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3
9월17일[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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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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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6gnRcVB2A
[서울대교구 조정래 시몬(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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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엮어갑시다!>
살다보면 가끔 죽음 체험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사 체험, 죽음 유사 체험, 죽음 근사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그쪽 세상을 살짝 맛을 보고 온 분들입니다. 요르단강을 건널까 말까 하다가 되돌아온 분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임사 체험은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보통 사람들은 평생 발버둥 쳐도 하기 힘든 은총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이 임사 체험이후 보이는 특별한 변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변경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우선 가치들이 재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체험을 통해 일종의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고 추구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아니었구나.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구나. 그렇게까지 목숨 걸 대상이 아니었구나.”
그런 깨달음을 통해 여러 대상이나 가치들에 대한 재구성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재물과 사회적 위치, 학벌과 스펙, 사람과 만남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이 더 가치있고, 더 고귀하고, 더 영원하고, 더 불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결국 영적인 삶, 사랑의 삶, 봉사와 헌신의 삶, 주님 안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도 언젠가 그런 대대적인 삶의 전환점이랄까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먹고 즐기며, 그저 이 한 몸 겨우겨우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보다 이타적이고, 보다 영적이고, 보다 주님 마음에 드는 그런 방향에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공동체 형제들과 주변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부모님과 가족을 찾아 고향을 향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영감님들만 공동체에 남아 있습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몇백년 만에 사무실에 편안히 앉았습니다.
몇 년전부터 순차적으로 주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어머니, 형의 영정 사진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그 눈빛들이 뭔가를 말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이제 자네 차례라네!” 어쩌다보니 저도 저희 가족 가계도 안에 최고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록 재물은 아니지만, 그 무엇인가를 모으고 또 모으고, 끝도 없이 쌓아 올리며 살아온 지난 날을 가슴 치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주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를 맞아 우리보다 먼저 떠난 조상님들,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의 영원한 안식과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다가올 우리들의 죽음도 생각하면서,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엮어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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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BtrCBFy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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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서 벗어나는 법: “그래도 숙제니까!”>
한가위는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왜 시스템적으로 매년 이렇게 하도록 모든 나라에서 명절을 지낼까요? 그 이유는 시스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탐욕에 시스템적으로 잠식되기 때문입니다.
1997년 수원지역 전교 1등 중학생 스스로 목숨 끊었습니다. 갑자기 오른 성적 때문에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태도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 학교 가기가 무서워요. 애들이 무서워요. 말투와 눈빛이, 행동들이….”
300명 중 100등 하던 아이가 한 학기 만에 전교 1등을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다음 시험으로 전교 1등을 할 실력임을 증명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시선보다는 다음 시험의 부담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이뤄낸 것들은 이렇게 잃을까 봐 불안합니다.
1997년 같은 해 성남시에서도 1등을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1등일 때 죽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했고, “나는 최고인 이 순간 자유를 얻었다.”란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1등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가 이뤄낸 것은 이렇듯 지푸라기처럼 잃어버릴까 봐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탐욕이 많은 부자는 자기 재산을 잃을까 봐 곳간을 넓히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습니까? 내가 이뤄놓은 것이나 가진 것들이 부질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되는데 탐욕은 가만 있으면 저절로 나를 잠식합니다.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탐욕을 이기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1946년 최초의 마취제 ‘에테르’가 발견되었습니다. 의대 2년생 모턴입니다. 그가 특허 신청 때 지도교수인 ‘웰치’와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이 자신이 특허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셋은 법정 싸움까지 갔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나의 것이면 뭐 하겠습니까? 목숨을 잃게 된다면. 성경에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소작인은 추수철마다 소출 일부를 주인에게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였지만, 주인은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감사의 봉헌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지 못하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선악과와 뱀 앞에 서 있는 하와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면 뱀에게 자기를 바치는 것이 됩니다. 선악과는 매년 열매가 맺힐 때마다 바쳐야 합니다.부모를 기억해야 하는 명절이 규칙적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잡초가 나고 건물이 허물어지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를 뽑고 건물을 다시 재건하는 일도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시스템밖에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부모 공경 의무(키부드 아브 바-엠 Kibbud Av Va-Em)를 규율로 정해 실천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앉는 자리나 사용하는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함부로 발언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즉시 이를 제공하며, 필요시 부모를 돌볼 책임을 진다.”와 같은 규정들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유대인들의 부모 공경은 대단합니다. 그렇게 규율로 자신을 얽어매면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에게 과자를 사 주면 규칙적으로 하나만 아빠 달라고 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이는 아빠에게 하나를 주기도 아까워할 것입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는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번 칭찬하고 그 내용을 적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0번을 다 채우니 자신이 자랑스럽고 집이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래도 숙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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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 ‘한가위, 추석’입니다. 추석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눔입니다. 농경사회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입니다. 가을에 거둔 곡식과 과일을 이웃과 특히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재물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좋은 날씨를 주시고, 적당한 비를 내려 준 하늘에 감사드리는 겁니다. 좋은 땅을 물려준 조상에 대해 감사드리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 미국에도 있는데 ‘추수감사절’입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이주민들은 낯선 환경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겨울을 지낸 이주민들은 가을에 첫 곡식을 수확했습니다. 신앙인들이었던 이주민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음식을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귀성, 귀향길에 오르는 우리의 추석과 비슷합니다.
