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4
9월18일[연중 제2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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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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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cJ5TV4Q71I
[예수회 이보람 마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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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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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sYamRIz6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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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는 제가 사제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을 때 읽기 시작해 마칠 때쯤엔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 준 책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들어갔더니 이 책은 거의 금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랜턴을 비추며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을 가보니 로마에서 바티칸 방송국에서 어떤 사제가 이 책을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금서였지만 지금은 바티칸 방송국에서도 해설해주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금서였다는 이유로 많은 분이 책 이름만 듣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안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좀 지나친 듯 보이나 그런 분들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과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좋은 가르침과 나쁜 가르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시려는 것과 같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와 좋은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력이 없었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행복의 기준이 ‘돈과 여자와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제가 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그런 것들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매가 지혜의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은 것은 구약의 ‘광야’의 삶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삶이란 ‘돈과 여자와 성공’을 떠나는 삶입니다. ‘파라오’를 떠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 빵과 포도주는 바로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신 천상의 ‘양식과 음료’입니다.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파라오가 제시하는 세속-육신-마귀를 벗어나는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라오라는 자아를 떠나 삼구를 죽이는 광야의 삶을 당신이 주시는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 곧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파라오가 나를 괴롭히는 뱀과 같은 자아임을 깨닫고 그를 떠나 광야로 나오게 하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은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이끄는 모든 것은 지혜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그런 여러 도구를 통해 지혜의 자녀를 탄생시키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귀와 눈을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만 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부분적인 기억력을 상실한 두 대비되는 환자가 나옵니다. 이 환자들은 어느 시간 이후의 기억이 모조리 삭제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도 1분만 지나면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짧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40대 중반이지만 딱 군대 있을 때까지만 기억합니다. 그러니 쾌활하고 젊었을 때의 삶을 계속 즐기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사에 참례합니다. 기억이 20대 초반에 머물러있지만, 자기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그 사람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식료품 주인으로 여기며 “어떤 치즈를 드릴까요?”라고 말하고 끊임없는 말을 해 댑니다. 아니면 가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해집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사람 안에는 영혼이 없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다 기억력이 소멸하였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니 정체성이 명확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의 자녀이고 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카라바지오는 천재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때마다 추기경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여자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더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을 나폴리와 말타섬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후회하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골리앗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있는 유명한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 안의 자아인 골리앗을 이제 죽였다는 뜻으로 추기경에게 용서를 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칼에는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는 글을 새겨넣었습니다.
참 행복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아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르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추기경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죽습니다.
어쨌든 그는 어리석음의 자녀에서 지혜의 자녀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교만한 자아를 죽이고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탈출시켜 광야로 이끌려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것들은 지혜의 자녀가 탄생하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하지만 자아를 키우는 것들은 모두 악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의 자녀가 아니라 지혜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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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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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 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 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절)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절).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 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 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 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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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일까요? 꼭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짚어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갔을 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환히 알게 될 때에는 믿음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믿음과 희망은 천국 문 앞까지 가고, 천국 안에서 온전한 것이 왔을 때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신령한 언어도 온전한 것이 오기 전의 기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것이 와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요? 신령한 언어도 선행도 필요 없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내준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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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1-35)
1) 그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 내면서 놀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라는 말은,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이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한다.”이고,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거부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도 거부하고 복음도 거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고, 당연히 오늘날의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2) 세례자 요한이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생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자기들이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가 미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탓을 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라는 말씀은, 당신의 평소의 생활 모습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시 나게 극기고행을 하시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식사에 초대하면 언제든지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소의 생활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 9,58) 아주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라는 말은, “예수는 예언자나 랍비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는, 시정잡배 같은 사람이다.”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리 같은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비난하는 말인데, ‘저자는 죄인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생활 모습이 전혀 예언자답지도 않고 랍비답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예수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3)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이렇게 표현은 똑같은데,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회개’에 초점을 맞춘 선포이고,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춘 선포입니다. 어떻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또는 회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두 선포의 공통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거부한 일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거부한 일은, 둘 다 ‘회개’를 거부한 일이고, 사실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셔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안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회개하기를 거부했을까? 사람들과 요한의 대화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8), 즉 “온 삶으로 실행하는 회개를 하여라.”라고 가르쳤을 때, 군중이 그에게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루카 3,10) 그때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라고 대답했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고 말했습니다.(루카 3,13-14)
요한의 말을 정리하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라.”이고, “기득권을 내려놓아라.”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에 거부감과 반감을 느꼈을 것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4) 오늘날에도 ‘회개’ 라는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고, 회개할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려라.”, 또는 “내려놓아라.”라는 말에 대해서 반감과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 회개하라는 말을 못하거나 안 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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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기환 요셉 신부님]
<새로운 지혜가 필요할 때>
30대 중후반쯤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맴돌기 시작한다. 이때쯤 되면 나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던 좋은 직장도 시시해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던 폭넓은 인간관계도 활기를 잃어버린다.
