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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묵상글 (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 죄에 갇히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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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18 04:16
- 죄에 갇히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나는 진짜 하느님을 믿는가?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가?
왜 이런 생각을 또는 성찰을 하게 됐는가 하면
오늘 히브리서가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존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겠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존재하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적절하게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를 주고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와 셈을 합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려 되돌려드리는데
마지막 한 종은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드리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을 당하자
주인이 주지도 않고 빼앗아 가는 냉혹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랬다고 답합니다.
결국 그 종은 믿음대로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은 은총의 어좌로 나간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어좌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 죄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하느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갇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다음 한 짓이고 그 후예인 우리가 이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왕인 이유는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죄지었지만 자기 죄에 갇히지 않고
그 죄를 가지고 늘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편 ‘Miserere’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며 바친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비하시니”를 제일 먼저 입에 올리고,
자기 죄를 감추는 대신 오히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아가
히솝의 채로 깨끗이 씻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씻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이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며 레위를 단죄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 우리는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그래서 자기 죄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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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따름의 여정
“자녀답게, 제자답게”
스승이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제자답게, 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책임적 존재로서 합당한 처신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제자직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공부란 매일 보던 풍경을 낯설게 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다산>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논어>
참으로 제대로된 제자라면 이처럼 늘 새롭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따르는 진리 추구의 여정이 우리를 새롭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레위를 부르시고 레위는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선행하니 말그대로 부르심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선행하는 부름받은 자의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그리움이 성소의 동기가 됩니다.
길을 지나시던 길이신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페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세관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는 레위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를 구원한 말씀입니다. 레위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나서니 그의 갈망을 반영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삶의 방향을 찾은 레위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삶의 의미를,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레위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명쾌하게 주님의 정체를 밝힙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우리가 따르는 전능하신 주님은 하느님 어좌에 좌정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오늘부터 늘 현재를 살게 하십니다. ‘홀로’의 고립단절의 방향없는 삶에서 이젠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제자공동체에 속한 레위입니다.
흡사 교회공동체에서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처지와 흡사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역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더불어의 주님이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식탁공동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름받아 치유받아야 할 병자들이요,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 병자아닌 사람, 죄인아닌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불러주신 은총에 대한 자각에서 저절로 샘솟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따름은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는 평생과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겸손과 감사의 한결같은 자세로 주님을 따릅니다. 죽어야 끝나는 부르심과 따름의 여정입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하여 끝까지 한결같이 따르는 과제를 이행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의 본질을 명확히 밝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같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말씀 공부로 하느님의 말씀과 영혼이 일치되야 비로소 진실하고 투명한 살아 있는 삶니다.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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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앞으로 불러서 숙제로 제출했던 저의 글을 직접 읽으라고 하셔서, 또박또박 그리고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잘 썼다고 친구들 앞에서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읽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저 다음 다른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에게도 직접 쓴 글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글을 써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저였습니다. 그에 반해 제 다음에 발표했던 친구는 계속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글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글을 잘 써서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았던 그 친구는 뛰어난 작가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글을 쓰지 않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가 된 후 20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책도 여러 권 출판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 지적받은 것을 계속 기억해서 ‘나는 글재주가 없어.’라면서 글 쓰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동포인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는 마태오 사도를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격 운운합니다. 때로는 성당에 나올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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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그림자를 두려워 말라. 그림자란 빛이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비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루스 E.렌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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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동반한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여,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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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셨고, 이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는 겸손한 죄인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으며 자신이 실천한 외적인 의로운 행위로 상급이 마땅하다고 믿는 교만한 죄인”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 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주님품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완고함이 문제 아닐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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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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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주님을 구원자,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에 대한 보속을 주님께서 하셨기에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고통과 고난의 길을 걸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 각자의 죄스러움을 감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죄가 없는 것처럼, 혹은 숭고하고 고귀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어둠 속에서는 우리 몸의 티가 보이지 않지만, 밝은 빛 앞에 서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속에 나오는 사람 중 진짜 죄인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죄인들과 세리들일까요? 아니면 그 모습을 보며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손가락질하는 바리사이들일까요?
