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영화학의 선구자, 토마스 엘세서(1943~2019)
사진 씨네21 오계옥.
국내에도 번역된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편집자이자 <영화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의 공동 저자인 영화학자 토마스 엘세서가 지난 12월 4일 76살로 세상을 떠났다. 초청 강연차 베이징에 머물렀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알았던 서구 학계의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영화학의 선구자로 오랫동안 자리해왔으며 타계 직전까지도 세계 곳곳의 학술 행사 및 초청 강연에 역동적으로 참여했던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43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엘세서는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수학했으며 할리우드영화 팬이었던 할머니와 유럽 예술영화를 사랑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시네필이 되었고, 1960년대 후반부터 파리와 런던에서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할리우드와 유럽 작가영화 모두에 대한 관심, 이들간의 긴장 및 영향 관계에 대한 호기심은 그의 지적 여정과 연구에 지속적으로 반영되었다. 할리우드에 관한 엘세서의 연구는 고전기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2000년대에 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를 영화 제작 과정은 물론 영화적 경험의 모든 것에 스펙터클의 가치를 부여하는 이벤트로서의 영화로 규정했고(<할리우드의 존속>),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가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와 이미지는 물론 관객 반응에 이르는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도 다양한 관객의 해석을 열어놓는 ‘포스트-작가성’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카메론의 <아바타>: 모두를 위한 접근>). 또한 잉마르 베리만, 조셉 로지, 미하엘 하네케, 클레르 드니, 라스 폰 트리에, 파티 아킨, 크리스티안 페촐트 등 많은 유럽 작가들의 영화를 유럽의 초국가적 변모에 따른 국가영화의 문화적, 산업적 재구성이라는 관점은 물론 2차대전 후 유럽의 갈등을 구성해온 타자와 트라우마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폭넓게 논의해왔다.
영화 형식에서 문화적, 심리적 긴장을 읽어내다
1970년대에 그는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에서 영문학과 영화를 가르치며 영화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했고, 비평 저널 <모노그램>을 편집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은 지금도 멜로드라마 연구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 가족 멜로드라마에 대한 견해’(1972)다. 이 글에서 엘세서는 더글러스 서크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를 특징짓는 화면구성과 촬영기법, 음악의 독특함을 2차대전 후 미국 사회의 문화적 맥락 및 부르주아 주체의 심리적 위기와 연결시킨다. 이를 통해 엘세서는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작가를 발견하고 인증하는 작가주의적, 시네필적 감식안을 1970년대 ‘스크린 이론’의 주된 과제인 대중영화의 이데올로기 비평으로 연장하는 현대적 영화학의 방법론을 예시했다. 그가 2005년 68혁명 이후 영화를 사회적, 기술적, 심리적 장치로 개념화하는 현대영화 이론으로의 전환을 영화에의 매혹에 사로잡힌 시네필리아와의 급진적 단절이 아닌 ‘생산적 각성’(productive disenchantment)으로의 이행(<시네필리아, 또는 각성의 활용>)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존속은 어떻게 대중문화가 사회적 위기에 주목해왔는지, 어째서 패자가 항상 패배할 만한 이들은 아니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이 글의 주장은 <82년생 김지영>처럼 한국 고전기 멜로드라마의 신파 모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희생자의 욕망과 정서를 표현한 최근 사례와도 공명한다.
영화사 연구의 발전이라는 엘세서의 또 다른 기여 또한 영화 형식에서 문화적, 심리적 긴장을 읽어내는 방법론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뉴 저먼 시네마라는 역사적 운동과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라는 작가를 2차대전 후 독일의 트라우마와 파시즘에 대한 대응으로 고찰한 저서(<뉴 저먼 시네마의 역사> <파스빈더의 독일: 역사, 정체성, 주체>), 그리고 바이마르공화국 영화를 낭만주의 및 표현주의와 연결시킨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 국가적 상상계의 구축과 문화산업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다룬 저서(<바이마르 영화와 이후>)에서 입증된다. 또한 그는 1970년대 ‘스크린 이론’을 벗어나 1980년대부터 서구 영화학계에서 발달한 영화사 연구에도 주요 학자로 참여했다. 1990년 그가 공동 편집에 참여하고 출간한 <초기영화: 공간, 프레임, 내러티브>는 1910년대 중반까지의 초기영화가 고전 할리우드영화와 구별되는 고유한 내러티브, 화면구성, 관람 경험을 구성하는 방식을 다각도로 고찰한 중요한 연구를 모았다. 이는 조선영화를 연구해온 국내 영화사 연구자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에 대한 엘세서의 관심은 왜 그가 199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기술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말해준다. 그는 지금은 서구 인문학의 주목할 만한 방법론 중 하나로 정착된 미디어 고고학을 영화학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2003년 세네프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한했을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디어 고고학이 “‘영화는 왜 존재했고 영화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영화의 상상력을 다시금 중요하게 제기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은 필름과 영화관에 근거한 기존 영화와는 전례없이 다른 영화 형식이나 경험을 도입하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아니다. 필름과 영화관의 한계를 벗어나 영화를 다양한 플랫폼과 이미지 흐름으로 존재하게 하는 디지털 기술은 과거의 영화와 인접 미디어를 다시 보게끔 하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이 타임머신을 작동시키는 미디어 고고학의 렌즈는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었는가는 물론, 영화는 어디에 있고 영화가 인간의 발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왔으며 또 여전히 맡고 있는가”(<미디어 고고학으로서의 영화사: 디지털 영화를 추적하기>)라는 영화학의 전통적인 문제를 다시 조명한다. 이 렌즈를 통해 투과된 그의 연구는 한편으로는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새로이 대면할 수 있는 성찰의 인터페이스를 작동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21세기 퍼즐 필름의 한 경향으로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이 지각하는 세계를 통해 관객을 인지적 게임으로 초대하는 ‘마음-게임 영화’(Mind-Game Film), 영화관 바깥의 플랫폼인 미술관에서의 영화적 미디어 설치작품, 유튜브, 비디오 게임, 가상현실과 접속하면서 사유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이루었다.
1세대 영화학자 그 이상의 존재
돌이켜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엘세서는 영화학을 대학의 학제로서 정립하고 많은 후학들을 양성한 1세대 영화학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영화관과 집단적 경험에 귀속되는 전통적 영화를 다루는 영화학(Cinema Studies)에서 영화의 주변에 선회하는 예술과 문화, 미디어와의 교통과 긴장 속에서 영화의 역사와 존재론을 근심하는 영화미디어학(Cinema and Media Studies)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했다. 이에 호응하듯 그의 지적 불빛은 작가성과 할리우드, 초기 영화와 국가영화를 넘어 영화미디어학이 다루게 된 새로운 주제와 대상 곳곳을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다양한 관심은 결국 영화에 대한 질문, 영화이론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근심과 결별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근심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영화의 새로운 존재론은 영화의 사진적인 존재론을 넓은 의미의 그래픽 양식에서 중요하지만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양태로 만드는 것이다”(<유럽영화와 대륙철학: 사유 실험으로서의 영화>). 영화를 세계를 비추는 창이자 거울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인식론을 넘어 사유하는 현실로서, 역동적으로 자신의 형태를 갱신하는 예술로서, 인간의 감각, 지식, 존재와 소통하는 경험으로서 정립하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지적 여정은 지상의 스크린에서는 암전되었지만, 그 여정의 유산이 투영하는 그림자는 이후 영화미디어학의 스크린들에서 재생될 것이다. 글 김지훈(중앙대학교 교수) 2019-12-13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