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 Story
1939년 폴란드의 바르샤바, 국영 방송국에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고 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에이드리언 브로디)은 별안간 가해진 폭격으로 연주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유대계 폴란드인인 스필만의 가족들은 바르샤바를 떠나야 할지 말지를 망설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는 다소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나치 군대가 바르샤바에 들어오고 그들은 도시 한켠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게토를 만든 뒤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1942년, 나치는 게토의 유대인들을 기차에 실어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데 이때 스필만을 제외한 그의 가족들은 모두 강제로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 Review
200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는 로만 폴란스키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인가 80년대 이후 폴란스키가 다소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신작을 기다리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한정되고 닫힌 공간 속에 놓인 인간의 행동을 비범하게 다루었던 일련의 60년대 영화들과 걸작 필름누아르 <차이나타운>(1974) 덕택이었을 것이다.
유대계 폴란드인이었던 폴란스키의 유년 시절에 관한 몇몇 에피소드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그의 가장 자전적인 영화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 한편 이 영화는 끔찍한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채의식을 언제나 간직해왔다고 말하는 폴란스키가 그의 부모 세대 특히 수용소에서 죽어간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잔혹한 ‘동화’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군의 탄압과 학살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는 주인공 스필만의 눈에 비친 악몽은 스필버그의 <A.I.>에서 로봇 소년 데이빗이 경험한 악몽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스필버그가 만든 ‘진짜’ 홀로코스트영화는 <쉰들러 리스트>가 아니라 <A.I.>임이 분명하다. 즉 <피아니스트>와 <쉰들러 리스트>간의 섣부른 비교는 우리의 착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필만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되어 어렵게 생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반부와 기차에 태워져 죽음의 수용소로 향한 가족과 헤어진 뒤 홀로 남은 그가 나치의 감시를 피해 은신처를 전전하는 과정을 다룬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다. 폴란스키는 여전히 자신이 감히 가스실에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곳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학살은 분명 디제시스의 일부일 터이지만 <피아니스트>에서 결코 그것이 시각화되는 법은 없다. 추측건대 그것은 스필버그로 하여금 리얼리즘적 재현이 아닌 동화적 환상의 구조 속에서만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게끔 한 윤리적 압박이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물론 <피아니스트>가 실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제의를 거절한 바 있는 폴란스키가 굳이 실존인물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경험담을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유대계 폴란드인인 스필만은 프랑스와 영국의 참전 뉴스를 듣고 안심하지만 결국 나치 군대가 바르샤비에 들어와 그들은 수용소로 가게 된다.
스필만이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가스실의 풍경은 폐허가 된 도시 바르샤바로 치환되고 그의 눈앞엔 압도적인 악몽의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홀로 살아남은 그는 그런 식으로 홀로코스트를 대리-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치를 피해 유대인 게토의 담벼락을 넘은 스필만의 눈에 비친 잿빛 폐허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그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풍경이 바로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폴란스키가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의 고립적 상황을 묘사할 때 우리는 언뜻 그의 초기 걸작들, 이를테면 <악마의 씨>(1968) 그리고 무엇보다 <혐오>(1965)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폭력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다. 거기서 우리는 거리두기와 동일시 사이에서 다소 갈팡질팡하던 그의 시선이 극도의 냉담성을 발휘하는 순간을 발견한다. 이때 폭력은 단지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관객에 대한 시각적 폭력의 행사라고 봐야 한다. 폴란스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러한 폭력은 외설”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나치 장교의 서슬 퍼런 지시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다 순식간에 머리에 총탄이 박히고 마는 한 유대인의 모습을 바라보다보면 폴란스키의 말이 그저 허언(虛言)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스필만이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가스실의 풍경은 폐허가 된 도시 바르샤바로 치환되고 그의 눈앞엔 악몽의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홀로 살아남은 그는 그런 식으로 홀로코스트를 대리-체험하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물음으로 되돌아가 <피아니스트>가 폴란스키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면 대답은 아무래도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영화 뒷부분에 전개되는 독일군 장교와 스필만 사이의 관계는 결국 <피아니스트>를 다소 진부한 휴먼드라마로 종결되게끔 만든다. 이를테면 독일군 장교 앞에서 스필만이 지친 손가락에 간신히 힘을 모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애초에 의도되었을 감정적 자극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울림없는 영화적 클리셰다. 오갈 데 없는 실패작 <비터 문>(1992) 이후, <시고니 위버의 진실>(1994)과 <나인스 게이트>(1999)의 몇몇 부분에서 감지되는 빛나는 연출감각에 만족하며 폴란스키의 차기작을 기다려왔던 이들에게는 <피아니스트>는 흡족한 결과물은 되지 못할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폴란스키 자신보다는 스필만 역을 맡은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도 출연한 바 있다- 에게 더 의미있을 작품이 된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근래에 만들어진 폴란스키의 영화 가운데 가장 ‘고전적인’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애타게 폴란스키의 온전한 재기를 꿈꾸게 만드는 영화기도 하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