우리는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즉 교회 안에 모여있는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길 바랍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말입니다.
⭐환상에서 벗어나는 기회
‘실망’을 다른 말로
‘환상에서 벗어나는 기회’라고 합니다.
실망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또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우리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러나 ‘실망’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망’을 통해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월의 중간쯤 왔습니다.
연초에 자신과 약속한 무언가에 벌써 ‘실망’한 것은 아닐는지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오히려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 주세요.
나도 사람이구나.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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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2,15)
사람을
사람들이 따릅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못 배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눈여겨보는 사람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불러주는 사람을
잊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약한 사람들이 따릅니다
품어주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용서하는 사람을
죄 짓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위로하는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들어주는 사람을
울부짖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채워주는 사람을
모자란 사람들이 따릅니다
받아주는 사람을
쫓겨난 사람들이 따릅니다
따뜻한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베푸는 사람을
주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인정해주는 사람을
버림받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다독여주는 사람을
웅크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일으켜주는 사람을
쓰러진 사람들이 따릅니다
북돋아주는 사람을
짓밟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람을
얽매인 사람들이 따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을
길 잃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을
사람이고픈 사람들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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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르는 선물
‘나를 따라라.” 이는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발걸음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참조; 1 베드 2,21; l
요한 2,6). 지상사물을 탐내지 말고, 썩고 마는 돈벌이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세상 명예를 피하고, 하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온갖 것을 하찮게 여기십시오.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고, 누구에게도 쓰라린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참아 주고, 억누르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용서를 청하십시오. 언제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만을 찾고(요한 7,18 참조), 거룩한 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모든 일을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마태오가 세상 돈벌이도 포기하고 재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빈털터리이신 그분의 제자무리에 합류했다 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나설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첫째,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참회의 방법과 외적인 수변 방법에 얽매여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신적인 진리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한 자들은 겉으로는 거룩하다고 일컬어지겠지만, 속으로는 바보와 다름없습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적인 진리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자신을 일컬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애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다.
그들의 길은 나름대로 옳습니다. 그들의 의도가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라도 그들을 칭찬해야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기를. 그러나 신적인 진리 안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을 닮지도 않았습니다. 더 나은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높은 경지에 오른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나 다름없습니다. 신적인 진리를 전혀 모르니 말입니다. 그들은 선한 의도로 인해 하늘나라를 받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가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31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공자는 “하늘이 내게 덕을 부여하였으니 한퇴가 어찌 천명을 어기고 나를 해칠 수 있으랴?”(논어)라고 말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나를 아는 분은 하늘뿐이다”(논어)라고도 말한다. 또 공자는 "군자에게는 세 기지 두려운 것이 있으니,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 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한다.”(논어)고도 했다.
맹자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즐기는 자이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하늘을 즐기는 자는 온 세상을 보유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의 나라를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맹자는 또 “하늘이 어떤 특정인에게 큰 시련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괴롭히고, 그의 물질 생활도 어렵게 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하고, 그 때문에 극도로 피로를 느끼게 하며 그의 의욕을 잃게 하여 더 참고 견딜 수 없도록 시련을 준다”고도 하였다.