대외적으로는 아직도 인정받고 멋있게 보이는 내 모습이 정작 나 자신에게는 매력 없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살아오는데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던 삶의 전략과 전술들이 이제는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굴레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지혜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과업과 규범에 맞추어 살아왔던 내 모습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살려내고 형성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피리를 분다고 무조건 따라서 춤추고, 곡을 한다고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우는’ 예수님 시대의 우매한 대중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예언자 요한은 남들처럼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먹지 않아서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남들이 상종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 하고 어울리다가 결국 십자가형까지 받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할 시기다. 그것은 집단적 가치와 규범에 맞추느라 눌러놓거나 잊고 살아왔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찾기 시작할 때, 나의 얄팍한 지혜를 훨씬 폭넓게 감싸 안는 하느님의 지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
인간의 지혜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삶은 그런대로 진행되겠지만 너무나 무미건조한 나날의 연속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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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님]
<닫힘>
가끔 부족한 제 강론과 강의를 통해 새로운 마음을 다짐하는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보면 정말 마음을 열고 듣는 그네들의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사제 모임과 연수 덕분에 강의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제들의 삶이 그러하듯 말하는 것, 강의하는 것에 익숙한 저에겐 오랜만에 다른 분들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가르치는 데 익숙한 제겐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제 시선과 제 마음으로 재단하는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만 많이 듣는 분들을 보면 귀만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하는데 제 경우에는 귀 하나도 천국에 못 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늘상 비판하는, 그리고 오늘 주님의 비판의 자락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애당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닫혀 있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 자신만의 믿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분명 주님으로부터 된통 꾸지람을 들을 것 같습니다.
열려 있음으로 인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이길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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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예수의 기적도 받아 들이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루카 7, 31-35)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그들의 생활 태도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시는 것이다.
즉,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 학만 어울리는 구나!'" 하고 비평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다른이를 쳐다보는 마음 자세는 과연 어떠한가? 혹시라도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지적하시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가졌던 사고 판단, 고집스런 비평의 자세는 아닌지?
