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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의 참뜻을 歌謠로 일깨워준 진방남♣
孝의 참뜻을 歌謠로 일깨워준 진방남
모친별세 전보에 '불효자는 웁니다' 절창
옹골찬 음색에 가사 전달력 탁월한 가수로 한 시대 풍미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소양강처녀' 등 5천여편 작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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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시춘 선생 등과 여흥을 즐기는 진방남(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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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칭다오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 기업체가 무척 많습니다. 어느 해 초겨울, 칭다오의 한국 교민을 위문하는 공연에 초청을 받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경복궁'이란 식당의 넓은 홀이 공연장이었는데, 초저녁부터 많은 교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흘러간 옛 가요를 감상하는 자리라서 그랬던지 주로 나이든 분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공연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저는 고향과 어머니 테마 노래들만 주로 골라서 함께 듣고 부르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마침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를 때였습니다. 객석 뒤에 앉아있던 한 중년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연방 찍어대더니 기어이 흐느껴 우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틀림없이 고향을 떠나온 지 여러 해 되어 고국의 어머니 생각에 저절로 솟구친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눈물 속에는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덧없는 세월만 흘려보낸 후회와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효(孝)라는 글자는 늙을 로(老)와 아들 자(子)가 합쳐진 것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늙은 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을 나타낸 글자로 부모나 조상을 잘 섬겨야 한다는 참뜻을 담고 있지요. 오늘은 그러한 효도의 참뜻을 머금고 있는 노래 한 곡을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기로 하지요.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북망산 가시는 길 그리도 급하셔서/ 이국의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 그리워라 어머님을 끝끝내 못 뵈옵고/ 산소에 어푸러져 한없이 웁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러한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욱 애틋한 눈물겨움으로 우리 가슴에서 되살아납니다. 어머니께서는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언제나 우리를 무한정한 사랑으로 돌봐주셨고,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나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를 살뜰하게 돌보아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래 가사 속의 어머니는 성공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난 자식을 위해 노동과 기도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고향집으로 돌아오기 전, 몸에 병이 들어 그토록 몽매간에도 그리던 아들을 끝내 보지 못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군요. 뒤늦게 돌아온 자식은 어머니 산소 앞에 엎드려 통곡을 하는 장면으로 이 노래의 영상이 마무리됩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진방남(秦芳男)은 191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박창오(朴昌吾)이며, 작사가 반야월(半夜月)과 같은 사람입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가수로 데뷔해 활동하다가 광복 후에 작사가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요.
그가 가수로서 발표한 대표곡으로는 '꽃마차' '불효자는 웁니다' '마상일기' '그네줄 상처' '잘 있거라 항구야' '사막의 애상곡' '눈 오는 백무선' '키타줄 하소' '오동닙 맹서' '북지행 삼등실' '고향 만리 사랑 만리' '세세년년' '넋두리 이십년' '비 내리는 삼랑진' 등이 있습니다.
흔히 가요사의 평자들은 진방남의 창법을 '꽁꽁 다져진 듯 옹골차고 매력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빈틈이 없는 특이한 음색'이라 해설했는데, 특히 노래 가사의 의미를 잘 해석하고 새겨서 표현하는 가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진방남이 불렀던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살펴보면 대개 유랑민의 서러운 심정, 가족이산, 성공에 대한 다짐, 향수와 탄식 등으로 넘실거립니다. 주로 식민지 시대 삶의 애환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지요. 식민지 시대의 모든 가수들의 생애가 그렇듯 진방남도 고난의 청년기를 보낸 듯합니다. 철물점 직원, 고물상 잡부, 양복점 점원 등의 경력을 거쳤으니까요.
1939년 김천에서는 태평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전국신인남녀 가요콩쿠르대회가 열렸습니다. 북쪽은 함경도의 부령 청진, 동쪽은 일본의 오사카까지 각지에서 수백 명 청년남녀들이 운집한 가운데 나흘간 열렸던 대단한 행사였던가 봅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진방남은 당당 1등으로 입상했고,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 선생이 문예부장으로 있었던 태평레코드사에는 채규엽, 선우일선, 신카나리아, 백년설, 최남용, 백난아, 태성호, 남춘역 등의 대표가수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진방남의 합세로 태평의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작사가로는 박영호·조경환(고려성)·김영일(불사조), 작곡가로는 전수린·김교성·이재호 등이 이들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주었지요.
아무튼 진방남은 일본으로 가서 이 '불효자는 웁니다'의 취입을 앞두고 대기하던 시간에 '모친별세'란 전보를 받게 됩니다. 솟구쳐 오르는 통곡을 삼키며 몇 차례 노래를 불렀으나 목이 메어 실패하고, 결국 다음날로 연기한 끝에 울음 섞인 절창으로 녹음을 마치게 됩니다. 녹음실에서 가수는 일본으로 떠나던 아들을 배웅하러 마산역까지 나오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비오는 날 '고쿠라' 양복을 입고 우산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3등 차표 손에 쥔 아들을 향해 연약한 손을 흔드시던 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말입니다. 가수는 녹음을 마친 뒤 마침내 터져 나오는 통곡을 걷잡을 수 없어서 온몸으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노래의 원래 가사는 3절에서 '청산의 진흙으로 변하신 어머니여'였는데, 이를 진방남은 '이국의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로 고쳐서 취입했습니다. 하지만 2절 가사에서 모순이 발견되었지요. '드디어 이 세상을'이란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드디어'라고 하면 마치 어머님이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수는 취입 이후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드디어' 대신에 '어이해' 혹은 '한 많은'으로 바꾸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1975년 조총련계 교포 추석성묘단 환영공연장에서 희극배우 김희갑이 불러 장내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험한 시절을 살아온 모든 한국인들에게 가요곡 '불효자는 웁니다'는 자신의 삶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인지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대중들의 가슴 속에서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수로서 약 400곡을 취입했고, 작사가로서는 5천편가량을 발표했던 진방남(반야월)은 지금도 한 분의 원로 대중예술인으로 정정하게 자리하면서 흘러간 문화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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