이상의 말들은 적어도 공자나 맹자의 천관(天觀)이 단순한 자연의 원리나 이법만이 아니라 경외하고 순명해야 할 ‘주재적 천’관이었음을 알게 한다. 다만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인합덕 (天人合德)을 이상으로 하는 인격적 초월신으로서, 경배 . 감사 . 간구 . 기도 등을 삼가고 하늘의 도리와 뜻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생각을 깔고 있는 것이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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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용서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50117. 21:17 ㅣNo.179371
예수님께서 세관 앞을 지나시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이르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따랐다. 당시 ‘세리’들은 세금을 직접 거두어들이는 하급 관리들이다. 그들은 이교도들의 식민통치에 협조하고 또 그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부당하게 징세를 해, 주변에서 많은 멸시와 미움을 받는 처지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따금 죄인으로 취급받았단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에. 그래서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음식 잡수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저 이는 어째서 저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는 이 말에 그들에게 이르셨다. “건강한 이들께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이들께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보다 죄인을 더 부르러 왔다.” 어둠 속에 빛을 밝히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매사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신다. 세리도 주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어쩌면 초기부터 교회는 이른바 완전하고 바른 이들로 시작된 곳이 아니었다. 병원에 환자들이 모이듯, 비천한 죄인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 물론 어부와 세리도 힘없었지만, 예수님 부름에 상처 난 그들은 위로받아 치유되었다. 약함과 죄스러움이 오히려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소였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죄를 전혀 짓지 않은 한없이 의로운 이라고 막연히 여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실은 그렇지 않을 게다. 죄 많은 이들이 모여든 교회가, 칭송받는 인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본성이 정녕 잘났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로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끈질기게 바라시는 하느님 자비 덕분이리라. 그것이 예수님 가르침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더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늘 무리를 이루며 따랐다. 의인을 사귀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신 그분 삶에서 우리를 되돌아보자. 우리는 성경에서의 위대한 이들은 전혀 죄짓지 않은 의로운 이라고 막연히 여기지만, 많은 이가 그렇지 않았다는 걸 그들 삶에서 알게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 속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통일을 이룬 다윗은 욕정에 이끌려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기어이 아내로 삼았다. 예수님 수제자인 베드로도 막판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시침을 떨었고,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역시 초기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레위를 당신 제자로 삼으시고는 그 많은 죄인, 세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어쩜 고해소 찾는 걸 두려워하는 우리도, 진짜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 아닐까? 이제라도 우리 자신도 죄인이 아닌지, 나아가서 영적으로 정말 건강한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게다.
아무튼 하느님 앞에 그 누구도 의인이라 자처할 이 없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 영원을 향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삶에서는 그분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득실거린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죄의식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믿는 이에게는 그분의 현존을 늘 기억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들이 있다.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위선의 삶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삶이 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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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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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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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따르다'는
공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
제자로 뒤를 따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고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응답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복음은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들을 레위처럼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제자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도 함께 음식을 드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 공간에 또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로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에게
'따르다'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쫓아온 것이지
제자가 되기 위해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하지 위해 쫓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따라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레위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예수님의 직접적인 선택을 받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도 제자로 받아주시는 모습도 있습니다.
반대로 제자가 되려는,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직접적인 부르심을 듣지는 못했어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을 때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생각이 있다면
단지 공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
제자로 따라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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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병들어도
괜찮고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듯 우리는
사랑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삶의 한간운데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요
물을 마시는
것도
우리자신입니다.
의인이
결코 아닌
우리를
기쁘게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삶이 조금씩
아름다워지기
시작합니다.
조금 늦어도
많이 더뎌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배워나갑니다.
배우고
익히며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음식을 씹으며
물을 마시며
감사를 드립니다.
죄인이기에
병들었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렇기에
더 행복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행복한
죄인입니다.
행복한 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시간이
행복입니다.
행복한 부르심
행복한
식사의
참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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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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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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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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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3-17)”
1)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그들의 과거나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일에 대해서,
죄인을 사도로 뽑으셨다고 표현하거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편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고,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옳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직업만 보면서 모든 세리들이 다 도둑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편견입니다.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말씀이 많이 있지만, 모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또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는데, 우리는 그가 위선자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세리들이 전부 다 죄인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태오를 보자마자 부르신 것은 아닐 것이고, 그를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부르셨을 것입니다.
마태오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부 출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과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또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부르심에, 또는 믿지도 않는 분의 부르심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응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식사를, 루카복음서 저자는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라고 기록했습니다(루카 5,29).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직업을 버렸을 텐데, 과거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또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석한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15절의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라는 말은, 세리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회개했음을 나타냅니다.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의 말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부당한 비난’입니다.