유년시절 제게 추석은 ‘심부름’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우면 돼지고기를, 형편이 좋으면 소고기를 친척들과 나누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친척 집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면 친척들도 형편에 맞게 추석 명절을 지낼 수 있도록 선물을 주었습니다. 추석날 가족들은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쳤고, 추석 합동 위령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제게 추석은 ‘가을 방학’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매년 가을 추석이면 신학생들이 집에서 며칠 쉴 수 있도록 방학을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추석 연휴를 보내야 했기에 주어지는 방학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신학생들이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신학생들에게 추석 선물을 주었습니다. 양복 기지를 받기도 했고, 옷을 받기도 했습니다. 추석 방학이면 동창 신학생들과 등산도 하였습니다. 지리산도 갔었고, 덕유산도 갔었습니다. 한번은 동창 신학생의 집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학생의 집이 서산이었고,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서툴지만 벼 베기를 도와주었습니다. 추석은 ‘영화’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극장들은 추석을 맞이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는 추석에 맞추어서 개봉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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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때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낸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드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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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수확’입니다.
씨앗 하나가 싹이 트고 나무에 과일이 열리는 것은 인간의 계획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시설 재배를 통해서 겨울에도 과일이나 채소가 나오지만 그래도 농사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추수를 할 때는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엘서에서 말하듯 추수를 하여 배불리 먹으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많은 소출을 거두고도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곡식과 재물에만 관심이 있어 그것을 쌓아 두려 하고, 그 재산을 즐기려고만 합니다. 그가 거두었다는 그 많은 소출을 위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닿았을까요?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요한 묵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의 심판을, 주님께서 낫을 들고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곡식이라면, 그들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손길이 닿았을까요? 그러나 모든 이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요엘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어떤 이들은 복음의 부자처럼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즐길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한 일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심판을 맞게 됩니다. 재산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며(복음 참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독서 참조)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거두어들이실 때를 생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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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은 ‘회개’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내가 수확한 것’이라는 말과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이라는 말은, 그 부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얻은 것들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원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리석음’은 곧 ‘죄’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고, 겸손한 사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법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고, 교만한 사람은 은총을 받아도 감사드리지 않고,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꾼들에게는 주기로 한 품삯을 주었으니까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일꾼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에서,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하느님 말씀은,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목숨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인생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셨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되찾아 가십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 관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실행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교만에서 인생을 막 사는 어리석음이 생기고, 그 어리석음에서 온갖 범죄가 생깁니다.
2)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이라는 말은, ‘시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고, 죄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4-6)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인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 동안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면 좋을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만’ 살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오늘 밤에” 라는 말씀은,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떠나야 합니다.
3)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말과 “모아 두어야겠다.”라는 말과 “쌓아 두었으니”라는 말은, 그가 ‘나눔’과 ‘사랑 실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말은, 그가 ‘몸의 쾌락’만 생각하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4)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에는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때가 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자랑하는 것들, 무슨 학문이나 예술이나 업적 같은 것들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남아 있지 못하고, 그냥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지나간다.’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한가위’는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날이고, 사랑을 더욱더 실천해야 하는 날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하는 날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회개’인데, ‘회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참된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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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한가위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름다운 이론이나 추상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누는 사랑은 신뢰를 쌓고, 소통을 통하여 이해와 깊은 유대를 형성합니다. 하상욱 시인은 가족을 ‘영어’ 같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게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이랍니다. 또 때로는 ‘한국어’ 같다고도 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참 모르겠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가족은 어떠한가요? ‘영어’ 같은가요? ‘한국어’ 같은가요? 우리가 마음으로 대화한다면 우리 가족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나눔과 희생을 통한 사랑의 언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를 이웃과 나눔으로써,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 덕분에 살아갑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면 더욱 행복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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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과 사랑을 나누는 한가위에,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노고를 축복하시고 손수 풍성한 결실을 내주셨음에 감사드리며(제1독서 참조), 세상에서 고생한 의인들을 그분께서 수확하여 거두시는 심판의 때를 선포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은 그러한 하느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삶에 관한 가르침(루카 12,1─13,9 참조)입니다.
