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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그린 북> 작품상 수상 장면
잡음이 끊이지 않는 수상 결과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수상작으로 <그린 북>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이를 지켜본 이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그들의 수상에 박수를 보냈지만, 스파이크 리 감독은 발표 직후 극장을 퇴장하려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조던 필 감독은 박수를 치지 않는 행동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다수의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 시상식이 끝난 후 “<그린 북>의 수상을 인정할 수 없다”는 뉘앙스의 글들이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다.
그들이 불만을 지닌 이유는 이렇다. <그린 북>은 개봉 당시 여러 이야기로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던 영화다. 극의 중심인물이자 실존 인물이었던 셜리 박사의 후손은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밝히며 영화 내용이 허위임을 주장했다. 영화 속 셜리 박사와 우정을 쌓는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실제 아들, 각본가 닉 발레롱가와 영화의 연출을 맡은 피터 패럴리 감독의 과거 인종 혐오 발언과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인종차별 문제를 정확히 직시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셜리(마허샬라 알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토니(비고 모텐슨)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선 ‘백인 구원자 서사’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91년의 역사를 지속하는 동안, 아카데미는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 선택을 여러 번 반복해왔다. 올해처럼 논란을 불렀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정리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vs <시민 케인>* 제14회 아카데미 시상식(1942) 작품상 후보작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수상) <시민케인> <애정은 강물처럼> <천국의 사도 조단> <작은 여우들> <말타의 매> <요크 상사> <서스픽션>
(왼쪽부터)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시민 케인>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은 25세의 나이로 연출, 제작, 주연을 도맡은 오손 웰즈의 천재성을 증명한 작품이다. 제1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아홉 부문에 이름을 올린 <시민 케인>은 각본상 트로피 하나를 챙기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옐로 저널리즘의 선구자, 윌리엄 허스트가 자신을 풍자하는 <시민 케인>을 얄밉게 여겨 훼방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존 포드 감독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역시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지만, <시민 케인>을 외면한 제1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역대 최악의 시상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록키> vs <네트워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택시 드라이버>* 제49회 아카데미 시상식(1977년) 작품상 후보작
<록키>(수상)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바운드 포 글로리> <네트워크> <택시 드라이버>
<록키>
(왼쪽부터) <네트워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택시 드라이버>
제작비 대비 약 234배의 흥행 수익을 올린 <록키>는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자랑하며 제49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문제는 그의 경쟁작 역시 쟁쟁했다는 것. 미디어에 대한 풍자가 돋보인 수작 <네트워크>,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재로 제작한 웰메이드 정치 스릴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그의 경쟁작이었고, 두 작품은 사이좋게 각각 네 부문의 트로피를 나눠가졌다. 그해 진정한 비운의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평론가들의 극찬을 얻었지만 정작 시상식에선 빈손으로 돌아가는 굴욕을 겪었다.
<보통 사람들> vs <성난 황소>* 제53회 아카데미 시상식(1981년) 작품상 후보작
<보통 사람들>(수상) <광부의 딸> <엘리펀트 맨> <성난 황소> <테스>
(왼쪽부터) <보통 사람들> <성난 황소>
평범해 보이지만 상처로 얼룩진 한 가정이 그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 로버트 레드포트의 연출 데뷔작 <보통 사람들>은 제5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감독상, 각색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품에 안는 저력을 선보였다. 가족 드라마로선 훌륭한 작품이었으나 작품상을 품에 안기엔 어딘가 모자랐다는 평을 받은 영화. 게다가 경쟁작이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였으니 말 다 했다. 촬영과 각본,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까지 흠잡을 데 없었던 <성난 황소>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편집상을 받는 데 그치고 말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vs <죽은 시인의 사회> + <똑바로 살아라>*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1990년) 작품상 후보작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수상) <7월 4일생> <죽은 시인의 사회> <꿈의 구장> <나의 왼발> ※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는 후보 언급되지 않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왼쪽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 <똑바로 살아라>