여기 모인 우리들은 모두 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의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겨대고, 강요하며, 그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선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하며, 상대를 존경하여 섬기며 봉사하고자 하는 자세가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속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겸손되이 따르는 자세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게 되는 것은, 좋기도 하고 한편 불행을 자초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기 쉬우나,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 끝내는 승리하게 된다고 오늘 복음이 일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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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새삼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어린 날의 장터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답고 추억으로,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은 장터에 구경 나오는 사람들을 신명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의 집은 시내 한복판에, 상설시장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랫 장날이 서는 날이며 온갖 새로운 물건들과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기에 사람 냄새와 삶의 끈적끈적한 질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고 기억됩니다. 세상의 변화만큼 장터 또한 놀랍게 변신했지만, 예전의 향수가 그리울 때는 한 번씩 들러보는 것이 장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비웃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험담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장터에 노는 아이들에 빗대어 질타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 결국 그들의 눈에는 어떤 존재이든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자기 위주의 관점과 시선에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이중적인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는 가사는 당대 시대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치 예전에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이 골목에서 고무줄넘기 하면서 불렀던 노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장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공장소이며, 이 장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품을 사고파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이고, 물건을 사도록 흥미와 시선을 끌기 위해서 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 기도하기 어려운 시끄러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장터는 상인과 손님 사이에 흥정을 위해 소리에 더 큰 소리로 주고받음을 통해서 각자의 이익, 상인과 고객 사이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요구를 설득시켜야 하는 소란한 자리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외쳐대는 장터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이기적인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해 섬기도록 바라시는 하느님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디 손해 보고서 장사하는 분 보셨나요. 사실 안면이 있다고 늘 장사꾼이 하는 표현, 손해 보고 주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장사꾼은 본질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자선 사업가는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제가 경험한 것은 단골 가게이고 분명 얼굴도 알고 신부라는 사실도 알면서도 외국 사람이라고 가격을 속일 때는 참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제게 별로 큰 액수는 아니기에 말없이 속아줄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속고 나면 다시는 가지 않는 게 사람이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장보다 가격표가 붙은 곳을 선호하는 까닭은 흥정하는 게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지 않을 때, 구경할 때는 시장이 적합한 장소이지만요. 사람 냄새도 맡고...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다.”(6,32)라는 표현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 놀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라는 것은 본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잔치에는 술과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수반하지만, 장례에도 술과 음식이 필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슬픔과 애도 분위기가 우선하기에 절제와 참회의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놀이의 특성과 분위기에 맞게 장례 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있으며, 잔치 놀이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역의 맡아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대의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른 동요(?)에 빗대어,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외면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요즘 자주 표현되는 제3의 길을 걸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입지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보신책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발상에서 나온 해결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편리대로!
우리는 매일 수많은 희비가 교차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잔치가 또 다른 편에서는 장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할 때가 있고, 함께할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기 마련인 것이 인생살이잖아요. 이렇게 잔치와 장례가 뒤섞이고 교차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중요한 것은 잔치 놀이든 장례 놀이든 놀이가 벌어질 때마다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놀이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뒹굴면서 매 순간을 만끽하면서 참여하고 호응하며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선뜻 그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는가를 침묵 가운데서 가끔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장터는 바로 우리 내면의 공간입니다. 이 영적인 장터인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인생살이를 살아가게 되고 그런 만큼 삶은 점진적으로 활기와 활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곧 사도 바오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자 했던 ‘더욱 뛰어난 길’(1코13,31)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능력을, 지식을 가졌다 한들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함께 어울림 속에서 나누는 삶의 신비 곧 사랑의 지혜는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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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많은 이가 들어주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제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세요.”
부모님의 건강을 기도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신다고 하고, 자녀의 진학을 위해 기도해도 현재 삼수째라고 하십니다. 남편의 승진을 기도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직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 밖에도 기도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매달리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십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라고 불평합니다. 다음날 나와도, 또 그다음 날 나와도…. 결국 포기하려고 할 즈음 땅 위로 무엇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쑥쑥 자라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기도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멈춰서는 안 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밭에 나가야 씨가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기쁨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는 함께 춤춰야 하고, 장터에서 곡을 할 때는 함께 슬퍼해야 놀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뜻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며 반대했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면서 반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자기 뜻만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뜻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기쁨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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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깃장을 놓지 마라>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삐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러고는 사람으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는 넉넉함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 6,14-1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은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봉헌해야 할 분입니다.” 나의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정채봉 @@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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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와 나>
