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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과 고급
현시대가 수많은 사료(史料)들로 넘쳐난다면 과거의 사료들은 선택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과거의 미세한 변화들은 모두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에 현장감은 사라져버렸으며 모두는 무지에 기초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선택적 시각들만이 잔류합니다. 모든 역사가 현대사라는 의미는 이와 같습니다. 현대가 과거를 앞서는 이유입니다. 인간 모두는 제 눈에 안경으로 살아왔으며 그 안경은 바로 지성이었습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평가하면서도 거기에 진정성이 있다고 넉살을 떨어댄 것입니다. 진정한 과거로서의 역사는 역사라는 표현에 걸맞지도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이기에 모두는 이념적인 양식적 표현에 의존해 사날을 떨었을 뿐입니다. 해석(解釋)을 예증(例證)으로 대치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는 없으며 모두는 이념에 근거한 부분적 역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삶의 환경은 인간 모두가 갈망하는 노력을 통해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의 세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로서의 역사를 배워온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서의 역사를 배워왔기에 이념적 편향을 내재한 배움은 폐지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개념을 기준으로 개념이 인도하는 이념으로서의 전환이나 혁명은 결국 역사적 무지에서 나오는 변화의 아이러니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기에 결과론적인 맹목적 믿음으로 주장하는 어리석음에 전환(轉換, conversion)의 계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말로써 남의 창고에 계몽이라는 강압적이고 우월적인 방식을 통해 넣어주려 시도하는 모든 너스레나 선전선동의 교육적 시도는 거짓으로서의 기만일 뿐입니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니 모든 가치와 역량은 지성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인간 위주의 세상을 교의(敎義) 적 나열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려 애써왔을 뿐입니다. 지적 존재로서 인간의 가치 고양은 결국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격리시켰을 뿐입니다. 유연성을 경직성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경직성에서 우러나온 필연성은 없습니다. 과학적 인과율은 계몽시대의 환원적 오류였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질서를 통째로 바꾸는 즉 판을 뒤엎는 혁명과도 같은 역할은 인간의 간헐적인 동요였을 뿐입니다. 그것은 경제적 불만과 사회적 낙오자들을 역이용하려는 영악한 지성의 시도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혁명은 투쟁의 도구이자 밑거름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판을 뒤엎는 혁명은 프랑스에서처럼 전통을 소멸시킴으로써 피의 숙청만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세기의 풍운아(風雲兒)라 할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혁명은 멈추었으나 새로운 황제로 환원되었을 뿐입니다. 미완의 혁명은 항시 아쉬움이라는 미련을 역사에 남겨놓고 사라졌습니다.
진정으로 판을 뒤엎는다는 것은 분열과 대립을 거쳐 서로가 내전에 돌입할 때입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며 한국전쟁은 이념의 전쟁이었기에 그만큼 치열했으며 결국 미완의 혁명이라 할 만합니다. 이념의 전쟁은 동족조차도 죽이는 살인을 미화하기에 그처럼 서로에게 상처만을 안겨주지 그 어떤 화합의 계기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한쪽이 전멸을 전제하는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이 소비로 전락하듯이 인간의 삶 또한 소비로서의 투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한쪽이 창조를 지향할 때에 다른 한쪽 모두는 소비를 전제합니다. 변환이나 전환이니 혁명이나 전쟁이니 모두는 앞서가는 선구자적 시각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개인의 올바른 기여는 차단될 뿐입니다. 수백만 명이 죽는 전쟁조차도 죽음의 처절함은 사라지고 오직 이념만이 잔존하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신(神)을 벗어나고 자연을 벗어난 인간에게 남은 것은 개념을 옹호하고 지성에 근거하는 이성의 세계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세계는 머리 좋고 영악한 인간들만이 우대받는 사회가 됩니다. 결국 경제적 빈부의 격차는 서로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적 테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적인 분별의 앎으로 나아갈수록 거기에는 타자에 대한 적대적 반발력 또한 증대합니다. 다행이랄까 그러한 앎으로서의 지성의 누적물들이 자신의 내부를 향할 때에 그것은 회의에 빠져들며 스스로 로 소멸되기도 합니다. 밖을 향할 때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단으로 작동함으로써 견해들의 다수성을 질타하며 자신만의 독선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념의 집단적 노예 상황을 스스로 구성해가며 자신을 내맡깁니다. 우리의 사유 과정이란 것이 결코 올바른 정도도 아니겠으나 믿을만하지도 않습니다. 확실한 토대로서의 근거는 결국 내 경험에 동반하는 성찰로서의 깨달음에 있을 따름입니다. 모든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할 뿐입니다.
