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외도2동 284번지.(일주서로7369)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경찰지서 터
외도동은 4·3 당시 외도리였다. 1구는 본동과 우렝이, 절물을 포함하여 200여호, 2구는 도그내와 연대마을을 포함하여 180여호로 구성된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외도지서가 있었고, 초토화작전 시기에는 제9연대가 외도국민학교에 주둔했다. 외도리가 이렇게 군경토벌대의 주요 주둔지가 되면서 외도 주민은 물론 제주읍 해안리, 도평리, 애월면 고성리, 광령리 등 중산간마을에서 소개되어 온 주민들이 무장대의 습격과 토벌대의 횡포를 동시에 겪어야 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외도리의 첫 인명피해는 1948년 4월 3일 새벽이었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당시 지서에서 혼자 숙직하던 선우중태 순경이 희생되었다. 5·10 선거를 하루 앞둔 1948년 5월 9일에는 무장대가 고용권(39세)과 이학빈(35세)이 선거 보이콧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납치되어 광령리 생이동산에서 살해되었다.
5·10 선거 당시 주민들은 선거를 하지 않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2구 주민들은 해안리 위쪽 붉은덩어리 지경에 있는 소나무밭으로 갔다. 4,5일 동안 배고픔을 참으며 지내다 군인들이 와서 하산하라고 했을 때야 내려왔다.
한편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해 내려오기 시작한 1948년 11월 중순 이후에는 무장대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서를 지키기 위해 마을 주변에 성을 쌓았다. 축성에는 외도리 주민은 물론 소개민들도 모두 동원되었다. 현재 성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외도2구는 월대천부터 옛장터 위 지경을 따라 연대마을 입구 조금 못 미친 곳까지 ‘ㄱ’자 형태로 쌓았고, 외도1구는 자체적으로 1구만 두르는 성을 쌓았다. 이 때부터 청년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60여명이 특공대를 조직해서 지서에 보초를 서거나 토벌대의 길 안내를 해야 했고, 여성들은 토벌대의 식사를 마련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 외 외도리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48.06.11. 고영주(73세. 외도리 청각장애인)이 밭일을 가던 중 경찰의 검문 소리를 듣지 못해 사살됨.
∙1948.10.30. 강규호(35세 고성리) 등 고성리 주민 18명과 고경순(57세 도평리)등 도평리 주민 3명, 상귀리 주민 2명이 외도리 짐동산에서 총살됨.
∙1948.12.15. 김일순(25세 외도리) 동생 혼례에 참석했다가 집합에 늦었다는 이유로 응원경찰에 의해 살해됨.
∙1948.12.17. 강치구(20 상귀리) 김두호(22세) 등 신엄리 주민 6명은 도그내에서, 강선환(31세) 등 고내리 주민 18명과 강원식(39세) 등 상가리 주민 6명, 하가리 주민 5명은 외도지서 서쪽밭에서 총살됨.
∙1948.12.19. 박문택(18세) 등 고내리 주민 6명과 김대주(36세) 등 노형리 주민 2명이 외도지서 서쪽밭에서 총살됨.
∙1949.01.03. 강문병(35세) 등 도평리 주민 65명과 광령리 주민 1명, 상귀리 주민 1명, 하귀리 주민 1명이 외도지서 서쪽밭에서 총살됨.
∙1949.01.06.(제9연대가 철수한 기간) 김갑생(35세 女 외도리)과 그 자녀 2명이 무장대에 의해 피살됨.
∙1949.01.16. 김귀현(67세 女 외도리) 일가족 4명이 너븐밭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됨.
∙1949.01.17. 김봉옥(65세 女)등 화북리 주민 9명과 김이배(55) 등 북촌리 주민 2명이 도그내에서 총살됨.
∙1949.01.19. 고상희(24세 교사) 등 4명이 외도지서로 연행된 뒤 너븐밭에서 총살됨.
∙1949.01.24. 강재생(29세 女) 등 하귀리 주민 6명이 외도지서 서쪽밭에서 총살됨.
∙1949.02.12. 고성휴(50) 등 도평리 주민 6명이 외도리 몸팟에서 총살됨.
∙1949.02.14. 이양호(67세 외도리) 등 가족 12명이 이완영(40세)과 이장희(24세 이완영 아들)가 도피했다는 이유로 절뒤에서 학살됨. 이 사건은 1960.06.24. 제주신보에 ‘학살고발 제1호’1949년 2월 17일 외도1동 속칭 절터에서 일가 4대 10명을 몰살한 혐의로 제주신보사 申전무에 의해 前외도지서 金炳採 경위, 李允道 순경이 고발됨. 25일부터 地檢에서 수사 착수했다는 기사가 실림.