부자의 속마음에는 유독 ‘모으다’(17.18절)와 ‘쌓아 두다’(19절) 같은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자신이 거둔 소출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은커녕, 그 재산에 기대어 안심하고 즐길 생각뿐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느님도, 나눔을 실천할 이웃도 없습니다.
더 벌어서 계속 더 큰 곳간을 짓고 그것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탐욕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가장 큰 유혹이며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자를 “어리석은 자”,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줄지 않는 보물을 쌓으라고 자주 말하면서(루카 12,33; 16,9; 18,22 참조), 그 방법으로 이웃에 대한 자선을 제시합니다.
한편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19,17)
모을 줄만 알고 통장에 찍힌 금액에서 만족과 안정을 찾는 세속적인 부자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눔과 자선을 통하여 가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하느님 나라의 부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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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제1독서) 한 해 동안 공들인 수고의 결실을 거두는 명절 한가위입니다. 오늘 밤 떠오를 한가위 보름달처럼,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추석은 풍성함을 만끽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둔 풍요로운 결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여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부유한 농부가 그 소출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들 속에서 우리는 그의 관심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여기서 ‘모아 두다’ 또는 ‘쌓아 두다’라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한 농부의 관심사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두고 쌓아 두는 일이었습니다. 모아 둔 것을 앞으로 어디에 쓸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그의 고민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장소가 좁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전 곳간들을 허물고 더 큰 곳간들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으는 데만 마음을 쓸 뿐,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아 두고 쌓아 두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바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현세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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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 명절입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모든 분에게 주님의 풍성한 축복이 내리길 바라면서 인사드립니다. 물론 수도원 문화도 예전과 달리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한 가지가 바로 명절에 친가 방문이 허락되었습니다. 물론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신 저와 같은 고아들이야 갈 곳이 없으니 당연히 수도원에 머물지요. 어쩌면 외롭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조용한 수도원에 머무는 것도 참 좋습니다. 다만 저는 3년 동안 원외 거주 관면을 받고 안성에 머물고 있기에, 금년에도 안산 여동생네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흔히 한가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 라는 한가위 덕담이 단지 말이 아닌 실제 우리네 삶의 현실이 되었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추석 차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너무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남아넘치는 재물을 쌓아 두기 위해 넓고 큰 곳간”(12,18)을 새롭게 짓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그보다는 이미 있는 헌 곳간에 넣을 만큼만 쌓아 두고, 남은 재물일랑 춥고 배고픈 형제자매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길 기대합니다. 너그럽고 정다운 사람 되시어 이번 명절만큼은 마음도 화통하게, 씀씀이도 넉넉하게 이웃에게 베푸시길 바랍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고 하니 썩어 없어질 세상 곳간에 쌓아 두지 말고 영원히 썩지도, 없어지지도 않을 하느님의 곳간에 쌓아 두는 게 참으로 지혜롭고 축복받는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입으로는 형제요 가족이네,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여러분은 없는 가난한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말이 아닌 나눔을 통해서 더 풍성한 명절을 맞이하고 보내길 바랍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2,17)라고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나요. 또 누가 가진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고 비난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쓰실 재물이 있으시다면 충분히 쓰시고, 남는 수확물을 보관하기보다 나누고 베풀면서 몸도 마음도 충만한 기쁨과 보람 느끼도록 인심 팍팍 쓰세요. 베푸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일했고 3년 동안 생활하면서 경험했지만, 제대로 잡수지도 못하고 새 옷 한번 사 입지 못하고 보약 한번 제대로 해 잡수지 못한 채 아끼고 아껴서 모아 둔 재산, 그 남은 재산 때문에 자녀들 간에 재산 싸움으로 인해 재산은 재산대로 남 좋은 일 시키고, 자식들 서로 간에 불화와 불목을 남기고 떠난다면 편히 눈이라도 감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정말로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 지금 가지신 재산일랑 돌아가신 조상님들 생각해서 그들의 은덕이며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 생각하신다면 가난한 친형제 자매들과 기꺼이 나누는 게 조상들에 대한 마땅한 보답이 될 것이며, 더욱 이웃의 가난한 이웃에게 아름답게 나누신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며, 덤으로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디 행복하고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는 한가위 명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시67,7)라는 노래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마음에 새기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추석 연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한시름 다 내려놓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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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론 중에 종종 제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 시대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공감하십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모두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라면 봉지를 모아 공을 만들어 야구했다고 하면, “왜요?”라고 묻습니다. 재래식 화장실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절대로 그런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30년 전만 해도 모두 비슷하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지 않고 또 경험도 하지 않았으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대 간 격차가 크다 보니 대화가 되지 않아 현대 사회는 더 외로운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30년 전에 10% 미만이었던 1인 가구가 현재는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섰고, 수년 내에 40%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외로운 사회 안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함께’라는 것을 하나의 짐처럼 생각하기에 정서적인 고통이 커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분열만 보이게 됩니다. 생각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삶을 사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다른 삶도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들도 함께해야 할 이웃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인데, 지금의 우리는 점점 혼자라는 틀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그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말하는 한가위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보름달처럼 밝고 훈훈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나고 하느님과 조상님들과 함께하는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날인데 가족의 붕괴로 혼자서 이날을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가족과의 다툼으로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고,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인데도 함께할 이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마지막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의 말씀처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랑의 삶만이 언제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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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만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합니다. 