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8월 15일 ~ 17일 베델 평원의 모습
라이프지 사진작가 Bill Eppridge, John Dominis
1969년 뉴욕의 전원도시인 베델 평원에서 개최된 록 페스티벌로 정확한 명칭은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입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개최된 이유는 베트남전쟁 참전,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차별이 심각하던 당시, 평화와 반전을 외치는 젊은 히피족들이 중심이 되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정신을 음악으로 표출한 문화운동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에 공연한 대표적인 아티스트들은 롤링스톤즈, 야드버즈, 크림,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프랭크 자파 등 엄청난 뮤지션들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석했습니다.
이 이후로 기존 음악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등 실험을 즐겼던 뮤지션들은 팝의 새로운 장르를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성세대와 대립각을 세운 젊은 세대들은 60년대 팝 음악의 핵심 소비층이었고, 이는 자유, 사랑, 평화 등 근원적 가치를 갈구하는 히피 문화로 나타났다.
도어즈(The Doors),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Airplane), 재니스 조플린 (Janis Joplin) 등 사이키델릭 록 그룹들은 음악적 환영과 환각을 통해 정신적 도피처를 제공해주었고, 더 후(The Who) 같은 밴드들은 과격한 퍼포먼스로 억눌린 자유의 분출을 맛보게 해줬다.
1969년이 되었다. 마치 한 세대에 종언을 고하듯
팝 뉴스 한편에선 비틀즈의 해체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레드 제플린은 데뷔 앨범 [Led Zeppelin]으로 하드 락과 헤비메탈의 경계를 오갔고, 핑크 플로이드가 [Ummagumma]를 통해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 Murakami Ryu)는
자전적 성장 소설 [69]에서 1969년을 이렇게 묘사했다.
“비틀즈는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Abbey Road]를 발표했고, 롤링스톤즈는 [Honky TonkWomen]을 히트시켰으며, 머리칼을 마구 기른 히피들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다.
파리의 드골은 정권에서 물러났고,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969년은 그런 해였다.”
1969년 8월 15일 당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전경입니다.
사진으로만 봐도 엄청난 인파이다. 그런데 이렇게 까지 사람들이 모이게된 이유는 페스티벌 당일인 8월 15일이 되자 남자, 여자, 게이, 노숙자, 히피 등 축제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드스탁으로 향했습니다.
갑자기 퍼부은 빗물은 평원을 진흙탕으로 만들었고, 우드스탁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는 히피들의 돌출 행동들은 현장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특히, 많은 히피들이 자동차가 지구 환경을 해친다며 논밭으로 차를 밀어 넣고 빈 자동차를 점거해, 현장 교통은 마비 상태가 되었고, 이는 공연장 주변 20마일에 걸친 지역에까지 교통 대란을 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히피들이 공연장을 구분 지어 놓은 울타리를 무너트리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감지한 주최측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무료 공연으로 선언했습니다.
얼마나 히피들의 열정이 통제가 안될정도로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미국은 당시 정치,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월남전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전, 사랑, 평화를 외쳐댔던 히피들은 현실도피와 안위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생활상은 기성세대들에겐 단지 이상향만을 쫓는 소극적 저항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 반발심이 생긴 히피들이 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표출 한것같습니다.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 이후 세계적 록 음악축제로 발전하여 1994년과 1999년에 각각 25주년, 3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