4)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병든 이들과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의인과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병든 이들’이고,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특정 계층 사람들만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도 만나셨고, 이방인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만나셨고, 부유한 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너희는 건강하다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
너희는 의인이라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죄인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회개와 구원이 필요한 ‘똑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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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2,13-17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인사발령으로 본당을 옮기고 나서 교우분들에게 전임 신부님들에 대해 물으면 어떤 신자분은 이 신부님은 뭐 때문에 싫고 저 신부님은 이런 점이 별로고 등등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신자분은 이 신부님은 이런 걸 잘 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런 점이 좋았고 등등 긍정적인 부분들을 먼저 말씀하시지요. 그 신부님들이 신자분들을 차별대우 해서 이미지가 그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걸까요? 그보다는 신자분들이 사제를 더 나아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그런 차이가 생긴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남들로부터 ‘인복이 있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달리 ‘운’이 좋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그들이 자신이 만나는 이들로부터 좋은 점, 긍정적인 부분들을 잘 찾아내고 그것을 계발하도록 잘 도와준 결과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인복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매는게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함께 있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당시 세리는 유다 사회에서 미움과 배척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로마세력에 빌붙어 동족을 착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점을 모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당신 제자로 뽑으셨을 때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도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레위를 제자로 뽑으신 것은 그가 지닌 좋은 점을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신 뜻에 순명하여 당신과 함께 이뤄나갈 소명이 하느님께 얼마나 큰 영광이 될 지를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세리였던 레위는 계산이 빠르고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그런 점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다른 제자보다 예수님 말씀에 숨은 진의를 빠르게 파악했고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듣는 이들이 자기 상황에 비추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마태오 복음서이지요.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시고 맘껏 발휘하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의 탁월한 안목과 배려가 만들어 낸 놀라운 기적입니다.
남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며 배척하던 레위를 부르시어 그가 새로운 삶을 살 길을 열어주셨듯이,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께 대한 믿음과 전적인 순명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기회를 주시고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방법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형제를 대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먼저 용서하며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와 이해로,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형제를 품어주면 그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자기 허물과 부족함이라는 껍질을 깨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나에게는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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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우리에게 정의만으로 심판한다면 남아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말씀을 쌍날칼에 비유하며 그 보다 더 남카롭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불완전한 우리를 궤뚫으셔서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불완전한 모습, 유혹과 연약함을 갖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어떤 유혹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완전하면서도 완전한 입장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옭아매지만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시면서도 죄인 편에 서 계시며 옹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죄인들, 가난한 이들, 세리와 병자들을 사랑하시고, 사람들이 미워하는
세리, 마태오를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구약의 사고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습니다.
위선적인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우리는 미사 전례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세 번이나 자신의 가슴을 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 앞에서 시인하고 주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때로 비방할 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임을 자처하는 교만을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턱 없이 부족한데도, 완전한
입장에서 죄인으로 몰고 가며 멋대로 판단합니다.
내 자신이 진심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가슴을 세 번이나 치면서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겸손함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이 있듯,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또 ‘남의 흉 하나에 내 흉 열 가지’라는 우리의 속담을 거울 삼아 죄인인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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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죄인과 사회적 약자를 품는 사랑의 소명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 뒤 세관원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2,14), 그의 집에서 당신을 따르던 많은 죄인과 세리들과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2,15).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세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매겨 부당이득을 취했기에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직무상의 죄를 저지른 사회적 죄인인 셈입니다.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죄를 지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와 함께 음식을 먹고 친교를 나누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신 것은 명백히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2,16),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2,17)고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엇을 새겨야 할까요? 첫째는 첫 제자 공동체에 인간적인 나약함과 죄성(罪性)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을 받아들여 함께하셨던 예수님처럼, 죄인을 받아들여 함께함으로써 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또한 받아들여져야 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거룩해지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어둠과 상처를 회피하고 배제하고, 남의 죄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의인인양 처신합니다. 또한 본당과 신심단체, 수도공동체에서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형제자매를 판단하거나 은연중에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죄인들의 거룩한 공동체’이지 무결점의 조합이 아니기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을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함으로써 그들이 영혼의 병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새겨야 할 점은 예수님의 눈길과 발걸음이 ‘먼저’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 받고, 영혼의 병인 죄로 번민하는 이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소외되고 상처받고, 영혼의 어둠을 지닌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사랑의 회복에 집중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삶의 방향이요 행동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 까닭은 그들이 하느님의 선(善)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될 때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죄인의 어둠에 빛을 비춰주시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심으로써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대인관계를 맺으며 바삐 움직이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와 발걸음은 예수님처럼 의인이나 건강한 이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런 결핍이나 어려움이 없는 이들이 아니라, '먼저' 죄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영혼의 병을 앓고 있다면 나를 어루만져주실 주님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오늘도 의인이 아니라 아파하고 힘들어 하며 고통 중에 살아가는 나 자신과 죄투성이인 이 사회 모두를 위해 오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품어주는 훈훈한 날이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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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사랑 말씀