상대방을 항상 이해할 수 없고, 항상 옳지도 않겠지만, 의견이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추석 명절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합니다. 부모와 이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 방법이 다릅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며 가족 서로 간에 성숙한 사랑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명절을 통한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 계실 때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 유대 관계를 지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니고, 아름다운 미풍양속입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균관’에서 명예학위를 받게 되셨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 공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 신자는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사실“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습니다.”(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제 134조1항)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지속됩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서 천상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 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참고로 불교의 49재를 말씀드립니다. 49재는 한마디로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 즉 불공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25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한 후 득도하여 48년간 설법을 하셨고 49년째에 세상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49라는 숫자가 중요하고 또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재를 치르는 날 사이의 기간을 ‘중유’라고 하여 이 기간에 생전의 업에 따라서 다음세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즉 모든 중생은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싸우다), 아귀(다툼), 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며 이 가운데 아수라, 아귀, 지옥을 ‘삼악도’라 하여 고통과 지옥으로 가득찬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49재는 죽은 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공입니다. 49일째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날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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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너 우리 한가위만 같기를>
루카 12,15-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 너 우리 한가위만 같기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나 너 우리
높푸른 하늘이 되어
고운 벗님들
정성껏 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넉넉한 땅이 되어
고운 벗님들
고이 모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고운 벗님들
부드럽게 감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소담한 송편이 되어
고운 벗님들
살맛 돋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도란도란 밥상이 되어
고운 벗님들
오붓하게 보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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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찬 한가위 되셰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는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베풀어졌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집착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것인 양 여기고,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임을 깨닫고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가지게 되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소유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전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놀라우신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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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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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
-찬양, 심판, 지혜-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 67,1)
지혜로워야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로 인해, 탐욕에 눈이 멀어 지옥을 자초해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평생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평생 배우고 배워도 여전히 배워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도 지혜를 가르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못 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다산>
날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려가는, 비워가는, 내려 놓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공자는 네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측을 버렸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을 버렸으며, 고집을 버렸고, 이기심을 버렸다.”<논어>
한마디로 지혜로웠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웠던 현인 공자입니다.
오늘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오늘은 삶의 여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여정이요 참 많이도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입니다. 오늘 주제는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기까지 귀가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계속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늘 강조했던 바가 일생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 사계절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검이 삶의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날로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을 살게 합니다. 저로 말하면 오후 5시,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후 3-4시쯤, 가을철에 속하는 인생들 역시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인 가을철 답게 부지런히 노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외적 수확은 어느 정도이고 갈수록 기도생활, 공부생활에 치열한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졸업이 없는 평생 공부요,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영적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 어떻게 하면 보람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샘솟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인 가을철에 걸맞는 찬양의 삶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감미로운 세상에 경탄하는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태양의 찬가를 불러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 찬양 감사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맛이 아닌 하느님 맛으로, 진리맛으로 살게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하느님 중심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요엘서의 말씀, 오늘 세상에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런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불행입니다. 도대체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참된 겸손의 삶입니다.
