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기행 41 -詩殿시전에
-상희구
그냥 詩殿시전에 아뢴다
우주이면서 먼지인
화염이고 재(灾)인 시전에 아뢴다
詩殿시전!
신비롭기로는 柰乙神宮내을신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角形각형이고 공(球)인
물이면서 불인
신선이면서 한 마리 벌레일 뿐인
시전에 아뢴다
갓끈을 고쳐매고 의관을 바르게 하여
온갖 威儀위의를 갖춘 다음
시전에 아뢴다
은하에 비치는 맑디 맑은
한 방울 수증기이면서
시궁창의 개숫물인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수은이면서 깃털인
시전에 아뢴다
聖바울, 詩經시경, 품, 이끼, 金剛力士금강력사, 무지개,
패랭이꽃이면서 마른장마이고
번개인
시전에 아뢴다
다시 한 번 국궁하고
시전에 아뢴다
聖下성하
陛下폐하
殿下전하
閤下합하
閣下각하, 친구, 도적놈, 똥작대기 개망할놈, 꽃이고 비듬이면서, 때(후)인
시전에 아뢴다
물고기와 별이고
箱子상자이고 철학인
왕이면서
음유시인인
물푸레나무이면서
과학인
鐵骨構造物철골구조물이면서
정맥이고
도시와 구름인, 시전에 아뢴다
또 국궁하고 시전에 아뢴다
너도밤나무이고
관절염이며
색깔을 다는 저울인
시전에 아뢴다
지옥이면서 달(月)인
시전에 아뢴다
컴퓨터이면서 물, 자유이면서 손가락인
시전에 아뢴다
팔레스타인, 블루엔젤, 랍소디 인 블루, 눈물, 賜藥이
면서 脾藏비장인 시전
에 아뢴다
시가 하나도 없는데
모조리 시 뿐인
신문지이면서
비석인, 산철쭉과 붉은 수염달린 옥수수인
시전에 아뢴다
식물이면서
꿈인
눈(雪)이고 문법이고, 물갈퀴이고 엉겅퀴풀인,
별자리이고 市廳시청이고 냄새이면서 자귀나무인
와이샤쓰이고 눈썹이며 朱子學주자학이고 미술인
백과사전이고 살충제이며 冥王星명왕성인
시전에
다시 부복하고 시전에 아뢴다
베개이며 납이고 채송화이며 관상대인,
걸상이고 페레스트로이카
스탈린, 우유
도서관의 司書사서이면서 돌쩌귀인
호메이니, 筆耕士필경사, 동화
π, 운율, 청진기, 바위고개, 개불알꽃, 오브라이트
박달나무와
하얀 공
아우구스투스의 투구, 음악, 固體고체, 동물ㅡ아스
파라거스와 미모사
달맞이꽃인
시전에 아뢴다
안델센, 나사못, 치자나무, 협궤열차, 반딧불인
시전에
잠깐 옷깃을 여미고
또 한번 부복하여
시전에 아뢴다
고비사막, 편집주간, 안개, 타액, 나비, 명함인
시전에 아뢴다
마취과장인
시전에 아뢴다
器物기물, 부끄러움, 잠시 동안의 抒情서정, 一瞥일별,
신시내티, 오셀로인
시전에 아뢴다
다시 부복하고
시전에 아뢴다
男色家남색가, 콘크리트, 방음장치, 수박, 文書문서,
靺鞨人말갈인인 시전에 아뢴다
프레밍의 왼손법칙, 造船所조선소, 수음,
공룡
치과의사
바람
누가복음
증류수인
佛經불경, 산소, 기하급수, 點,
붕대, 석유, 벼룩인 시전에
읍하고
정중히 예를 다하여 아뢴다
바다, 페니실린, 간통
벌률, 수으프, 나선형의 계단, 코스모스, 搔痒症소
양증인
식초, 性病성병, 사기꾼
말(馬), 임기응변인 시전에 아뢴다
불도마뱀인 시전에 아뢴다
숯검댕이인 시전에 아뢴다
紙類지류와 난장이인 시전에 아뢴다
꿈인 시전에 아뢴다
다시 몸을 깨끗이 하고
偈頌게송과 찬송으로
가장 좋은 악기로
바라와 小鼓
箜篌공후의 줄을 퉁기면서
靈妙영묘한 詩시의 神殿신전인
시전에!
