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한 감동 실화 '모정의 뱃길’ 40년 후▷
육영수 여사는 남부지방으로 시찰을 떠나는 남편에게
전남 여수에 가시거든 한 어머니를 만나 전달해 달라며 한통의 편지를 건네었다.
여수 앞바다 외딴섬에 사는 한 소녀의 어머니였다.
외딴섬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을 나룻배에 딸을 태워 통학을 시킨 어머니였다.
노 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소녀. 눈비가 오고 풍랑이 와도
모녀의 나룻배는 6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졸업식날, 학교에서는 6년 개근상을 탄 소녀의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드렸다. 친구와 아우들과 선생님과 정든 교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마지막날은 나룻배 모녀의 사연으로 더욱 숙연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 ‘졸업식의 노래’ 첫구절처럼
소녀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그것도 학교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없는 외딴섬에서 처음 생긴 남다름에 있었다.
섬에 집이라곤 세 가구에 스무 명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통통배조차 오지 않는 곳이라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나룻배로 육지를 건너다니곤 해서 아이들이 커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비록 딸자식이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딸을 학교에 넣어본들 20리나 되는 바닷길을 무슨 수로
왕래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모진 결심으로 딸을 입학시키고야 말았다.
전기도 시계도 없는 섬마을에서 새벽어둠에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나룻배를 저어 학교에 보내고, 공부가 끝날 때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든 몸이라서 농사를 도맡아 했다.
농번기에는 소를 빌려 논밭일을 하고, 장이 서는 날에는 채소를
팔아 생필품을 사고 아버지의 약도 사왔다.
그래도 어머니는 공부하는 딸이 대견스럽기만 해서 육신의 고달픔을 모르고
6년 세월을 훌쩍 넘겼고, 그 세월 동안 모정의 뱃길을 손꼽아 보니 3만4천리를 헤아렸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그렇지 않아도 눈물나는 졸업식에 소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모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1962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목포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은 신문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한국일보 2월14일).
육영수 여사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여수에 가서 이 가난한 섬의 모녀(어머니 박승이, 딸 정숙현)를 만났다.
육 여사의 편지를 전하고, 그 어머니의 굳은살 배긴 손을 잡아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일보는 딸 정숙현 씨의 글을 게재하면서
모녀의 뒷소식을 전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음은 2004년 7월8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정숙현 씨의 글이다.
‘모정의 뱃길’ 주인공 정숙현씨
나는 모른다, 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 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 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 아, 나의 어머니 모정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시(詩)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
1956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스무 명이 채 못 사는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을 포함해 겨우 세 가구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를 위해 약간의 채소와 나물을 육지에 팔러 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 척만이 외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 달빛에 의지해 혼자 노 젓는 방법을 익히셨다.
병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랜 세월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하셨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간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 가정도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호로 산산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말로는 표현 못할 6년의 세월. 마침내 졸업식 날이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사연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만4천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62년 2월 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에서 하루 200여 통 이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필자 주 : 이미자의 ‘꽃피는 여수바다’)도 불려졌다.
라디오 연속극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성균관대 국문학과)을 나왔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딸 가족을 위해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롭다.
내가 한석봉이나 이율곡이나 맹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이제 57세가 된 정숙현 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특별시립
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과 교사로 일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의 편지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사를 전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도 있으리라.
무정세월 4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네번 굽이쳐 흘렀어도
주인공 정숙현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도자의 이런 보살핌으로 이 땅의 고난을 다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외딴섬의 고립과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지 않고 바다를 건넌 그 어머니의
결연한 ‘도전’에 뜨겁게 악수하는 것이 고난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최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60년대초,
어떻게든 궁핍을 딛고 몸부림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절박했던 그 시기였음에랴.
이 땅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내로라하고들 있지만
거의 서민의 삶과 무관한 ‘나으리’들뿐, 서민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애환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꾼 지도자가 박정희 외에
누가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 설명이 필요치 않은 말이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고도 그가 존경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거수일투족 꾸밀래도 꾸밀 수 없는 그의 서민 기질에 있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갈데없는 한국의 전형적인 평민이었다.
이 땅의 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로,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또 누가 있던가?
어제를 돌아보는 것은, 어제가 내일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고난과 꿈은 내일도 새롭게 이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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