루카 7,31-3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그대와 나>
그대
나와
함께하려고
내가
되어주지 않아도
되어요
나
그대와
함께하려고
그대가
되어드리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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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렀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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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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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랑의 공감능력>
+찬미예수님
서품을 받자마자 첫 본당에 막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청년들과 첫 단체 회식이 있었는데 일이 있어 조금 늦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청년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제 자리는 테이블 한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서글서글한 청년들 사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주위를 둘러봤는데 테이블 양쪽 끝에 앉은 청년들의 분위기가 꽤나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성격이 활달한 여자 청년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양쪽 귀퉁이에는 저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남자 청년들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같은 성별이기 때문에 사제를 더욱 조심스러워 하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자리를 옮겨 앉았고 평소 남자 청년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구 이야기가 나왔고 야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구동성으로 저에게 축구 게임을 하냐고 물어왔습니다. 당시 남자 청년들 사이에서 축구 게임이 유행이었으므로 저 역시 그 게임을 하는지 물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그 게임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솔직히 사실을 이야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대로 지내다간 아무래도 남자 청년들과 친해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바로 다음날 전자시장에 가서 게임기를 사왔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매뉴얼을 뽑아서 연구하고 여러 가지 영상을 찾아보며 틈이 나는 대로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약 2주가 지나 손가락에 물집이 생길 무렵 저는 남자 청년들을 사제관에 초대했고 그때부터 저의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에 남자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지자 평일이고 주일이고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도 사제가 청년들과 게임을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저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충분히 거룩했습니다. 관계가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고민을 털어놓는 청년들이 생겨났고, 그러다 보니 함께 기도하고 기타치고 성가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청년들과 소성당에서 평일 미사를 따로 하고 교리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적 측면에서 매우 좋은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이 경험 이후, 어떻게 사목활동을 잘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후배들에게 저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사제로서 기본적인 소양이 갖춰져 있음을 전제로, 적당한 스포츠, 하나 정도의 악기, 최신 가요에 대한 지식과 유행하는 게임 하나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목활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다른 말로 “공감능력”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공통적인 감각이 있을 때 상대방은 마음을 열게 되고 신뢰를 갖게 되며 바로 그때에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활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에게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지?” 라고 이야기 하면 아이들은 무표정하지만, “나는 요즘 어떤 연예인이 좋더라”라고 말하면 비로소 미소를 띱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감능력”은 사제에게 매우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지적하십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고행을 할 때에 그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했던 자들입니다.
공감능력이 없으므로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의도로 고행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신실한 것인지 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그와 반대로 먹고 마시자, 이제는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과 함께하며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공감할 수 없는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니 그들의 마음에 지혜가 드러날 기회는 사라지고 자연스레 미움과 원망만 생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감능력을 어떻게 하면 잘 발달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에 대한 답은 오늘의 제 1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 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와 함께 하고자 애정을 담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아끼게 되고 진정어린 교류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청하기만 하지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공감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투정만 늘어가고 기도를 즉각즉각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수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애정 어린 시선과 사랑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과 우리의 대화의 창은 열리게 되고 나아가 깊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게임패드를 잡고 서투르게 홀로 게임을 연습하던 새 사제 시절의 저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평소에 게임을 해 본적이 없어 몇 번이고 때려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로 패드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이러한 사제의 모습이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그때의 저의 마음은 온통 청년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했습니다.“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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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무지에 대한 답은 평생 사랑 공부와 실천뿐이다-
지금도 생각하며 잘 했다 싶은 평생 좌우명입니다. 여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다음 평생 좌우명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은 두터이”
하느님의 꽃이, 하느님의 시가 하느님의 사랑이자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꽃이, 시가 상징하는바 아름다움이요 사랑입니다. 꽃같이, 시같이 살아간다 함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비움은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할 때 비옥한 마음의 토양에서 보기 좋게 자라나는 꽃같은 삶, 시같은 삶입니다.
시(詩)같은 인생은 말씀(言)의 사원(寺)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이자 지혜가 됩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함이 지혜요 무지에 대한 참 좋은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지혜로운 삶에 좋은 지침이 됩니다.
