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바위솔
20171020전라닷컴[특집- 지붕2]
절집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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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지붕은 설산(雪山)이다. 사바세계를 벗고자 하는 이들은 이 히말라야를 초월의 궁극으로 삼는다. 그러나 지붕은 어디에도 있고 저 아래에도 있다. 번뇌를 껴안고서야 번뇌를 여읜다는 철리는 불교의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그토록 사바의 오욕을 사랑하면서 사무치게 사바 너머를 간구하는 중생이 곧 부처인 까닭이기도 한다. 요컨대 열반은 번뇌 그 자체이며 설산은 지상 8천미터가 아니라 내 방 안에 있다는 헛소리다. 한송주의 시에 <설산>이 있다.
‘내 방안에 설산이 있네/ 갓푸른 산꾼이 되어/ 매일 그곳에 오르네// 유랑에 들뜬 자는 모르네/ 떠돌다 지친 자만이 아네/ 방안에 설산// 돌아와 옷고름을 풀고/ 발자국 보이지 않게/ 설산이 보이지 않게// 방안에서 하얗게 눈에 묻혀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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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붕이 많은 것은 탑이다. 한 탑 한 탑 서원을 자아올려 하늘에 닿게 하는 것이 탑 비손의 뜻이다. 그 탑 안에는 스님의 정골이 있고 세존의 말씀이 들어 있기도 한다.
그런데 절집에는 탑처럼 지붕이 여럿인 전각도 있다.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쌍봉사 대웅전 등이 대표적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5개의 지붕을 갖고 있고 금산사와 쌍봉사 것은 3개다. 이런 것을 목조탑파양식이라 부른다. 그 건물에 들어가면 안이 층마다 막혀 있지 않고 온통으로 훵하니 뚫려 있어 보기에 시원하고 어질어질하다.
법주사 팔상전에는 세존의 일대기인 팔상도가 생동하고, 금산사 미륵전에는 용화세계를 묘사한 벽화가 아름다우며, 쌍봉사 대웅전에는 삼존불의 미소가 가슴에 환희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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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림 송광사 가람의 지붕골을 절 뒤편 몰랭이에서 내려다 보는 것은 장관이다. 70여채의 전각이 처마를 잇대며 이루어놓은 기왓골의 이랑을 따라가다 보면 눈이 아리다. 그 천야만야 지붕 아래마다 천야만야 서원이 익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천년가람에 날개지붕을 단 탑이 없다. 그러니 지붕자랑도 그만 허랑해진다. 송광사에는 석탑도 석등도 없다. 물론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는 있지만 대웅전 앞에 섰게 마련인 석탑이나 석등이 일체 없다는 말이다. 감여가(堪輿家)들은 더러 송광사 터가 부유연화浮游蓮花혈이라 석물을 놓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애초부터 석탑을 조영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글쎄 어쩐지 석연치 않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 대신 지붕에 작은 지붕을 낸 특이한 건물이 있어 서운면을 해준다. 방장어른이 사는 삼일암 아래채인 하사당이 그곳이다.
조선초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건물인데 부엌 지붕 위로 들창을 내고 본채와 똑같은 맞배지붕을 씌웠다. 그러니까 환기용 솟을지붕인 셈이다. 다른 예가 없는 독특한 차림이라 해서 1963년에 나라에서 보물263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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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만 지붕이 있나. 지붕 아래에도 지붕이 있다네. 대웅전 천장 밑에 화려하게 벌린 닫집이 그것.
법당 연화좌 저 위에서 부처님을 장엄하고 있는 지붕이 닫집이다. ‘따로’의 옛말을 가져와 닫집이라 했다는데 이 또한 석연치 않다. 섬세한 공포와 복잡한 장식 아래 기둥이 매달려 있다. 원래 부처님이 연설할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한 일산을 상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닫집은 닫지붕으로 간명하게 처리되어야 온당했다. 일산은 얼마다 유용한 지붕인가. 거기에는 천계(天蓋)라는 엄청난 뜻도 들어있을 터이고.
