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월 시집 『속울음』에서의 언어의 문제
언어는 우리의 정신이 호흡하는 공기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정신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정신을 만든다는 뜻이다.
구약 창세기의 ‘말씀logos’이라는 구절과 사도 요한이 복음서의 첫머리에 묘사한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는 하이데거가 그의 후기 철학에서 말하는 언어Sprache와 같은 맥락에 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는 전혀 다르다.
하이데거가 보는 언어의 본질은 정보 전달 또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그는 그런 음성적⋅문자적 표현을 언어라고 하지 않고 ‘이야기Rede’ 또는 ‘잡담Gerede’라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언어는 우리의 일상 언어가 아니고 이른바 ‘존재의 언어Sprache des Seins’로서, ‘존재의 의미Sinn von Sein’ 또는 ‘존재의 진리Wahrheit des Seins’, 다시 말해 어떤 존재자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언어는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내보이고, 나타나게 하며, 보게 하고, 듣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따라 사유하게 하고, 따라 말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낱말들 속에 담고 문장들 속에 담아’ 말하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당연히 존재의 언어를 먼저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말하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듣기이다.
존재의 언어는 자기 안에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가득 담고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울림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선언한 이유이다. 언어 안에 존재의 의미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인간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보 전달 또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 즉 사물이나 사건을 사실대로 밝혀내는 언어다. 다른 하나는 신神의 빛살로서의 언어, 곧 존재의 언어를 따라ㅡ말함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밝혀주는 언어다.
구자월 시인이 그의 시집 『속울음』에서 말하는 ‘언어’란 당연히 이 후자의 언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힘이 있는 언어는 모두 은유를 사용한 문장이다. 은유metaphor란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는 수사법이다. 다시 말해 일종의 허구다.
허구와 거짓말은 모두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거짓말은 사실의 여부와 관계가 있지만 허구는 사실보다는 믿음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그 결과 허구는 사실과 무관한 가상의 실재를 만들어낸다.
은유는 단지 시나 소설에 사용되는 문학적 수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거의 모든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근간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인간에게 은유를 지어내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정신은 거의 동물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는 은유, 곧 허구가 가상의 실재를 만들어 우리의 생각, 마음, 언어, 행동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언어는 은유를 통해 강력해지고 가상의 실재 안에서 막강한 힘을 축적해 왔다.
그러나 싸워야 할 적이 내면화한 지금의 세계에서는 우리 모두가 좀비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마저 가해자다.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 모두의 삶은 이렇게 타들어가고 부스러지고 있다. 진리가 때 묻고 상처투성이로 너절해졌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프랑스 클레르몽의 주교좌성당에서 십자군 원정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할 때, 누군가의 입에서 “신의 뜻이시다Deus Le Volt’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이 말 한마디가 대륙을 피로 물들인 원정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여 그 뒤 2백 년 동안 십자군이 저지른 약탈, 방화, 파괴, 강간, 살육을 정당화했다.
이렇듯 인간은 성직자마저 여호와의 말을 오염시켜 자기의 말로 왜곡했다.
구자월 시인의 ‘속울음’처럼 인간은 하늘의 언어, 진리의 언어를 땅의 언어, 인간의 언어로 변질시켜버린 것이다.
이 땅의 언어는 타락하고 폭력적이고 살벌해지고 분노에 가득 차고 왜곡된 지 오래다. 그래서 종점에서는 모두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저 슬프고 또 슬프다.
릴케는 시가 시인이 품은 욕망이나 열정을 토해 놓은 것이 아니고, 진리 안에서 노래하는 신의 숨결이며 빛살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앞에서 살펴본 ’존재의 언어‘에 응답하는 것, 즉 시원적 사유는 존재의 은총에 대한 메아리란 뜻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책무가 “은폐된 존재의 진리를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구자월 시인의 시 〈길道과 사람〉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이 길을 가면서
사람의 말로 길을 말했다
사람의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사람의 마음으로 다른 길을 냈다
갈림길마다 왼쪽으로 향했다
세월이 흘러, 흘러
길은 길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사실상 서로 이별했다.
구자월 시인은 말의 고향이 열十이며, 그 열의 나라는 하늘이 땅에 온 첫 동네다.라고 말한다.
구자월 시인은 수직으로 내린 비가 수평으로 땅에 누운 것이 홍수이며, 이는 물로써 수평을 수직으로 다시 세우고자 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마치 홍수처럼 여기저기 차고 넘치는 땅의 말을 하늘의 말로 바꾸는 지혜를 찾아 이 땅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수평의 말을 수직으로 세우면 다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말, 하늘의 말 즉, 맑은 생명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신구약성서의 곳곳에는 여호와의 말 또는 예수의 말씀을 반석 또는 시냇물에 비유해 그것이 존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다윗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시편 1:3)과 같다고 노래했다.
물의 언어라는 것은 천상과 천하를 계속 이어주고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언어이다.
비雨라는 것은 천상에서 천하로 떨어지고 어떤 비는 올라가기도 한다고 한다. 물의 언어라는 것은 천상과 천하를 계속 이어주고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언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랍비인 마르틴 부버M.BUBER,1878∽1965는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라고 표현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의 인칭人稱‘이다.
’존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에게 ’너‘ 또는 ’그대‘라고 부르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우리‘라는 공동존재이고, 존재의 세계는 모든 것이 인연을 맺는 세계, 그럼으로써 드디어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세계이다.
관계의 진리는 사랑이다.
’존재의 언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의 언어, 사랑의 언어, 기적의 언어인 것이다.
구자월의 시 〈그마음〉의 첫 구절이다.
늦가을 팥배나무 가지에
빨간 팥배가 오종종하다
팥배는 왜 팥알 크기로만 자랄까
기나긴 겨울철 허기진 산새들의
입을 기억하는 마음 때문이겠지
사랑의 본질은 ”∽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공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시인의 가슴은 팥배나무처럼 따뜻하여 올바른 길, 진리를 모르고 진리의 바깥에서 헤매고 있는 만물에 대하여 남몰래 숨어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내가 구자월 시인의 시집 『속울음』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그의 시가 효도孝道,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아 인간에게 전해주는 깊은 철학성哲學性과 세상 사람과 만물에 대한 따뜻한 그의 사랑이 면면히 녹아있는 서정抒情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이 땅의 인간들이 탁한 홍수 속에서 이물질의 존재를 깨닫게 함과 아울러 그 이물질을 삶의 여정에서 하나씩 걸러내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시를 썼다고 말한다. 진리를 모르고 하는 말과 행동 그 일체가 다 삶의 이물질이다. 타락한 언어를 원래의 순수한 하늘의 언어, 진리의 언어로 되살리기 위한 그의 의지와 노력이 이루어 낸 시집이 시집 『속울음』이다.
시인의 시 〈말의 집〉을 옮긴다.
말을 입으로 하지마라
입은 말이 사는 집이 아니다
말이 사는 집은 따로 있다
말의 집은 가슴 깊은 곳
하늘이 살 집, 그 마음이다
그리운 고향의 옛집 같은
꿈에도 그리운 엄마의 약손 같은
산에서 솟는 옹달샘 같은
잘 여문 상수리栩 열매 같은
그러나 말을 입으로 하지마라
말은 가슴의 깊이로 하라
궁창의 정성으로 하라
말이 엇나가면 하늘도 엇나가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