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기사르 전투
보두앵왕 4세
나병의 왕
무릎으로 말을 탄 자
십자군 VS 이슬람
남자들의 사랑
전라남도 고흥군, 나병환자들의 거주지, 소록도 하면 세 가지가 떠오른다. 환갑도 못 채우고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나의 삼촌과 시인 한하운 그리고 어린 문둥병왕 "보두앵 4세"가 생각난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질환을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하늘이 내린 벌이라는 뜻으로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불렀다. 슬픈 병이다. 육신이 진흙처럼 짓물러 내린다.
싸라기눈이 내리는 날, 삼촌은 본인이 췌장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집안 청소를 하고 도배, 장판을 새로 했다. 혹시나 망가진 곳이 없나 집안 곳곳을 살피고 닦고 조이고 기름칠했다. 그리고 마지막 배낭하나 달랑 메고 소록도로 봉사하러 갔다. 그는 삶과 죽음에 어떤 도전도 응전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화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왔구나, 왔어,!!! 그냥 올게 왔구나! 배뱅잇굿 타령하듯 받아들였다. 삼촌의 죽음을 향한 무람된 수용이 나에겐 하나의 칙서가 되었다.
자신이 온길 잘 쓸고 지나가는 멋진 회오리바람 같은 경상도 사나이였다. 뒷정리의 달인이었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다 바뀌었다. 삶도 죽음도 다시 보였다. 진정한 삶의 스승이 되었다. 마치 십자군전쟁에 나서는 병사처럼 모든 게 거룩해 보인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 1920년 3월 20일 ~ 1975년 2월 28일)은 자신의 천형의 슬픔을 징징거림이나 하소연 없이 여리디 여린 풀피리소리처럼 풀어낸다. 한여름 여치의 모시속옷 날갯짓 같은 시였다. 자신의 모든 고통을 애조 띤 가락으로 살풀이하듯 풀었다. 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나병환자를 위한 투쟁을 했으며 소록도간척 사업을 활성화시켰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의 아픔을 위로했다. 손가락 발가락숫자에 연연하지 않았다.
보두앵 4세(1161~1185)는 예루살렘 왕국의 7대 국왕이다. 총명하고 잘생긴 용모로 성군이 될 모든 자질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는 10세에 나병에 걸렸다. 13세란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나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처절하게 예루살렘을 지킨 어린 왕이었다.
삼촌이 섭정을 하다 2년 후, 정식으로 왕이 되고 전쟁에 참여했다. 평화로운 성지순례에 탐욕과 야망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177년 살라딘이 급습했다. 어린 왕은 용감하게 전쟁을 지휘했다. 실로 위대한 왕이었다. 뜨거운 사막에서 온몸이 검은 피와 섞인 고름으로 터져 흘러내리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릎으로 말을 탔다. 전장에서 앞장서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했다. 병사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왕의 기도는 정복자의 마음까지 흔들었다. 천형이라는 형벌에도 하늘을 받들자 몇이나 될까?
살라딘의 군대를 보기 좋게 박살 냈다. 보두앵의 지휘로 승리하였다. 그 유명한 몽기사르 전쟁이다. 힘의 균형 과 평화를 이끌어낸다.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다. 얼굴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죽기 2년 전부터 가면을 썼다. 16살에 무적의 군주인 살라딘을 무찔렀다. 살라딘은 퇴각하면서 어린 보두앵 4세가 병이 낫지 않는 한 평화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둘은 스무 살의 나이차가 났다. 1185년 24살의 나이로 죽었다.
살라딘의 관용은 혁명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품격이 있는 왕이었다. 그는 보두앵이 죽을 때까지 평화를 유지했다. 자신의 말을 지킬 줄 아는 위대한 왕이었다. 이슬람의 왕 살라딘은 약속은 꼭지키는 왕이었다.
위대한 지도자이다. 부와 명예를 위한 탐욕이 점점 더 커져가는 세상에서 오로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노력한 어린 왕을 생각하면 삶이 숙연해진다. 정치가 명예나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이 과연 올까? 요즘 모든 것들이 회의가 든다. 마치 오랫동안 흔들려온 생니처럼 삶이 아프고 위태로운 순간이다. 생명까지 던져 그가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더 살아야 나는 철이 드는 걸까? 사랑도 증오도 미움도 다 버리고 그냥 서로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는 존재이길! 가면 안의 얼굴이 짓무르고 고름이 되어 썩어 흘러내리고 마구 주무른 진흙처럼 이지러져도, 산채로 부패하더라도 절대로 징징거리지 않기를! 다양한 종류의 가면을 사야겠다.
나를 가리고 의연하게 행동할 줄 아는 것도 용기이다. 마음과 몸이 무너져 내려도 가면으로 가리고 앞장설 줄 아는 삶의 전술을 배운다. 정직하고 맑은 눈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정면 대결하고 싶다.
나이테를 몸에 새긴 나무처럼 나도 온몸에 나이테가 숨어있었다. 뼈마디 사이사이 별사탕처럼 박힌 요산 때문에 통풍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걷고 달린다. 삶은 걷는 것이다.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라는 인사는 영원히 인류사이를 오가는 가장 심한 열망이 낳은 거짓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