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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때울고개 충남 청양
산줄기 : 금북칠갑지맥
들머리 : 대치면 형산리와 신풍면 한석골을 잇는 고개
위 치 충남 청양군 대치면/신풍면
높 이 ***m
#청양군 [靑陽郡] 연혁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한 54개국의 하나로 지천유역의 고리섬들에는 구로국(狗盧國)이, 무한천 유역의 용천들에는 사로국이 있었다. 백제 때는 3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칠갑산 동쪽으로는 열기현이, 칠갑산 서쪽으로는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 비봉·화성면에는 사시량현이 있었다.
신라 때는 웅진도독부에 속해서 열기현이 열성현으로, 고량부리현이 청정현으로, 사시량현이 신량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기에 청정현은 청양현으로, 열성현은 정산현으로, 신량현은 여양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성종이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청양군은 하남도의 청양, 정산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여양현에도 감무를 두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청양현은 천안부에 속하였고, 그 후 양광도에 속하였다가 공민왕이 양광도를 충청도로 개칭하였다.
조선 초기 1395년(태조 4)에 강무(講武)를 설치하고,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현감(縣監)을 두었다. 1664년(현종 5) 정산현과 통합하였다. 1674년에 다시 정산현과 분리, 청양현을 부설하여 조선 말까지 홍주현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청양현과 정산현은 청양군과 정산군이 되었으며 청양군은 동상·동하·서상·서하·남상·남하·북상·북하·읍내의 9개 면을, 정산군은 대박·백곡·목동·잉화달·청소·장촌·관현·적곡의 8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전국적인 군 통폐합 때 정산군을 통합하여 청양군이 되었다. 이때 홍주군 화성·여구향·얼방·상전의 4개 면과 공주군 성동면 반곡리·평동·건천리 일부와 공주군 반탄면 진두리와 부여군 도성면 구룡리, 공동면 금강리 일부 및 대흥군 이남면의 일부를 합병하여 읍내·운곡·대치·정산·목·청장·적곡·사양·화성·비봉 등 10면 115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42년 청장면을 청남면으로, 읍내면을 청양면으로 개칭하였고, 1979년 청양면이 청양읍으로 승격하였다. 1987년 적곡면이 장평면으로, 사양면이 남양면으로, 1991년 장평면의 적곡 2리가 도림리로 개칭되었고, 1992년 청양읍이 읍내 5리, 적누 2리, 송방 3리로 분구되었다. 2003년 현재 청양읍과 대치면·목면·비봉면·남양면·운곡면·장평면·정산면·청남면·화성면의 1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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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푸른 햇살 안고 청양장 길... 청양 짐때울고개
청양이란 이름을 음미하고 나면 절로 한낮의 땡볕아래 태양보다 더 붉게 번쩍이는 붉은 고추부터 떠오른다. 백로가 막 지난 이맘때, 청양으로 드는 충남 들판엔 벼가 누렇게 패여 가고 있다.
6.25 전쟁 때도 포탄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산골 청양. 지금도 사정이 그다지 달라진 게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외지로 연결된 찻길이라곤 칠갑산 북쪽 허리에 난 한티고갯길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한티고개도 대치터널로 대치돼 엣길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대티, 대치. 모두 한티의 다른 이름인데 청양 사람들은 조선시로 역로가 지나갈 정도로 주 통행로였던 이 고개를 그저 '큰 고개'라 불렀다. 큰 고개 아래에는 길손들을 받아줄 마을이 필요한 법.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첫 마을은 정산, 과거에는 정산현이었다. 정산에는 지금도 역촌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과거에 역촌마을이었음을 알려주는데 향교, 정산구층석탑 등 문화재도 제법 마을의 역사를 은연중에 일러주고 있다.
