 가족 전체의 깊은 슬픔 앞에 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착한 아이, 그 법 없이도 살 가족 전체를 생지옥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해 학생들이 미워 저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과연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런 비극 앞에 서야 했던가요?
경제제일주의, 일등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금 느리면 어떻습니까?
조금 능력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조금 천천히 가면 또 어떻습니까?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약하면 약한 데로, 참아주면서, 기다려주면서 함께 걸어가면 될텐데...
너무나 갈 길이 급한 나머지 기다려주지를 못합니다.
조금 늦으면 소외시킵니다.
조금 부족해보이면 왕따 시켜버립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세상 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우리 사회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급증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노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소외받는 노인들,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자 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 돌봄과 사랑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약한 지체들, 어린이들, 노약자들, 장애우들, 이방인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은 우리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철저하게도 성서적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에는 한 중증 중풍병자와 그 가족들이 등장합니다.
중풍으로 쓰러진지 어언 수십 년,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밥 한술 뜰 수 있는 처지가 너무나 비참해 차라리 죽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이려니, 이렇게 식물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니 했었는데, 어느 날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가족들은 한 마음으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위해 노력합니다.
밤새 환자를 눕힐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환자를 들것에 태운 가족들은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람과 동시에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주변은 치유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정상적인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는 2박3일을 기다려도 차례가 올까 말까였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가족들이었습니다.
임시대책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고 새치기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때 누군가가 묘안을 한 가지 냈습니다.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 가정의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가정의 가장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가족들의 정성, 가족애,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우리 직장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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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12: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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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 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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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3-1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이고, 동시에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죄를 용서받다.’는 ‘구원을 받다.’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 사도도 바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고, 여기서도 ‘용서’는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2) 5절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병자 자신이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남들이 아무리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 외에도 ‘간절한 희망’과 ‘회개’와 ‘신앙생활’을 모두 포함합니다.
3) 9절의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중풍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즉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하려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율법학자들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4)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중 때문에’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4절),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병자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건강해진 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예수님께 갈 때에는 군중에 막혀서 지붕의 구멍으로 갔는데, 병을 고친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위해서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도, 군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도 자비도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2절).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고, 마음과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그것은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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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2,1-12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룹 성경공부를 하는 팀에서 오늘 복음 내용과 관련하여 역할 상황극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부 중에 남편이 환자가 되고 자매님이 남편을 등에 업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 그 옆과 뒤에서 같이 들어 주었습니다. 그 상태로 성당 마당과 건물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지하 교리실로 돌아오는 코스였습니다. 들어올 때는 일부러 교리실 문을 잠가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덩치 큰 장정을 창문을 통해 옮기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도왔는데도 한참을 낑낑 거리며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지요. 상황극이 끝난 뒤 각자 느낀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중풍병자가 된 남편은 자신을 등에 업은 아내와 다른 그룹원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그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니 꼭 그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고도 했습니다. 실제로 중풍에 걸렸던 성경 속의 병자는 아마 자신이 왜 그런 몹쓸 병에 걸려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어 괴로웠을 것 같다고, 그러니 자신은 아파서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남편을 등에 업었던 자매님은 남편을 등에 업고 낑낑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남편이 등에 지고 있을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남편이라는, 아빠라는 책임감 때문에 힘들어도 내색 한 번 못하고 그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고 지고있는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고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남편이 지금 큰 병에 걸려 당장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남편을 지고 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부분은 옆과 뒤에서 도와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낫게만 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니 땀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에서부터 내려보냈던 친구들도 아마 몸이 힘들지는 않았을거라고, 단지 큰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스럽고 미안해서 괴로웠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대뜸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군중 속에 숨어 당신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이자 더 중요한 이유는 중풍병자와 그를 들것에 들고 온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셔서 영적으로도 치유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친구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 중풍병자에게도, 그의 고통을 보고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안타깝고 죄스러웠던 친구들에게도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고 따뜻하게 만드는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과정이었을 뿐이지요.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기꺼이 그의 손발이 되어준 네 사람의 소중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일처럼 돌보는, 그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용서'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오늘 복음을 읽는 우리들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한자로 용서(容恕)는 받아들이고 수용함을 뜻하는 용(容)과 헤아려주고 알아줌을 뜻하는 서(恕)의 합성어이지요. 친구의 입장이 되어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친구의 아픔과 슬픔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그들의 마음 안에 참된 행복의 비결이 숨어있음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참된 용서를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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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라.”