※2020년 현재 정부가 인정한 외도동 4·3 희생자는 남 54명, 여 22명이다.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은 1949년 1월 3일 무장대로 위장하여 인공기를 들기도 하면서 제주읍 토평리에 난입했다. 주민들이 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수십 명을 총살시켰다. 신산마을을 제외한 도평마을 전주민을 도평국민학교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비속에서 여성들을 고문하기도 하면서 도피자 가족과 청년들을 골라냈다. 그 직후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들을 하원천 근처 속칭 뒷밭에서 총살하고, 청년들은 외도지서로 연행했다가 그 날 밤 외도지서 西쪽 밭에서 총살했다. 이미 피를 보고 악귀로 변한 함병선 2연대장은 계엄령의 지속적인 시행을 요구하며 주민학살에 열을 올렸다. 초나흘날엔 화북리 곤을동 주민을 집단총살했다는 보고 등 주민 무차별 학살 소식이 속속 올라왔었다.
외도지서는 일제강점기 외도경찰관주재소로 설립되었다. 해방 후 1949년 1월 29일 하귀지서가 설립되어 애월면 동부 지역 치안을 담당할 때까지 제주읍 서부 지역인 외도, 내도, 도평, 해안을 물론 애월면 동부 지역까지 담당했다.
외도지서에는 4·3 시기 응원경찰과 서청단원들이 일정 기간 주둔하기도 했다. 이들은 1948년 11월 중순 초토화작전 실시를 전후ᄒᆞ여 지역 청년들을 모아 특공대를 조직하고 경비와 길 안내를 맡도록 했다. 이런 와중에 외도지서에 근무했던 서청 출신 경찰의 잔학상은 극에 달했다. 그 중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칼로 찔러 죽였던 이윤도 순경의 사례는 대표적인 것으로 지금도 주민ㅁ들은 그 악몽을 잊지 못한다.(2020년 『제주4·3유적Ⅰ 제주시편』)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툭 튀어나오며 고꾸라져 죽었습니다. 그 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의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 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외도지서 특공대원 고치돈씨 증언)(뉴스페이퍼 2020.04.30.)
외도지서(현재 외도파출소)는 내도동 723번지(도근내길50)로 이전했고 그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으며, 입구에는 보수우익단체들이 공동으로 세운 ‘외도지서 추모·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에는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무장폭도가 지서를 습격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뉴제주일보 220228) 지금도 그대로 있다.
◈하귀리 개수동에 거주했던 1942년생 김용렬(女)씨 증언 = 아버지(김기전)는 닷새 전인 1948년 12월 5일 아침 일찍 외도지서에서 땔감용 나무를 구하러 가야 한다며 도시락을 들고 오라는 명령에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나선 뒤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아버지는 12월 9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으나 행방불명됐다. 경찰은 비학동산 한쪽 편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먼저 온 주민들도 두려움 속에 앉아 있었다. 팽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앉으라고 한 뒤 어머니 손을 뒤로 묶었다. 김씨와 동생들도 옆이나 앞으로 앉았다. 토벌대는 도피자 가족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려고 줄줄이 베줄로 묶었다. 다른 편에는 줄에 묶이지 않은 주민들이 앉아 있었다. 동생이 오줌이 마렵다고 보챘다. 김씨는 어머니의 등에 달라붙어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묶여 있던 베줄을 풀더니 토벌대원이 한눈을 파는 사이 살그머니 김씨와 동생들을 데리고 오줌 누이러 동산 옆 구렁진 곳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뒤 몰래 다른 편 줄에 앉았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김씨 가족은 그렇게 살아났다. 토벌대는 앉아 있는 주민들을 향해 “잘 보라”고 윽박질렀다. 베줄에 묶였던 사람들이 줄을 풀고 나가면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지금의 동민회관 마당이다. “기관총이라는 게 ‘따다닥’ 소리 나는 겁디다. ‘따다닥’ 허민 탁 박아졍 죽어부는거라.” 주검은 길 건너 밭으로 내던져졌다. 이날 1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남녀노소 20명 이상이 집단학살됐다. 겁에 질려 발발 떠는 동생들의 코에서는 피가 ‘잘잘’ 쏟아졌다.(한겨레 2021-04-02)
◈1948년 12월 5일 외도지서는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주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월동용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며 톱과 도끼를 갖고 지서에 모이도록 했다.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갔으나 주목받을 게 없었던 평범한 청년들도 갔다. 동원령은 함정이었다. 청년들은 차량에 태워 실려 간 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제주일보 2018-07-29)
외도지서 관련 신문 보도
◈1948.10.30. 第9聯隊長, 제주읍을 노리는 무장폭도들이 고성 부근에서 밀회중임을 탐지하고 포위섬멸 작전을 전개해 포로 200여명과 무기․문서․기타 물품 다수를 포획함. 이 작전으로 외도․애월 부근의 무장폭도는 완전히 섬멸되었다고 함(朝鮮日報․國際新聞․大東新聞․東亞日報․서울신문․自由新聞․漢城日報 11. 3.)
◈1948.11.21. 警察署長, 외도지서 방문하여 잔비완멸을 위한 협조요청(濟州新報 11. 23.)
◈1960.06.24. 학살고발 제1호, 1949년 2월 17일 외도1동 속칭 절터에서 일가 4대 10명을 몰살한 혐의로 제주신보사 申전무에 의해 前외도지서 金炳採경위, 李允道순경이 고발됨. 25일부터 地檢에서 수사 착수.(濟州新報 6. 24., 6, 25,)
《작성 2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