둘째, 심판입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정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끝날 여정에 늘 심판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가 모두인 듯 사는 것입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철, 언젠가는 주님도 우리 인생을 수확해 가실 것입니다. 과연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잘 익어가는 인생들인지요?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실감나게 종말 심판 수확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찼습니다.”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던 이들은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이자 안식의 평화이기에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오는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하늘에 쌓았던 보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 섬김, 자비, 찬양, 감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상급과 더불어 행복한 천국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상(地上)에서부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천상(天上)의 삶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탐진치(貪瞋癡)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탐욕의 무지가 우리를 눈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해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무욕의 지혜로운 자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소유의 쾌락이 아닌 존재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부자가 참 어리석습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무지의 탐욕으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같습니다. 하늘을 향한 창도, 이웃을 향한 창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느 창도 없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이런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스스로 자초해 이런 부자같은 지옥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자였더라면 땅의 곳간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았을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자선의 삶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땅의 곳간에 곡식과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자족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조롱하는 하느님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세상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을,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찬양의 삶, 늘 심판을 염두에 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의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곡 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시편5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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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의에 따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한가위 명절에 듣는 오늘 요엘서, 주님이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셨다는 말씀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말씀입니다.
정의에 따라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내려주신다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개신교 번역은 적당히 주신다고 번역하고, 우리의 옛날 번역은 흠뻑 주신다고 번역했는데 어떤 뜻입니까?
우리의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주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주신다는 뜻입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의 계절 정의에 우리가 따른다면 곧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면 그 정의에 따라 하느님께서 적절히 비를 주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저의 이런 이해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요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듣는 그 유명한 말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정의에 따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은 마음을 찢는 회개를 너희가 하면 그 보상으로 하느님께서 적당한 비를 주시고 풍성한 수확을 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한가위가 ‘가을 한가위’가 아니라 ‘여름 한가위’라고 합니다. 요즘 여러 곳 동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적절히 비를 주신 것이 아닌데 우리가 하느님의 계절 정의에 따르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두 번째 독서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일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우리가 되어주는 그 ‘되’로 받는다는 말이고 그 되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자연도 사람도 하느님도 우리가 한 대로 또 그 ‘되’로 되돌려줍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요엘서가 말하는 ‘정의에 따라서’입니다.
그러니 올해 한가위에 내가 풍요롭지 못하다면 내 탓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끝이 빈손이라면 그것도 하느님 앞에서 빈손이라면 그것 또한 내 탓입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빈손이라니! 마음을 욕으로 채우지 않고 사랑으로 채웠다면 풍요로울 텐데!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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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21)
<한가위만 같아라!>
오늘 복음(루카 1215-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추석)'입니다. '8월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을 지닌 '한가위'는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나쁜 것들과 안 좋은 것들은 이제 잠시 다 내려놓고, 먼저 세상을 떠나신 조상님들과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의 은덕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한가위 의미에 걸맞게 좋은 것들이 풍성한 추석 명절 보내시기를 빕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입당송)
추석 명절에 들려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처럼, 우리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는 인생'입니다. 하느님께서 채워주신 온갖 복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지금 소유한 것을 결코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의 업적(실천)' 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결정적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우리 가운데 있는 가장 약한 이들,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로 당신이라고 하셨으니, 그들에게 먼저 나의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4,13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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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 15)
들판은
더 한층
깊어지며
황금들녘으로
노랗게
물들어 갑니다.
다시 뜨거운
한가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계절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가위의
중심에는
은총으로
거두어들인
수확으로
차례를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언제나
가장 좋은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이와 같이
감사로
이어져
있습니다.
행복은 재산에
있지 않고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은총 가득한
발걸음으로
가을들판이
아름답게
물들듯이
내맡기는
우리의 삶도
욕심없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가는
순리의
시간입니다.
마음을 숙여
하느님께
정성들여
기도드리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목숨이 하나이듯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십니다.
탐욕이 아니라
목숨이며
목숨은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나가는
길마다 감사의
한가위가
되게하십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고마운
축복의 한가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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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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