주위에서 어떤 분들은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너무할 정도로 꺼리는 분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남에게 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베풀지 않으려는 분도 만나게 됩니다.
젊은 사제였을 때 본당에 나가서 살다보니 시골스러운 분위기였는데, 교우분이 성당에 올 때, 부치기를 사제관으로 가져온 것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폐를 끼치기 싫어 ‘다음부터는 가져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분이 마음으로 많이 섭섭했나 봅니다. 본당을 떠날 때 저도 잊어버렸던 일을 회상하며 쌀쌀맞은 본당신부 때문에 많이 속상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거절한 그 사건이 컸던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떤 분은 산에서 땄다는 두릅, 고사리 삶아 말린 것, 심지어는 산밤 등을 비닐 봉지에 넣어 문고리에 걸어 두고 도망가듯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쌀쌀맞은 성질머리를 반성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받곤 했습니다. 우리가 정이 많아서 그런지 정성에 대해 거절하면 그 만큼 섭섭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조건 받지 않으려는 심성에는 남에게 ‘약한 모습’, ‘구질구질한 모습,’ ‘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교만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 찬 바람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다보면 남의 신세를 질 때도, 때로는 폐를 끼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남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받는 것이 ‘덕의 완성’의 모습인 것이지요.
한 중풍병자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붕으로 해서 그 밑 실내에서 가르치시는 주님께로 인도됩니다.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처지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죽음과 같은 죄까지 용서를 받습니다. 율법학자 몇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그 병자는 자신을 얽어매는 죄까지 용서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자, 교만한 자에게 머무르지 않으시고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머무시는 것입니다.
병자와 죄인에게 머무시는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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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빛과 그림자를 안고 돌아가는 길
오늘은 중풍병자의 움직임과 예수님의 관계를 중심으로 묵상해봅니다. 잘 알다시피 중풍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서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의식이 흐릿해지기도 하며, 발병하면 대부분 완치가 어렵고 후유증이 남아 고통스런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2,2),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려갑니다(2,3).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간 것을 보면 중풍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집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한 채 고통과 절망 속에 누어 지냈을 것입니다. 돌보는 가족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예수님께 치유, 구마(驅魔), 죄 사함, 민족 해방, 현세 복락 등을 기대하고 찾아간 이들과 달리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망의 이불’과 ‘고통의 집’에서 빠져나옵니다. 자신의 뜻이었는지 권유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예수님 때문에' 집을 떠난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자신이 머물던 집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진 것은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찾아가는 ‘생명의 순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몸과 마음이 아프고 외롭고 힘들 때, 세상 불의와 구조적 악이 판칠 때 포기하고 체념하며 손놓고 집안에 있을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하고, 그런 상태에 있는 이들을 주님께 데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5) 하시며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집을 떠나온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생명력을 되찾고 절망을 떠나 희망을 만났으며, 어둠을 떠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들 때, 권력과 자본의 폐해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 연대하여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2,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시며 병들어 굳어진 그의 몸과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그 결과 창조가 일어나고 관계가 발생하며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들것을 들고’ 가라 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들것은 아픈 몸을 눕히고 기댄 고통의 자리이자 떨쳐버리고 싶은 과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생명을 되찾도록 예수님께 데려다준 ‘하느님의 성사’이며 자신의 고통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담긴 선물입니다. 우리도 내 삶의 들것 곧, 좋은 것뿐 아니라 아픔과 상처, 고통과 어둠도 끌어안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냥 ‘가라’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집은 고통스럽게 지냈던 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원점이요 가족들의 걱정과 슬픔이 서린 곳입니다. 성해진 그가 돌아감으로써 가족들은 걱정과 시름을 놓고 활기를 되찾았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되돌아감은 병이 치유된 사람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렇게 가정이나 수도공동체, 사회도 예수님을 품어야 화해와 쇄신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요, 우리가 그분을 찾아 떠나고 그분과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순례를 계속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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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마르코 복음사가는 계속해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 오늘은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치유기사의 단골 메뉴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가장 무섭고 힘든 병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이는 자기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도 외면하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하늘 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천형(天刑)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반쪽짜리 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하십니다. 육신은 치유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기쁠지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천형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이제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요 안배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병이 나아 걸어가라" 하면 이해하겠는데 "죄를 용서받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육신의 병 치유가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쓰자"(히브 4,11)고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유효한데도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자"(히브4,1)고 강조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두 들었는데, 그걸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안식처로 들어가게 되고(히브 4,2-3참조),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은 그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느님 친히 맹세하셨다고 전해줍니다(히브 4,3. 