모든 논리적인 앎이 되었든 수학적인 전개 양식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의 실재에 와 닺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로서의 탐욕의 영역에 놓여있을 따름입니다. 수학적 전개가 내 삶에 기여하는 바는 없습니다. 논리는 내 자연스러운 유기체적 구조를 억압할 뿐입니다. 과학은 근대의 산물이었을 뿐이며 현대는 기술의 시대입니다. 현대인들이 기술에 빠져드는 것은 무언가 지성의 거짓과 냉정함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복되는 기술의 놀라움은 자연의 원리를 갈망해온 인간의 심성에 대리만족을 안겨줍니다. 자연 속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욕망도 출세도 진보도 지성까지도 완벽하게 소멸시켜야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가능합니다. 지성은 도시인의 필수 항목이지만 경직된 인식의 틀 속에 자연스러운 유기체를 가두어야 하는 고통 또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유자적에 대응하는 경직과 왜곡이 도시인의 삶을 감싸고 있습니다.
모든 확실함은 결국 나 자신에서 출발해야 하며 세상을 의심하는 나의 시각이 나 자신을 새롭게 출발하게 할 의도(意圖)의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자연스러운 체험으로 쌓여가는 경륜적인 통찰로 자신의 내부적 심성을 올바르게 변환(變換, transformation) 시켜갈 따름입니다. 과거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이 앉을 위치를 따라 땅을 깊게 파고 자갈돌을 집어넣어 장정 여럿이 무거운 돌로 다지기를 합니다. 주춧돌은 그 다져진 곳에 놓이며 위로 올려질 기둥을 지지하는 역할에서 마감할 뿐입니다. 높이 쌓아올리는 것은 다지는 행위가 아닙니다. 또 다른 행위일 뿐입니다. 다지는 영역은 고투적 삶의 영역이며 쌓아올리는 영역은 고투적 삶의 영역을 거쳐 경륜적인 통찰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전환(轉換, conversion)의 영역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는 쌓아올린 것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하고 화려함에 경도되는 우유부단함을 삶의 도리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오히려 다지는 역할을 천시해 지나쳐왔습니다. 삶의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자 의무이며 삶의 주춧돌입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져야 하며 자연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더욱더 튼튼해집니다. 눈보라만이 아니라 작열하는 뜨거움도 견뎌내야 합니다. 회피하는 삶은 소비를 몰고 오며 그것은 나약함에 빠져드는 과정을 연출할 뿐입니다. 그런 인간 집단들은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소비적 관점에서 편하게 받아들일 뿐 깊은 성찰로서의 대응능력을 상실합니다. 즐거움이 넘치는 지상낙원만을 갈구(渴求) 합니다. 자유와 평화를 실천이 아닌 말로써 얻고자 합니다. 인간의 삶은 불확실성에서 시작해 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출발이 거창하고 확실할수록 결과는 용두사미로 나아갑니다. 확실한 출발은 근거를 모두 소진해버렸기에 기준이 사라진 즉 호랑이가 없는 골짜기에 여우가 나서듯이 분열로 나아가기에 모두는 거짓이자 선전선동에 빠져듭니다. 알고서 시작하는 세계는 스스로 교만에 빠져 가장 단순한 사실조차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바보가 됨으로써 실패를 예견하게 해줄 뿐입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망해가는 사회는 그와 같습니다. 진보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미 설계도가 있다고 자신합니다. 나를 따르면 다 해결된다고 허풍을 진실로 위장합니다. 그들의 욕심은 결국 나라를 절단-내며 분열로 피폐해진 사회는 회복 불가의 비가역적인 지경에 처할 뿐입니다. 비가역적이란 용어 자체가 그들이 좋아하는 주워들은 낭만적 용어로서 철학적 착각의 오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용어는 허풍선이 떠버리입니다. 동남풍에 거덜나는 적벽대전의 조조의 꼴입니다. 열정은 넘쳐나지만 머리가 텅 빈 단무지들입니다. 전체를 모르는 일부의 포착은 자연의 순리와 어긋납니다. 의도하는 바가 없이 시작하는 삶에서는 겸손과 인내를 통한 경험의 누적을 보람으로 여기기에 순리적인 삶이 자연스럽게 일구어져갑니다. 선험적 앎에의 기대보다는 경험적 앎에의 투자가 진실에 가깝습니다. 