한티고개 외에도 시군과 읍면을 넘나드는 고개는 더 있다. 대치면, 신풍면, 정산면 등 칠갑산 북쪽 자락에는 이 고장에서 제법 이름있는 고개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대치면과 신풍면의 경계인 말티고개와 짐때울고개(저운이고개), 신풍면과 정산면의 경계인 솔티가 그것. 5일장이 공주장(1,6일)을 시작으로 청양장(2,7일), 유구장(3,8일장) 순으로 이어진 것을 따져보면 아마도 공주와 경게지역에 옹기종기 붙은 이들 고개들은 일대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유구는 장이 서기도 했지만 청양 언저리에서 한양 가려면 지나가야 했을 마을이다. 지금껏 포장이되지 않은 말티고개나 짐때울고개는 그런 면에서 한티고개나 솔티에 비해 유구까지 빨리 갈 수 있는 샛길로 또한 적잖이 이용되었을 법하고, 일행이 옛길 취재지로 지목한 곳은 이름에서도 힘겨운 고갯길의 여정이 짐작되는 짐때울고개이다.
예의 청양고추를 떠올리면 눈물을 찔끔 거릴 정도로 호되게 경험한 맵디매운 그 맛만 기억나지만 이곳 들판은 어디서 그런 매운 맛의 고추를 키워내는지 도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순하고 평화롭다.
고갯길 내력에 훤한 마을 이장집은 정자나무 옆이었다. 5대째 살고 있다는 토박이 윤장근(64세) 이장은 고개를 '짐때울' 혹은 '저운이' 라 부른다고 일러주는데 짐때울이란 이장이 살고 있는 쌍대리의 웃마을 이름인데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복대동' 이라 표기된 마을이다. 저운이는 짐때울 고개 너머 마을인 형산리의 옛이름으로 결국 저운이고개든 짐때울고개든 같은 곳을 이름이니 필시 고개이름이란 마을마다 각자 편리대로 부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짐때울고개 산행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온 이들은 대천여상 3학년6반 담임선생님인 이형복씨(51세)와 그의 반 학생들인 최재영, 임진숙, 김윤희양이다. 3명의 여고생들은 백두대간 식물탐사회원이자 한국식물사진가회원인 이형복 담임선생님이 오늘 옛길 산행중 일러줄 야생화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은 삼척 모르쇠농원의 엄기학씨(43세)와 태백 한얼뫼오름회의 김기현(34세), 손진학씨(43세), 그리고 서울에서 온 류두선씨(55세)와 함께 고갯길 산행에 나섰다.
이장집 언저리를 벗어나자 마을 포장길은 이내 흙길로 바뀌었다. 제법 넓혀지고 다듬어 진 길은 짐때울고개를 넘어 형산리까지 이어질 참이었다. 마을길이 넓혀진 것은 1974년. 3018부대가 7개월에 걸려 넓힌 이 길은 일명 작전도로로 생긴 것인데 신작로는 골짜기를 따라난 옛길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대한한의원을 지나 갈림길에 이르자 일행은 신작로와 옛길로 팀을 나눠 걷는다. 물길을 건너자 옛길 입구에는 성황나무가 그윽하게 자리하고 있고 길가에 만발한 물봉선이 가을 바람에 한껏 화사하게 부풀었다.
건너편 신작로에 승용차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무시로 드나든다. 승용차도 너끈히 다닐 수 있는 길이지만 좀체 인적이 드문 곳인데 의아하다. 누렇게 패여 고개를 떨군 채 일렁거리는 이삭들을 바라보며 일행들이 그제서야 성묘 하러 오는 일행임을 눈치챈다. 추석이 멀지 않은 것이다.
눈앞으로 간이창고가 나타난다. 버스승차장으로 제격인 간이건물은 농번기에는 그늘막으로도 쓰일 법한데 한켠에서는 산비탈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짐때울이라 불리는 복대동과 한석골이 갈라지는 삼거리 앞이다. 어느 길로 가든 일행이 넘으려는 고개로 올라설 것이지만 주막집이 있었다는 이장의 얘기에 솔깃해 한석골을 경유해 오르기로 한다.