5 참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아직도 자신이 없으신가요? 왜요? 여러분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입니까? 여러분이 더 많이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성질이 더러워서 혹은 성당에 잘 못나가서 그렇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 모든 죄와 허물과 악습을 덮지 못할 것으로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하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안식처에 가 닿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이 소중합니다. 오르막길이건 내리막길이건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진흙탕이건 이 과정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목임을 믿고 견딘다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축원합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제 발로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병이 워낙 사람의 일부분이나 전체를 마비시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니까요. 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는 벗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고, 예수님이 계시던 집에 이르러서는 지붕까지 올려졌다가 밑으로 달아서 내려지는 조마조마한 순간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해도 부지불식간에 벗들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난관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위험천만하게 들어 올려졌다가 달아 내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의 노력을 가상히 보신 예수님 덕분에 치유받고 용서받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자기의 병을 상징했던 들것을 직접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주님 앞으로 데려와 치유와 죄사함의 은총을 받도록 도와준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당신의 자비로 하해와도 같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하늘 나라로 초대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벗님들,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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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진정한 승리를 누리는 삶
<2025.1.17>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0:29~43절)
❝진정한 승리를 누리는 삶❞
❚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와 기회를 따르며 승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때와 기회를 선용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9~35절).
여호수아는 기브온을 구하기 위해 전투를 끝내고, 이제 가나안 남부 지역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먼저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를 공격합니다.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29절).. 다음으로 라기스로 나아가서 전쟁을 벌였습니다(31절). 라기스 왕 야비아는 이미 죽임을 당하고, 군대는 궤멸한 후였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이틀 만에 성을 정복합니다. 그 무렵 라기스와 동맹 관계에 있던 게셀 왕 호렘이 자기 성읍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왔지만, 여호수아는 호람과 게셀 백성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진멸했습니다(33절). 에글론 왕 드빌 역시 동맹군에 합세하여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성읍 역시 무방비 상태였고, 하루 만에 라기스 처럼 진멸을 당했습니다(35절).
때로는 하나님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라는 원망의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때와 상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적 판단력과 지혜가 없었던 내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이 계속 지연되면 하나님의 때가 아님을 알아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욕과 패기만을 앞세워 하나님께 충분히 묻지도 않고 행동했다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당면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6~39절).
여호수아가 다음으로 공격한 곳은 헤브론 성읍입니다.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37절).. 이로써 여호수아는 가나안 남부 다섯 동맹국 중 세 성읍을 정복했습니다. 헤브론을 정복한 다음 드빌을 정복합니다.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39절)... 여호수아의 가나안 점령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신 7:1~2; 20:16~18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부 지역을 점령해 갔습니다.
전쟁에서 물론 승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읍의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영적 싸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참으로 단순한 해답임에도 막상 삶의 자리에서는 왜 그렇게도 어렵게만 여겨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세상적인 가치관과 방법과 주변의 사람들이 영적 싸움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적 싸움은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이 주실 승리를 확신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0~43절).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온 땅 곧 산간 지방과 네겝 지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들의 모든 왕을 무찔러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서 숨 쉬는 것은 모두 진멸시켜서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40절,새번역). 또한 여호수아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 및 고센 지경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가나안 남부 지역의 모든 왕을 굴복시켰고,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42절)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남부 지역의 정복을 마치고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43절).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고, 확신 있게 믿고 나아갈 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한 큰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워 주셨습니다. 좋은 무기도, 훈련된 군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남부 지역을 ‘단번에...’(42절)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영적인 승리를 기대합니다. 단, 조건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심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때와 상황을 깨닫는 영적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순종함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인생을 완주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수 10:29~4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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