음악의 천재가 타고나며 수학의 천재가 타고나듯이 그런 삶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삶이 평생을 지속하지도 못합니다. 젊음의 땀 흘리는 열정은 한순간에 우연히 왔다가 우연하게 사라지는 추억의 에너지로 마감할 뿐입니다. 나이를 극복하는 천재가 없듯이 인간의 논리적 지성 또한 이념에 근거하기보다는 세월에 지배되어야 함이 마땅해 보입니다. 세상은 변화하는 터전이지만 이념에 빠진 인간의 삶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삶으로서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살아가지만 그 세대마다 다양한 열정이 일어나도록 내면의 고투와 인내하는 의지를 유지시켜야 합니다. 그러한 삶에서 솟아오르는 분출이야말로 진정 인간의 올바름의 처신이자 인간 존재가 진정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단독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경험의 누적에 의해 새로운 창조적 경험을 쌓아가는 변환(變換, transformation)의 세계가 진정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양식입니다. 양가적이고 양면적인 진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아니 그 양 극단이 형성되기 위한 즉 연결의 무한한 고리들이 존재로써 놓여있습니다. 맛있는 좋은 과일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잘 성장한 나무와 햇빛과 거름과 비바람과 추위가 있어야 합니다. 고독이야말로 진정 인간의 주춧돌이자 기반이며 삶의 시작점입니다. 인간의 즐거움은 그 고독의 잠재성이 현실에서의 대상과 조우(遭遇) 하며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내 스스로가 아무도 한 적이 없는 그러나 소소한 일상에서의 창조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순간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다는 것은 소비의 즐거움입니다. 일등을 해서 즐겁다는 것은 남을 억압한 독선의 기쁨입니다. 고독이야말로 누구나가 얼굴이 다르듯이 무수한 다양성을 세상으로 배출시킬 동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주춧돌입니다. 아르카디아에도 무덤은 있고 성인(聖人)들도 철부지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쪽 팔로 운동을 하는 탁구나 배드민턴이나 배구 등에서 선수들은 사용하는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운동량이 더 많다 보니 그쪽 근육만이 증가합니다. 따라서 양팔에 골고루 근육을 형성해 균형을 잡기 위해 체력운동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의 신체구조에 균형이 요구되듯이 정신의 세계에서의 앎의 추구에도 균형 감각이 요구됩니다. 정신의 세계는 무한한 스펀지와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것도 받아들이고 저것도 받아들이고 무한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종합하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인간 자신의 정신은 하늘을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은 그런 반열에 오른 인간의 양식(樣式, style)입니다. 앎이란 인간의 본능적 성향이자 가장 심오한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너머 세계를 추구하려 상상력을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동기입니다. 인간은 현실에 갇혀 살아가면서도 무한의 상상력을 꿈꾸며 살아가려는 정신적 구조를 갖추고 태어납니다. 온 우주를 주워 담아도 남아돈다는 지적 능력의 무한한 세포분열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말을 시작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말은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생명 유혹의 관문입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펼쳐지며 그런 과정이야말로 진정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형성하고자 애쓰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성장단계로서의 하나의 현상으로 본능적인 발현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평가로서의 지성적인 의미나 논리적 예증은 인간의 시각일 뿐 자연스러운 해석은 불가합니다.