흙벽을 두른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한석골은 꽃피는 산골의 정겨움이 물씬 느껴졌다. 굳이 주막집이 어디였는지 찾아보지 않아도 옛 마을 풍경이 상상되는 마을. 일행들은 고갯마루까지 옛길을 찾아 오르기로 했다. 6대째 이 마을에 살아온 토박이 최차량씨 댁에서 일러주는 대로 최씨 집 앞의 논두렁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섰다. 길은 골짜기를 따라가다가 가파른 등날을 타고 꼬불꼬불 이어졌다. 오르막길 끝에 나선 곳은 작전도로 개설 기념비석 앞. 짐대울고개였다. 작전도로를 따라 먼저 도착한 다른 일행들이 고갯바람을 쐬며 낮잠이라도 청하려던 참이다.
고갯길 역시 과거에는 대문을 나서면 만나는 길의 일부. 짐때울고개의 용도는 뭐니뭐니해도 청양장에 얽힌 얘기다. 부족한 식량을 사러 가거나 소를 내다 팔기 위해 넘어다닌 것은 일상적인데 고개를 넘어가면 또 구할 수 있는 것이 광천 새우젓이었다. 고갯마루에서 청양까지가 10km이니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광천이었던 것이다.
고개에서 내려선 마을 저운이(형산리)에는 농가마다 고추 수확에 여념이 없다. 힘든 노동치고 고추 따는 일에 비길 바 못된다고 말하지만 이 지역의 집집마다 고추 수확량은 적어도 1500근~2000근이 보통이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유난히 돋보이게 하는 날. 일행은 형산리마을 정자나무 그늘에 점심 상을 차렸다.
형산리에서 오룡리로 가자면 또 하나의 야트막한 등성이를 넘어야 했다. 오룡리고개라 부르는 이곳 형산리 사람들과 달리 오룡리 토박이가 일러준 이름은 사타배기재.
두번째 고개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온통 메밀꽃밭이다. 야외학습을 나온 3명의 여학생과 선생님은 메밀꽃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고 나머지 일행 역시 서두를 것이 없다. 고개를 내려가며 나타난 첫집에 들러 목을 축인다. 오룡리 마을 한 가운데로 드는 길에 알밤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토실하게 익은 햇밤. 가을이 무르익는 소리다.
*산행길잡이
쌍대리 입구에서 한석골까지 논둑길을 따라 옛길이 일부 남아 있다. 한석골에서는 최차량씨 집 앞으로 난 골짜기를 타고 날등을 오르면 20여 분만에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곳에 서 있는 전주의 번호(6653 393 농공설 11R 81)를 확인할 것. 형산리 마을회관 부근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고 이화리~시전리를 경유해 청양에서 시내버스가 다닌다. 취재팀은 오룡리~주정리를 경유하는 남서쪽 비포장길을 택했다.
39번 국도변의 신풍면 쌍대리에서 짐때울고개~한석골~형산리(저운이)~사타배기재~오룡리까지 약 8km, 걷는 데만 3시간 가량 잡으면 된다.
*교통
산행 들머리 쌍대리로 가려면 정산면과 신풍을 잇는 39번 국도변의 청흥리에서 걸어 들어간다. 청흥리까지는 공주~유구~정산~공주 방면으로 운행되는 시내버스(유구 출발 시간 08:35, 13:40, 17:10) 이용. 유구를 기점으로 한다면 유구↔정산 간 왕복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유구에서 08:20, 08:30(직), 10:10, 12:30, 15:10(직), 17:10에 출발. 유구~청흥리 사이는 15분 가량 걸린다. 옛길 산행 중 중간 마을인 형산리에도 청양에서 시내버스(청양교통)가 다닌다. 하루 세 번(07:00, 16:30, 19:05) 들어온다. 약 15분 소요.
*잘 데와 먹을 데
날머리 오룡리 김관희씨 집(041-543-5343)에서 민박 가능. 오룡리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칠갑산자연휴양림(943-4510)도 있다. 그외는 숙식할 곳이 마땅히 없으므로 공주 시내나 가까운 칠갑산도립공원의 집단시설지구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들머리쪽 청흥리에서 솔티터널 지나자마자 솔티기사식당(943-4223)이 있다. 된장찌개백반(4,000원)을 잘한다.
*가볼 데
모덕사 조선 강화조약체결 당시 척사론을 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적지.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다. 공주에서 정산 방면의 36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공수원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약 3.5km 가량 가면 있다. 최익현 선생 유물 전시관이 있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순창에서 의거일인 4월13일을 기해 매년 제를 올린다.