백번 더 부복하고 시전에 아뢴다
그냥 시전에 아뢴다
시전에 아뢴다
(주)
*詩殿 : 詩의 神殿
*柰乙神宮 : 신라 초기, 지증왕 이후 역대 제왕들이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참
배하던 神宮(삼국사기)
* 오브라이트 : 쓴 약을 먹을 때 싸서 먹을 수 있게 만든 얇은 비닐 같은 것
*상희구 시집 <요하의 달> 중 ‘발해기행.2’ (문학세계사)에 수록된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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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폐허에 떠오른 요하의 푸른 달빛/김영찬
야심한 시월의 밤에 상희구 시인의 시집을 심독하고 있다. 요하의 달이 내 침상에 와서 기웃거린다. 이 시각까지 나는 한 순간도 이 시집의 시 행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생아편 같은 시어들.
어휘는 신력을 얻은 듯 말갈기 드날리고, 솟아오른 시상은 살찐 말잔등에 실려 광활한 대륙, 발해의 옛 땅을 말발굽 소리로 가득 채운다.
상희구 시인의 시집. 그것은 언어의 풍요로움을 마련한 가을추수와 같았다.
행과 연을 넘나드는 부지기수의 어휘들. 이 가을에 진실로 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지상의 양식이 아닐 수 없다.
*
새벽 4시가 되었지만 나는 '요하의 달' 그 황홀하고 심오한 달빛에 취하여 기꺼이 밤잠을 포기하고 있다. 물론 나는 상희구 시인의 시를 간헐적으로 읽은 바 있어 언어를 다루는 그의 끈질긴 장인정신과 발해를 노래하는 의기를 깊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새삼 그의 시집에 수록된 시 전체를 빠짐없이 읽게 되어 새로이 감지하였다. 그의 시, 언어의 골조는 신비로운 발해의 달빛을 넘어 경계가 없는 무변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어쩌면 상희구 시인은 시적 역량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너무 오랜 동안 과소평가된 채 그 자신이 사라진 옛 왕국의 폐허에 파묻혀 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유명한 시인과 훌륭한 시인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그를 새로이 더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 반갑고 늦었지만 다행이다.
시인께서 내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써준 乞乞仲象이라는 단어를 나는 들여다본다. 마치 내 자신이 걸걸중상(발해의 관직명, 대조영의 아버지에게 주어진 존칭)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행복도 즐겁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잃고 있는 저 북방, 발해라는 영토가 고스란히 살아나 가슴에 안겨 옴을 느낀다. 그러므로 발해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그 땅, 그 나라는 아직도 우리의 것인 것이다.
(추신) ‘발해기행 41’을 비롯하여 불과 몇 편의 시를 옮겨 적는 데 거의 반나절이 걸렸다. 시인이 시를 직접 쓰는 데 걸린 시간은 발해의 역사보다 길었을까.
"때"라고 적고 한자로 훈을 달아놓은 "후"(돌석 + 뒤 후), 같은 한자는 내 옥편에 수록되어있지 않은 글자라서 옮기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글은 그 시집을 읽게 된 2004년 10월 30일(5년 전)에 쓴 것임을 또한 밝힌다.
첫댓글 /어휘는 신력을 얻은 듯 말갈기 휘날리고, 솟아오른 시상은 살찐 말잔등에 올라 광활한 대륙, 발해의 옛 땅을 말발굽 소리로 가득 채웁니다/아, 이 감동의 전염성~~~~!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옛날에 써둔 글을 싣게 되어 죄송합니다. 2004년에 이 시를 읽었을 때 발해의 숨결을 느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닙니다 오래된 글(단평)이라 어쩌면 더 힘이 있고 생생한지 몰라요. 더 오래된 감상글도 올려 주십시오. 조금 거칠어도 젊고 힘이넘치는 단평들요 이 가을 다가기 전에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이 시는 문체나 생동감이 김영찬 시인님과도 잘 어울리는 글입니다. 두레문학 10호에서 다시 만나게 될 시!
'箜篌공후의 줄을 퉁기면서/靈妙영묘한 詩시의 神殿신전인/시전에!/ 백번 더 부복하고 시전에 아뢴다' 상희구 시인의 시는 잊혀진 발해의 기억. 발해의 유물을 발굴해내는 기쁨으로 읽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