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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풍비번(非風非幡)
-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바람·깃발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갔기에 논쟁 가능
후설의 ‘마음지향성’ 주목
혜능의 가르침과 일맥상통
활동성 잃은 고착된 마음은 집착이며 자비심도 사라져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고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 때 육조 혜능은 말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無門關) 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1. 고착된 마음의 활동성 일깨우다
남중국의 법성사(法性寺)라는 사찰을 아시는지요. 달마(達磨)로 시작되어 다섯 번째 홍인(弘忍, 601-674)에 이른 선종의 법맥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땅 속에 묻혀 있던 수맥이 땅 위로 솟구치듯이 바로 이곳 법성사에서 선종의 법맥이 다시 용솟음친 것입니다. 사라진 육조(六祖), 그러니까 여섯 번째 큰스님 혜능(慧能, 638~713)이 화려하게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15년 전 북중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않은 남중국 촌놈 출신 혜능(慧能)이 홍인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건은 당시 선종 내부에서는 커다란 센세이션과 함께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어디서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무리는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부반응이 가라앉는 데 자그마치 15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선종을 이끌어야 할 커다란 책무를 지고 있는 혜능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미혹됨을 방기하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고 있던 법성사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육조의 신분을 감춘 혜능도 끼어들어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사찰에 몰아친 강한 바람으로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맞서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역습을 가했습니다. 물론 상식적인 생각, 아니 정확히 말해 서양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바람이 움직인다는 스님 쪽에 설 것입니다. 그렇지만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스님은 바보였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깃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바람이 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던 스님의 속내였을 테니까요.
두 스님의 논쟁으로 ‘열반경’ 강의는 잠시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의에 참여했던 수행자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갑론을박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날카로운 칼날에 조용히 잘리는 비단의 미세한 소리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그 작은 소리는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논쟁을 주도했던 두 스님뿐만 아니라 논쟁에 참여했던 모든 수행자들을 침묵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행자들 속에 숨어 있던 혜능이 드디어 등장하며 모든 논쟁을 종식시켜버린 겁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갔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인다거나 혹은 깃발이 움직인다는 논쟁 자체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2. 세계는 마음 밖에 존재 안해
현상학(phenomenology)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우리 마음이 가진 특성은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에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에 쏠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향성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후설은 말했던 겁니다.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가 객관이나 세계를 우리 마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에마(noema)’라고 정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노에마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인 누스(nous)가 지향하고 있는 대상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니 만일 법성사 집회에 참여했다면, 후설은 혜능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기존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이 새롭게 해명한 지향성 개념을 혜능이 한 마디로 멋지게 표현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무문관(無門關)’의 편찬자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는 법성사의 에피소드에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스승 혜능의 말마저도 거부하는 무문 스님의 기개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후설도 당혹감을 느꼈을 겁니다. 지금 무문 스님은 마음이 가진 지향성이란 특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후설의 현상학이 가진 한계이자, 동시에 선종의 통찰력이 서양정신을 뛰어넘는 대목이 아닐까요. 다행히도 후설은 안심해도 됩니다. 지금 무문 스님이 지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 경우 마음이란 우리의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마음, 그러니까 노에마로서의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아파”라고 말했을 때 ‘아픈 마음’은 이미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마음이라기보다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외부에도 쏠리지만 동시에 내부에도 쏠릴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화되어 실체화된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활동, 혹은 쏠림이란 활동이 바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장면에만 고착될 때나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할 때, 마음은 ‘활발발(活潑潑)’한 활동성이 잦아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혜능이나 무문이 걱정했던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고착되어 있을 때 혜능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활동성을 깨우려는 것이지요. 혜능의 말을 듣고 이제 바람이나 깃발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마음이 고착되어 있을 때 무문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깃발과 바람 대신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마음의 활동성을 다시 깨우려는 것입니다.
3. 지적 이해와 체현은 엄청난 간극
주변의 어른들은 말하곤 합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머리가 아닌 삶에서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이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살아서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작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면, 그래서 오매불망 콩밭에만 있다면, 마음은 다른 것을 지향할 여지가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볼까요. 재산이어도 좋고 아니면 가족이어도 좋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러니까 재산을 잃거나 아니면 가족 중 한 명이 비운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그 잃어버린 재산이나 이제 볼 수 없는 그 사람에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쏠리다 못해 이제는 그것들에 마음이 완전히 아교처럼 붙어버립니다. 혹은 그것들이 마음에 접착제처럼 붙어버렸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바로 이것이 ‘집착’ 아닌가요.
잃어버린 재산이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집착할 때, 우리에게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둘 여지가 없게 됩니다. 하늘에 흰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도,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심지어 내 앞에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말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혹은 지나친 경쟁 논리에 치어 생명을 끊으려고 하는 귀한 자식들의 고뇌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처럼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도약하는 것과 같은 ‘활발발’의 역동성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살아서 펄떡이는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생길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무엇인가에 애정과 관심이 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쏠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굳어 있는 마음으로 자비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혜능이 왜 육조라는 감당하기 힘든 스승의 자리에 올랐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홍인이 일자무식으로 알려진 혜능에게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면서 그의 깨달음을 인정한 이유도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는지요. 혜능은 그 앞의 조사들과 그 후에 도래할 조사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역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혜능의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등산지도로 설악산을 눈으로 더듬어 가는 것과 몸소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설악산을 한발한발 걷는 것 사이의 차이일 겁니다.
여기서 해가 떴다고 해서 바로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이 바로 녹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해가 뜨고 내일도 해가 뜨고. 이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겨울 내내 쌓였던 눈들이, 언제 녹을지 의심스럽기만 했던 눈들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겠지요. 그때까지 마음 속에 혜능의 이야기를 담아 두어야만 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