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손가락의 상처>/구연식
성인이 되었어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신체에 뚜렷하게 남을 정도면 그 상처에 대한 기억도 오래도록 갖게 한다. 나의 외손 새끼손가락에는 손가락과 평행한 일자(一字) 흉터가 지금도 선명하다. 낫 사용이 어설퍼서 손가락을 크게 다쳤는데도 엄하신 아버지의 꾸지람 생각이 먼저 떠올라 10살배기가 혼자 해결하려 했다가 오히려 피가 낭자하여 부모님에게 혼쭐 맞았던 상처가 있다.
1950년대 말 초등학교 다닐 때는 퇴비증산(堆肥增産) 운동이 있었다. 여름방학 때 숙제는 학생 1인당 건초(乾草) 몇 ㎏을 개학 때 자기 몸집보다 큰 건초더미를 배낭처럼 짊어지고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건초를 짊어진 채로 저울에 올라가서 무게를 재고 다시 몸무게를 재어서 건초 무게를 계산하여 출석부 같은 곳에 기록하고 모자라는 것은 다음날에 다시 가져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는 학급별로 팻말이 박혀있고 건초수집이 끝나면 학급별 풀 더미 크기를 비교하여 등수를 매겨 우수한 학급에는 학용품을 부상으로 주었던 시절이었다. 퇴비증산 운동은 학교뿐만 아니라 면에서도 마을마다 경쟁을 붙여 일등마을에는 각종 혜택을 주었다. 그 시절 마을 입구나 길모퉁이에는 헌 가마니를 뜯어 펼쳐서 먹물을 갈아서 쓴 「퇴비증산」이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마을 주민들은 공동으로 풀베기 운동에 참여했다. 먼 곳까지 풀베기를 나가 소달구지로 실어 날라 공동 퇴비장에 쌓아 놓아 면사무소 담장자로부터 할당량을 검사 받는 등 퇴비증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등학교를 전주 시내에서 다녔을 때도 퇴비증산 운동은 여전히 실시하여 학교에서는 풀베기 운동을 나갔다가 풀과 벼를 구분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논에서 벼를 베어서 주인아저씨가 교무실까지 쫓아와서 항의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농업이 제1 국가산업인 시대에 화학비료의 수급이 어려워 범국민적 정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뜻에서는 조상님들은 친환경적인 자연산 퇴비를 만들어 사용하여 금수강산의 옥토를 보존하면서 농사를 지어서 공해 없는 알곡으로 자손들을 거두어 반만년을 이어 왔다고도 자부심이 든다. 지금도 국가 영농정책은 화학비료를 제한하고 자연산 비료를 권장하여 토양의 미생물을 증식시키며 유기농 영농방법을 보면 조상님들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엄하셔서 아버지와 대화는커녕 옆에 서지 못했다. 아버지 몸에서는 짭짜름한 땀 냄새는 언제나 무서운 냄새였고, 학교 선생님의 냄새는 언제나 달짝지근한 향수 냄새는 친근하고 인자하신 냄새로 등교하면 선생님 냄새가 그리도 좋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기억된다. 여름방학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아서 방학 숙제로 건초 준비를 해야 했다. 난생처음 낫을 들고 뒷동산에서 풀을 베다가 그만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순간 허연 뼈가 보이더니 피가 뚝뚝 떨어진다. 아픔보다는 아버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와서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헝겊으로 감싸도 밖으로 피가 배어나온다. 다시 헝겊으로 에워싸고 아버지가 없는 뒷방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 밥상에 앉으려니 어색하여 왼손을 뒤로 젖히고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자세와 눈치가 이상했는지 어머니는 외손을 보시더니 손가락보다 몇 배나 크게 감은 헝겊 전체가 핏물로 물들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 놀라서 자초지종을 묻는다. 할 수 없이 여름방학 숙제 풀을 베다가 다쳤다고 말했다. 온 집안 식구 저녁 식사가 중단되고 이웃집에서 얻어온 빨간약(머큐로크롬)을 바르고 헝겊과 실로 동여매는 정도로 응급처치를 하고 다음 날 아버지를 따라서 금마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는 혼내기는커녕 내일 학교에 퇴비를 갖다 주신다고 한다. 나는 그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손가락을 보니 깊고 큰 상처가 손금처럼 많이도 그어져있는 것도 처음 보았다. 다음날 아버지는 고래 입보다 더 큰 지게 바작에 건초를 한 짐 지고 오셔서 학급 건초더미에 내려놓고 운동장에서 우리 반 교실 유리창 옆에 오시더니 ‘연식아 ! 네 풀 갔다 놨다.’ 하시면서 집으로 가셨다. 아버지의 건초 덕분에 우리 반은 1등을 해서 상품으로 연필 1자루씩 받았다. 담임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셨다.
우리는 타인과의 중요한 약속을 할 때는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며 행동으로 표시한다. 나의 새끼손가락의 흉터는 아버지의 고마움은 물론 세상만사의 섣부른 결론에서 심사숙고의 결론적 쉼표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의 얼굴과 무서운 땀 남새는 어머니의 젖 냄새처럼 좋아졌고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해결해주는 맥가이버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로 아버지는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성격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새끼손가락의 흉터도 조금씩 커지는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이는 새끼손가락의 흉터는 어설프게 낫질하여 내 몸에 상처를 내고 아버지에 대한 선입감을 바로 잡아주어 무서운 아버지를 고마운 아버지로 일깨워 준 증표이다. 세상에 남의 아버지가 나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 나의 아버지만 못하다. 남의 회초리는 감정의 회초리고 아버지 회초리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이다. (20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