병자들을 고치신 이적사화들을 전해주고 나서 마르코는 이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낯선 행동을 전해줍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자타가 공인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육신에 천형을 받은 나병 환자들이나 중풍 환자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설게 보이는 이 기사를 여기에 제시하는 마르코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마르 2,17) "건강한 이들이 아니라 병든 이들을" 치유하러 오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환자가 육신이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세리와 죄인들은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이들인 셈이고, 이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벗님 여러분,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영육이 건강하지 못한 죄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 나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고,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히브 4,13)고 생각하면 사실 앞이 캄캄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해 주시는 대사제"(히브 4,15)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 초대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인이기 때문에 오늘 부르심을 받은 세리 레위처럼 하늘 나라의 삶에로 불러 주십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부르시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세리와 죄인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마르 2,15)고 마르코는 힘주어 말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같은 이들이 더 많을 수 있고 그중에 우리도 포함됩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이,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16)
행복하여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잔치로 초대받습니다. 불행하여라,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합니다.
행복하여라, 육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지금 건강한 사람들. 언젠가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몸져 눕게 될 것입니다.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병약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과 세리의 집에 가서 친교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 또한 죄인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환자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병이 낫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치료해줍니다. 병걸렸다고 환자를 비난하는 의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범했다고 비난하고, 나쁜 행동을 한다고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 제자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라고 어느 신학자가 말하였지요. 우리 모두는 '거룩한 죄인'이고 '축복받은 죄인'입니다. 죄인이어서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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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8. 연중 제 1주간 토요일.
한계를 극복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
<2025.1.18>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1:1~23절)
❝한계를 극복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
❚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여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순종으로 성취해야 합니다.
✔ 승리를 위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절).
하솔 왕 야빈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북방으로 진군해오자 두려움을 느끼고 북방의 족속들에게 소식을 전해 연합군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 군대는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4절)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진을 쳤습니다(5절). 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북방의 연합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6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북방 연합군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눈으로 바라보면 당연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여호수아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태산과 같은 높은 인생의 장벽이 우리 눈앞에 있어서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힘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며, 언제나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우리의 손에 쥐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지금 당장 급하게 해결을 해야 하는 모든 문제 또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한계를 극복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7~15절).
여호수아는 메롬 물가에 머무는 연합군을 습격해 끝까지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병거들을 몰살시켰습니다. 그리고 전투를 마친 여호수아는 하솔로 돌아와 야빈 왕을 죽이고, 그곳에 속한 모든 사람을 죽이고 불살랐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15절) 없었습니다.
영적 전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싸우고 계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능력은 한계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 가치로 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습격을 단행했고, 연합군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욕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16~23절).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종복을 완수했습니다.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16절)는 가나안 남부 지역을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는 가나안 중부 지역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 점령하였습니다(17절). 무엇보다 여호수아는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였습니다(21~22절). 가데스에서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아낙 자손을 두려워해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여호수아는 아낙 자손을 진멸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을 지파에 따라 분배했습니다(23절).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예측과 한계를 뛰어넘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때와 방법들을 내 마음대로 단정 짓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디게 삶이 진행되어 가더라도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주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주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삶과 환경의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해 나아가는 신실한 주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켜내는 올바른 분별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수 11:1~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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