“남을 들여다보기는 쉬워도 나를 깨닫기는 어렵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허물을 지적받을 때 기뻐하였다.”<다산>
이런 이들이 사랑과 지혜의 관대한 어른이자 참 선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슬기로움(智)’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현명함(明)’이다.”<도덕경>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얼마전 강론 제목이었지만 오늘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랑도 평생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지혜로워지고 무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탄식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의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당대의 세대에 대한 깊은 탄식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공감과 배려, 섬세함과 존중이 사라진 무감각하고 무뎌진 무지의 영혼들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왜곡된 사랑, 병든 사랑, 변질된 사랑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랑과 지혜의 눈이 아니라, 편견으로 고착된 왜곡된 시선의 눈먼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사람이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현존하는 세대들이요 회개가 시급한 이들이요, 우리도 또한 그러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냅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지혜의 자녀들이요, 두분의 삶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자들 역시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지닌 우리들이라면 우리 역시 지혜의 자녀들이 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이 되게하는 평생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사랑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 병든 사랑을, 한마디로 무지의 사랑을 치유할 절호의 기회를 줍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사랑은 연인간의 육체적 성적 에로스적 사랑도 아니요, 친구간의 우정같은 필로스적 사랑도 아닌, 하느님을 닮은 일방적 이타적 사랑이요, 인간 모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연민과 존중, 배려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정의할 때 그런 사랑입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끊임없이 주어지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아가페 사랑의 동력은 어디서 기인합니까? 필로스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구와 끊임없이 주고 받는 우정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샘이 됩니다. 제 아무리 많은 능력에 온갖 뛰어난 덕행을 지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 생생한 행위로 표현되니 각자 사랑의 현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2.사랑은 친절합니다.
3.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4.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5.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6.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7.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이요, 우리는 영원한 초보자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로 사랑이 성장, 성숙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지금은 거울에 비친 어렴풋한 모습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끝까지 계속되지만 으뜸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무한한 창조주 하느님과 마주할 때, 믿음은, 희망은 필요없을 것이니, 우리 존재의 모든 가능한 욕망이 영원히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우리를 창조된 행복으로 채워주는 그 아가페 사랑에 영원히 젖을 것입니다.
이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맛보는 천상에서의 아가페 사랑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불순한 사랑을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우리 모두 꽃같은, 시같은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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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첫째 성령의 언어도 요란한 징이거나 소란한 꽹과리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물놀이에서 징이나 꽹과리는 대단한 악기이고 중요한 악기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시끄러움뿐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왜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봤듯이 코린토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없이 성령에 취해 방언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성령의 은사로 방언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소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나고 일치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둘째로 아무리 영적 능력과 덕이 있어도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재승덕(才勝德)한 사람을 낮추봅니다. 재주는 많은데 덕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그것을 나쁜 데 쓰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신학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꼴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더러운 영이나 악령도 영적인 능력이 있고, 천상 신비와 세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이 없지요.
악마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의 대표이고 마찬가지로 영적 능력이나 지식이 많은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넘어 악마적인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셋째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사랑 실천을 해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는 오늘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내 몸까지 넘겨주는 것은 대단한 사랑 행위인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재산 나눔과 자기 내어줌은 분명 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만 사랑이 없이 실천한 그런 행위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사랑 행위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사랑이 아닌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재난이 발생했을 때 T.V에 나와 성금을 내는데 자기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위선적으로 내놓는 경우 말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는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처럼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고,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내 행복과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너 또는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남의 불행이 아니라 자기 불행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실제로는 사랑 없이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임을 뼛속까지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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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ㄴㄷ)
<더 큰 은사인 사랑!>
오늘 복음(루카7,31-35)은 '요한과 예수님이 배척당하시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들은 후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서 의로우심을 받아들였지만,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 곧 '예수님을 통해서 이룩하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물리쳤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두고,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오늘 독서(1코린12,31-13,13)는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2,31)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들려줍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활동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13,4-7.13)
요한과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사랑이 메말랐던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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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 34)
한가위
연휴의
귀한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마음을 나누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무례한
우리들의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비생산적인
헐뜯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함부로
구겨넣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겉모습만 보지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람대접을
하십니다.
사람대접이
복음이며
위로이며
그리움입니다.
엎드려 절망하는
이들의 참된
희망이
되십니다.
삶을 가르쳐주어도
들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부끄러운
우리들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어
평화를 나누어도
평화를 거부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어도
우리는
불가능을 믿지
가능을 결코
믿지 않습니다.
가능이 복음이며
열림이 복음이며
고마움이
복음입니다.
소중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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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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