29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원히 고통받는 수상작. 고집 센 유태인 여사 데이지(제시카 탠디)와 흑인 운전사 호크(모건 프리먼)의 우정을 그린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작품상을 비롯해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대부분 이 결과에 반기를 들었는데,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비롯해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 그해 작품상 후보로 올랐기 때문. 제4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그해 다수 시상식의 작품상 후보로 호명된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를 후보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도 논란이 됐다.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를 소개하던 킴 베이싱어는 “<똑바로 살아라>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가장 큰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밝히며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와 흑인 감독을 후보에서 내친 아카데미 측에 비판을 날렸다
올해 <블랙클랜스맨>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찾은 스파이크 리 감독은 <똑바로 살아라>의 한 장면과 같이 양 손에 LOVE와 HATE가 새겨진 반지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그린 북>이 작품상을 받은 데 분통을 터뜨린 그는 시상식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항상 누가 운전할 때마다 지는 것 같다”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늑대와 춤을> vs <좋은 친구들>* 제63회 아카데미 시상식(1991) 작품상 후보
<늑대와 춤을>(수상) <사랑의 기적> <사랑과 영혼> <대부3> <좋은 친구들>
(왼쪽부터) <늑대와 춤을> <좋은 친구들>
또 마틴 스콜세지다.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에 이어, 그의 걸작 중 한편으로 평가받는 <좋은 친구들>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출과 주연을 도맡은 <늑대와 춤을>에 밀려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에 작품상 트로피를 내준 제53회 시상식과 더불어 오스카 최악의 선택으로 기억되는 시상식. <좋은 친구들>이 거둔 아카데미 실적은 조 페시가 수상한 남우조연상이 전부였다. 작품상과 각색상, 촬영상 등 주요 부문을 포함한 7개의 트로피가 모두 <늑대와 춤을>에게 돌아갔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vs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1999년) 작품상 후보
<셰익스피어 인 러브>(수상)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인생은 아름다워> <엘리자베스> <씬 레드 라인>
(왼쪽부터) <셰익스피어 인 러브> <라이언 일병 구하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오스카 최악의 선택, 여기 하나 더 있다. 영화의 문을 여는 오하마 해변 전투신에서부터 관객을 전쟁터로 내몰아버리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게 밀려 작품상을 타지 못한 것. 오스카와 영 연이 닿지 않는 편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두 번째 감독상을 타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13개의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던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작품상을 비롯해 7개의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작품상만큼 논란이 됐던 부문이 있었다면 여우주연상. 기네스 펠트로가 <엘리자베스>의 케이트 블란쳇, <원 트루 씽>의 메릴 스트립을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손에 넣었다.
<시카고> vs <피아니스트> <갱스 오브 뉴욕>*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2003년) 작품상 후보작
<시카고>(수상) <디 아워스> <피아니스트> <갱스 오브 뉴욕> <반지의 제왕2>
<시카고>
(왼쪽부터) <피아니스트> <갱스 오브 뉴욕>
뮤지컬 영화로서 <시카고>가 훌륭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작품상 수상작으론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캐서린 제타 존스, 르네 젤위거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빛났던 <시카고>는 <피아니스트> <갱스 오브 뉴욕> 등의 쟁쟁한 작품들을 누르고 작품상을 수상했다. <택시 드라이버> 이후 26년(!)이 지난 2003년까지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오스카와 악연을 이어가는 중이었는데, 이유인즉슨 10개 후보에 오른 <갱스 오브 뉴욕>이 단 하나의 상도 타지 못했기 때문. 감독상은 <피아니스트>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돌아갔다.
<크래쉬> vs <브로크백 마운틴>*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2006년) 작품상 후보작
<크래쉬>(수상) <카포티> <브로크백 마운틴> <뮌헨> <굿 나잇, 앤 굿 럭>
(왼쪽부터) <크래쉬> <브로크백 마운틴>
흑인, 백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미국 내 인종 차별을 조명한 <크래쉬>는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을 품에 안았다. 예측을 벗어난 결과에 모두가 시끌시끌했는데,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밀어낼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폴 해기스 감독조차 결과에 얼떨떨함을 밝혔을 정도. <크래쉬>가 그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지 못한(심지어 골든글로브는 드라마와 뮤지컬코미디 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한다) 작품이었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글 유은진(온라인뉴스2팀 기자) 2019-03-01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