상상 속에서 남과 다른 나만의 고유한 본능의 활력으로 창조적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존재가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 어느 것에도 부닥치고 걸리며 장애가 일어나지 않는 세계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세계입니다. 가벼움이 깃털과 같으나 한번 휘두르는 힘의 파괴력은 헤라클레스보다도 더 큰 탄력적 힘의 충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신전 벽화에 부조된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 여신의 부드러운 손짓에 거인 족들이 쓰러지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즉 부드러움에서 우러나오는 강함을 우리는 그리스 고전주의의 세계에서 무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그것이 인간이 가야 할 고전(古典)의 세계입니다. 고전의 중요성은 그와 같이 인간에게 유연함을 물려줍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최초로 비쳐지는 아비의 위대함입니다. 이때에 인간의 모든 사회적 유기적 관계들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연쇄 고리를 형성함으로써 다양성이 넘쳐나는 유토피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 적인 경직된 사고나 경직된 신체의 어색함이 없으며 남에게 내 사고의 신념을 강요하기 위한 공포나 불안의 조작 상태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성을 넘어서지 못한 게으르며 영악한 즉 쓸모없는 인간들이 인간 사회를 리드한다는 정치적 명목을 내세워 분열로 몰아가고 이념에 빠트려 반골 기질로 만들어온 죄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무의미해 보이기에 나이를 따지지 않게 되고 생각의 높낮이를 인정 어린 포용으로 나아감으로써 모두가 참여하는 다양성의 사회로 인도합니다. 선봉장(先鋒將)이 없어 분열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선봉장이기에 그 어떤 불의나 계몽이나 이념이나 주의 주장도 미세먼지와 같은 해악(害惡)을 내보이기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내 삶이 중요하고 네 삶은 어리석다는 분열적 판단이 없습니다. 빨리빨리 살아생전에 추구해야 된다는 욕심의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주어진 보검을 더욱더 연마하기에 바쁘지 그 보검을 휘둘러 누군가 피를 흘리게 하려는 의도된 어리석은 투쟁에 나서는 경우가 없습니다.
취미로 마라톤 운동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합니다. 마치 멀리뛰기에서 달음질 후에 발 구름판에서 최종적으로 한 발 구름을 한 후에 날라 올라 포물선을 그으며 그냥 목표점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떨어지는 순간에 다시 몸을 치솟게 하는 몸의 가벼움으로 허공에서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에너지를 발휘해 더 멀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허공을 나는듯하면서도 힘도 들지 않는 그야말로 유연하게 부유하는 기쁨을 마음껏 맛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동안 숱한 고투적인 노력으로 달리기를 반복적으로 일상에서 자유롭게 뛰어왔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을 가볍게 하는 수영을 십 년 이상 하면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졌기에 그런 느낌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책에서 읽어 전하는 가벼운 수다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경험의 결과가 종합됨으로써 나타난 하나의 분석적 예증이자 저절로 자연의 순리에 합당하게 몸에서 형성된 반응입니다. 이것이 육체적 유연성의 실례라고 할 때 정신의 유연성이 그 정도에 이른다면 그 능력이 어느 정도 일지를 우리는 감지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신체로서의 몸의 순리에 정신으로서의 지혜의 여유는 마치 현대판 신선(神仙)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누구를 가르치려고 나서는 순간 분열로 인한 모순을 인간은 그 죄과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르침은 자연의 원리에 맞게 서서히 이루어져야겠으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빨리빨리 선행수업에 나서며 어린 새싹들에게 비료를 덥석덥석 한 움큼씩 주며 교조적인 교육방식으로서의 자신의 이념을 진리로 호도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신념을 현실에서 달성코자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세워놓고 자신이 구원해주겠다고 이념을 주입하는 꼴입니다. 평지에서 자연스럽게 뛰어놀게 하면 될 것을 굳이 어리석은 개념의 어른들이 이리저리 휘저어대는 꼴입니다. 신념에 사로잡혀 자신만이 세상의 구원자요 인류의 예언자로 자처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침을 튀깁니다. 내일의 일도 알 수 없다는 겸손이 거기에는 없습니다. 나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자성(自省)의 깨달음도 없이 가르치려 나섭니다.