참고로 닫집 구경을 하려면 여천 흥국사, 강진 무위사, 논산 쌍계사, 완주 화암사, 강화 전등사, 부산 범어사 등으로 가보라고들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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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서는 좀체 쳐다볼 수 없는 존귀한 지붕도 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승보(僧寶)에 해당하는 순천 송광사의 으뜸 당우인 국사전(國師殿)의 지붕이다. 워낙 지체가 높아서 중생들은 일 년에 한 번밖에 친견하지 못 한다. 승보의 어른인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종재날에만 국사전 지붕은 일반에게 그 융융한 골을 드러낸다.
국사전은 그 몸체가 단아하고 조촐해서 더 품격이 높다. 무위사 극락보전이나 도갑사 해탈문과 고졸한 양식면에서 닮아 있는데 셋 다 국보다. 떠들썩하고 교묘한 꾸밈보다는 수수하고 단순한 맞배차림이 도량에는 더 맞춤하다.
웅장휘황한 송광사 대웅보전 지붕의 겹처마 장엄보다도 뭇삶(중생)들은 5월 삼월불사날 송광절집에 가서 국사전의 순하고 가지런한 지붕 물매를 바라보며 은은한 선사들의 가르침을 정갈하게 새긴다.
국사전의 천장도 좋은 볼거리다. 기둥 하나로 힘을 받친 주심포식 건물에서는 보기힘든 우물반자를 하고 거기에 독특한 단청문을 둘렀다. 연꽃문을 놓은 것이야 그리 별나지 않지만 절집에서 보기 드문 청룡과 백호 단청을 입혔다는 것에 전문가들은 놀란다. 1970년대 초 국사전을 해체복원한 신영훈 목수는 천장에 숨겨져 존재를 몰랐던 백호단청을 찾아내곤 환호를 질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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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사자산 쌍봉사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붕을 만날 수 있다. 철감선사탑이다. 역시 국보다. 이 승탑은 그 섬세미로 천하제일이라는 데 절대 이의가 없다. 미술사가 유홍준은 “화강석을 밀가루 반죽 다루듯 빚어놓은 석공의 세공이 실로 경이롭다”고 찬탄했다.
기단부터 옥개까지 샅샅이 고운데 특히 지붕골의 섬연미가 백미다. 높이 돋을새김한 암수 골기와의 이랑으로는 방금 내린 겨울 빗줄기가 조르르 조르르 소리내며 흐른다. 빗물은 휘휘친친 둘러친 겹처마 서까래와 깜찍한 자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타고 암팡진 탑몸으로 흘러내린다.
몸돌 앞 뒤로 자물쇠(문비)가 채워져 있고 그 안에 선지식의 사리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네 천황과 한 쌍의 비천이 위엄과 자비로 비급을 수호하는데 하나같이 깊이 각인돼 돌 밖으로 떨쳐나올 듯 생생하다. 몸돌 아랫도리를 돌아가며 겹으로 연꽃이 벌어 있고 그 만다라 사이로 극락조가 원무를 춘다. 이 모든 장엄을 떠받드는 받침돌에는 여덟마리 사자가 매지구름을 밟고 서서 울부짖는데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은혜로운 법우를 간구하고 있다.
한겨울 쌍봉사에 가서 사자산 대숲바람에 귀를 씻으며 이 탑지붕의 끝없는 물매에 빠져들다 보면 이 주인공이 저승살림을 하나, 이승살림을 하나 영문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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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지붕은 우리에게 약도 베푼다. 정녕 약사여래의 가피다. 와송(瓦松). 땡볕과 눈보라 뿐인 기왓골에서 다육식물이 벙근다. 인욕의 지극이니 명약이랄 밖에. 수행자들을 지붕에 핀 이 기와솔로 정진하느라 덧친 상기(上氣)를 다스렸다. 지금은 와송이 지붕에서 땅으로 내려와 중생들의 신열을 돌봐주고 있다. 장흥 정남진 와송농장에 가서 시원한 와송즙 한 사발 들이키고 싶다. 요즘 좀 목이 마르다.
글 한송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