칠갑문화제 매년 9월 중순경 열린다. 장승문화축제, 청양고추, 구기자 축제.
칠갑산도립공원 칠갑산 정상 북쪽의 한티고개와 상하 대웅전 두 개를 거느린 장곡사가 볼거리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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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 걸어넘기 ▒ 푸른 햇살 안고 청양장 가던 길 ▒ 경북 청양 짐때울고개 |
청양(靑陽)이란 이름을 음미하고 나면 절로 한낮의 땡볕아래 태양보다 더 붉게 번쩍이는 붉은 고추부터 떠오른다. 백로가 막 지난 이맘때, 청양으로 드는 충남 들판엔 벼가 누렇게 패여 가고 있다. 6.25 전쟁 때도 포탄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깊은 산골 청양. 지금도 사정이 그닥 달라진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외지로 연결된 찻길이라곤 칠갑산 북쪽 허리에 난 한티고갯길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한티고개도 대치터널로 대치돼 옛길이 돼버리고 말았지만. 대티, 대치. 모두 한티의 다른 이름인데 청양사람들은 조선시대 역로가 지나갈 정도로 주 통행로였던 이 고개를 그저 ‘큰 고개’라 불렀다. 큰 고개 아래에는 길손들을 받아줄 마을이 필요한 법.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첫마을은 정산, 과거에는 정산현이었다. 정산에는 지금도 역촌리란 지명이 남아 있어 과거에 역촌마을이었음을 알려주는데 향교, 정산구층석탑 등 문화재도 제법 마을의 역사를 은연 중에 일러주고 있다.
한티고개 외에도 시군과 읍면을 넘나드는 고개는 더 있다. 대치면, 신풍면, 정산면 등 칠갑산 북쪽 자락에는 이 고장에서 제법 이름있는 고개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대치면과 신풍면의 경계인 말티고개와 짐때울고개(저운이고개), 신풍면과 정산면의 경계인 솔티가 그것. 5일장이 공주장(1,6일)을 시작으로 청양장(2,7일), 유구장(3,8일장) 순으로 이어진 것을 따져보면 아마도 공주와 경계 지역에 옹기종기 붙은 이들 고개들은 일대에서 가장 통행량이 가장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유구는 장이 서기도 했지만 청양 언저리에서 한양 가려면 지나가야 했을 마을이다. 지금껏 포장이 되지 않은 말티고개나 짐때울고개는 그런 면에서 한티고개나 솔티에 비해 유구까지 빨리 갈 수 있는 샛길로 또한 적잖이 이용되었을 법하고. 일행이 옛길 취재지로 지목한 곳은 이름에서도 힘겨운 고갯길의 여정이 짐작되는 짐때울고개이다. 예의 청양고추를 떠올리면 눈물을 찔끔 거릴 정도로 호되게 경험한 맵디매운 그 맛만 기억나지만 이곳 들판은 어디서 그런 매운 맛의 고추를 키워내는지가 도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순하고 평화롭다.
고갯길 내력에 훤한 마을 이장집은 정자나무 옆이었다. 5대째 살고 있다는 토박이 윤장근(64세) 이장은 고개를 ‘짐때울’ 혹은 ‘저운이’라 부른다고 일러주는데 짐때울이란 이장이 살고 있는 쌍대리의 웃마을 이름인데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복대동’이라 표기된 마을이다. 저운이는 짐때울고개 너머 마을인 형산리의 옛이름으로 결국 저운이고개든 짐때울고개든 같은 곳을 이름이니 필시 고개이름이란 마을마다 각자 편리대로 부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짐때울고개 산행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온 이들은 대천여상 3학년 6반의 담임선생님인 이형복씨(51세)와 그의 반 학생들인 최재영 임진숙 김윤희양이다. 3명의 여고생들은 백두대간 식물탐사회원이자 한국식물사진가회원인 이형복 담임선생님이 오늘 옛길 산행중 일러줄 야생화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은 삼척 모르쇠농원의 엄기학씨(43세)와 태백 한얼뫼오름회의 김기현(34세) 손진학씨(43세), 그리고 서울에서 온 류두선씨(55세)와 함께 고갯길 산행에 나섰다.
