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祭享)하고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서원(書院)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였고,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으며, 유생들은 어느 서원이든 등을 대고 있어야 벼슬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거기다 서원(書院)은 조정의 지원까지 있었으니, 내세울 것도 없는 것들이 거들먹거리고 싶어서 돈푼만 있으면 마구 서원(書院)을 세우기 시작해 18세기가 되자 전국에 서원이 1,000개가 넘어섰다.
아니 훌륭한 교육기관이 이렇게 많고, 거기서 인재들이 송사리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서원(書院)이라는 것이 초창기에는 공부도 제법 시키고 하더니, 점차 파벌로 나뉘어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고, 종장에는 부패의 온상으로 변해 버렸다.
유생이 되거나 서원의 일꾼이 되면 군대를 안 가고 부역을 안해도 되니 이놈 저놈 모조리 돈과 빽을 써서 유생으로 등록하거나 서원(書院)에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다 관립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촌구석 지배권을 놓고 저희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난리였다.
또한 제사 때가 되면 경비 염출을 위해 액수가 적혀 있는 묵패(墨牌)를 각 관아의 부호들이나 수령들에게 돌렸는데, 이 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행패를 당할지 몰랐으며, 수령인 경우에는 서원(書院)이 속해 있는 당파까지 나서서 모가지를 날리는 수도 있었다.
서원(書院)은 이렇게 돈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시회(詩會)를 열어 먹고 마셔 경비를 없앴다. 이렇게 저희끼리만 처먹고 놀면 누가 뭐라 그래? 이것들이 지체가 좀 낮은 양민을 보면 양반에게 대들었다느니, 선비를 능멸 했다느니 멀쩡한 사람들을 툭하면 데려다 요절을 내니, 서원(書院)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관가보다도 더 높았다.
1864년 이런 꼴을 보다 못한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대원군의 재가를 받은 서원 47개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書院)들을 모조리 폐쇄하고 건물을 헐어버리도록 명한 것이었다.
서원(書院)이 헐리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전국의 유생(儒生) 수천 명이 상소문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꿇어앉아 도끼를 옆에 놓은 채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도끼를 옆에 놓은 것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치라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설령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 만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원 정리에 엄청난 개혁의 힘을 쏟았고,이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원군은 '만동묘(萬東廟)'도 폐지했다.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을 모시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신종(神宗)에 대한 고마움으로 조선은 그때까지 비싼 돈을 처들여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나라에 의해 이미 망해 버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당이라니? 그것도 명분을 운운하며, 그 나라에서도 모시지 않는 사람을 아직도 우리가 몇백 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니..
이 만동묘(萬東廟)는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화양동 서원이 복구되면서 다시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철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중국을 종주국으로 보는 철저한 사대주의 지식인들이 떠 받들고 있던 만동묘.
대원군(大院君)은 이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을 폐지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대원군의 치세중 결정적인 실수인 경복궁 중건이 발목을 잡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