내 알량한 지식을 전달하는데 누가 방해를 하냐는 외골수에 거침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잘못된 편견의 애씀으로 아이들의 배움도 동조(同調) 되며 웃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의 체험에 앞서 손쉽게 개념만을 터득함으로써 누구나가 어른의 세계로 에스컬레이팅(escalating) 되어 편안하고 손쉽게 어른과 동등한 생각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도록 과잉 증폭된다는 것입니다. 인조 비료를 많이 주면 건강하게 자라던 식물들조차도 바로 그 다음날 말라비틀어져 죽어버립니다. 일찍 내린 서리로 고스러지는 꼴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더욱더 영악해져 갑니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나도 웃자라서 바로 시들어버립니다. 자연의 유기체적인 신체를 타고난 아이들에게 개념의 비료만을 주입시킴으로써 경험 이전에 분열부터 몸과 마음에 새겨줍니다. 스스로가 골똘히 생각해서 채우거나 우연히 길에서 줍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방해합니다. 그런 독립성을 교조적인 선생이란 자들은 자신을 뛰어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될까 불안에 떱니다.
초록은 동색이듯이 도둑놈과 어울리면 도둑놈으로 물들어갈 뿐입니다. 죽창으로 찌르는 연습을 개념을 통해 마음껏 함으로써 어른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못 버리고 남을 송곳과 같은 뾰족함으로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며 살아가고자 애씁니다. 그들에게 삶의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체험은 해본 적조차 없기에 무능합니다. 개념의 도움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닿아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다양성의 사회를 대단히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바꾸고자 애씁니다. 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기에 그들의 삶은 폐쇄적 기쁨이 넘쳐납니다. 개념을 동원한 선전선동이 그들 삶의 즐거움이자 보람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일어나야 할 내부적 갈등과 분열이 어린아이에게서 일찍 일어나도록 부추긴 죄과를 그들만이 모릅니다. 인간의 삶이 나이와 연령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현상을 개념으로 동일시해버리는 과오를 그들은 저질렀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개념은 그처럼 무차별적입니다. 조현병은 그런 개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 새싹들이 성장하며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은 한편으로 치우친 억압적 개념 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일방적 피해자가 되어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개념의 감옥에 갇혀버린 아이들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악질적인 인간들이 주입시킨 개념이라는 마약에 시들어갈 뿐입니다. 인간은 다양성의 존재이기에 자연에서 벗어난 그런 편향된 개념은 삶의 질을 파손하는 이념일 뿐입니다.
어린이집 교사가 어린아이를 폭행하면 그 피해를 입은 아이는 엄마 앞에서 그 억울함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지도 못합니다. 공포는 인간을 벙어리 즉 언어 장애인으로 만듭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집에 와서 평소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지혜가 있는 부모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고 바로 눈치챕니다. 그나마 카메라가 있기에 그 장면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의 개념 교육에는 물리적 방식이 아니기에 어떤 교육이 시행되는지도 모르며 지나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개념 교육은 누적되어 발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의 발현은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이론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강압적인 교육의 세계가 아이들의 창조적 삶을 멍들게 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삶은 결국 전체에 묻혀버립니다. 전체주의가 득세하는 순간 인간의 삶은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될 뿐입니다.
지식의 누적에 대한 신념은 헛된 진보론을 몰고 올 뿐이며 현재 몰고 와 우리 주변을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근대적 세계관 즉 세계가 원인에서 유출되었기에 배움을 통해 세계의 원인을 알 수 있다는 헛되고 오만한 자부심의 구태의연한 세계관적 사고로 현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근대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압적으로 교육시키고자 애쓰고 있는 시절입니다. 세상은 우연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의 원인은 없습니다. 그냥 하는 것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며 그냥 배울 뿐입니다. 원인을 전제하고서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구태의연한 근대적 사고일 뿐입니다. 세계는 단일하지 않으며 수많은 해석이 꽃피우며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의 예증으로 시대를 판단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에 진정한 현대적인 민주 사회의 다양한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사회적 성장을 가로막고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에 장애를 일으키는 구태의연한 교육이 우리의 어리석은 삶을 좌우(左右)라는 이념의 지대로 갈라놓고 있는 이 시절이 사라지기를 기원해봅니다. 현대인이라는 고급 클럽에의 가입은 손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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