이장집 언저리를 벗어나자 마을 포장길은 이내 흙길로 바뀌었다. 제법 넓혀지고 다듬어진 길은 짐때울고개를 넘어 형산리까지 이어질 참이었다. 마을길이 넓혀진 것은 1974년. 3018부대가 7개월이 걸려 넓힌 이 길은 일명 작전도로로 생긴 것인데 신작로는 골짜기를 따라난 옛길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대한한의원을 지나 갈림길에 이르자 일행은 신작로와 옛길로 팀을 나눠 걷는다. 물길을 건너자 옛길 입구에는 성황나무가 그윽하게 자리하고 있고 길가에 만발한 물봉선이 가을 바람에 한껏 화사하게 부풀었다. 건너편 신작로에 승용차들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무시로 드나든다. 승용차도 너끈히 다닐 수 있는 길이지만 좀체 인적이 드문 곳인데 의아하다. 누렇게 패여 고개를 떨군 채 출렁거리는 이삭들을 바라보며 일행들이 그제서야 성묘 하러 오는 행렬임을 눈치챈다. 추석이 멀지 않은 것이다. 눈앞으로 간이창고가 나타난다. 버스승차장으로 제격인 간이건물은 농번기에는 그늘막으로도 쓰일 법한데 한 켠에서는 산비탈에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짐때울이라 불리는 복대동과 한석골이 갈라지는 삼거리 앞이다. 어느 길로 가든 일행이 넘으려는 고개로 올라설 것이지만 주막집이 있었다는 이장의 얘기에 솔깃해 한석골을 경유해 오르기로 한다.
흙벽을 두른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한석골은 꽃피는 산골의 정겨움이 물씬 느껴졌다. 굳이 주막집이 어디였는지를 찾아보지 않아도 옛 마을 풍경이 상상되는 마을. 일행들은 고갯마루까지 옛길을 찾아 오르기로 했다. 6대째 이 마을에 살아온 토박이 최차량씨 댁에서 일러주는 대로 최씨 집 앞의 논두렁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섰다. 길은 골짜기를 따라가다가 가파른 날등을 타고 꼬불꼬불 이어졌다. 오르막길 끝에 나선 곳은 작전도로 개설 기념비석 앞. 짐때울고개였다. 작전도로를 따라 먼저 도착한 다른 일행들이 고갯바람을 쐬며 낮잠이라도 청하려던 참이다. 고갯길 역시 과거에는 대문을 나서면 만나는 길의 일부. 짐때울고개의 용도는 뭐니뭐니 해도 청양장에 얽힌 얘기다. 부족한 식량을 사러 가거나 소를 내다 팔기 위해 넘어다닌 것은 일상적인데 고개를 넘어가면 또 구할 수 있는 것이 광천 새우젓이었다. 고갯마루에서 청양까지가 10킬로미터이니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광천이었던 것이다. 고개에서 내려선 마을 저운이(형산리)에는 농가마다 고추 수확에 여념이 없다. 힘든 노동치고 고추 따는 일에 비길 바 못 된다고 말하지만 이 지역의 집집마다 고추 수확량은 적어도 1500∼2000근이 보통이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유난히 돋보이게 하는 날. 일행은 형산리마을 정자나무 그늘에 점심 상을 차렸다.
형산리에서 오룡리로 가자면 또 하나의 야트막한 등성이를 넘어야 했다. 오룡리고개라 부르는 이곳 형산리 사람들과 달리 오룡리 토박이가 일러준 이름은 사타배기재. 두 번째 고개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온통 메밀꽃밭이다. 야외학습을 나온 3명의 여학생과 선생님은 메밀꽃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고 나머지 일행 역시 서두를 것이 없다. 고개를 내려가며 나타난 첫집에 들러 목을 축인다. 오룡리 마을 한 가운데로 드는 길에 알밤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토실하게 익은 햇밤. 가을이 무르익는 소리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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