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
서울 잠실에 있는 롯데타워 옆에 석촌호수가 있다. 석촌호수가에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돌비석 하나가 서 있다. 이 비석은 '대청황제공덕비'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도 불린다 단을 제외한 높이가 395cm, 너비 140cm, 무게 32t인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조선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 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이다.
왼쪽에 몽골문자, 오른쪽에 만주문자, 뒷쪽에 한문이 새겨져 있으며, 한일병합에 앞서 조선의
첫 번째 치욕의 기록인 것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비석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힌다.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문장은 대제학 이경식(李景奭)이 지었는데, 그는 이 문장을 지은 것을 평생 치욕으로 여겼다.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그런데 이 비석에도 애환이 많다.
1895년 고종은 "굴욕적인 비석이니 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삼전도비를 한강에 처넣어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1913년 조선을 병합한 일제(日帝)는 조선사람들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이 비석을 도로 건져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근처 주민 들이 이 비석을 땅 속에 파묻어 버렸는데, 1963년 대 홍수가 났을 때 땅 속에 있던 비석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비석은 민족의 치욕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신령님의 지시인가 보다 생각한 문화재관리국이 삼전초등학교 일대에 500평 정도의 소공원을 조성하여 세웠다가 현재 석촌호수 송파대로변에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비각도없이 노천에 세워져 안내문도 없었다
그런다고 상한 자존심이 좀 세워지는 것일까?
진정한 자존심은 어찌해서 회복되는지 그 예를 살펴보자!
기원전 1세기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점령되어 식민지로 전락한 후, 이스라엘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당시 쫓기던 약 1,000여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사해 부근 '마사다 요새' 에서 농성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모두 자살했다.이스라엘은 이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사다 요새를 군의 정신 교육장으로 쓰고 있다.
이 정도 악다구니가 있으니 2천년 동안이나 팔레스타인 민족들이 잘 살고 있는 그곳에 가서
"이 땅이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니 원래 우리 거야, 너희들, 다 나가!" 하고는 저희 나라를 세운 것이다. 우리도 좀 보고 배우자!
♡ 조선의 파병과 임경업 장군의 죽음 ♡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은 청의 요구대로 신하의 예(禮)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는 한편, 명과 단교하고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하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조선은 군사력을 늘릴 수 없으며, 군사훈련을 해도 안 되고, 성을 쌓거나 수리할 때는 꼭 사전에 청(淸)에 보고해야 했다.또한 소현세자, 봉림대군,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볼모로 끌려갈 당시 소현세자는 26세, 봉림대군은 19세였다.
주전론의 가운데 있던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재)는 청으로 끌려간 후 처형당했다.
청(淸)이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 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고 철군한 뒤에도 조정에서는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반청
(反淸)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명을 치겠다는 청의 파병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인조는 쿠데타의 명분인 숭명대의(崇明大義)를 부정하고 인조 18년인 1640년 상장
임경업(林慶業)과 황해병사 이완(李浣)이 이끄는 조선수군 6천명을 파병했다.
사령관 임경업은 대표적인 반청(反淸) 인사였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았고, 명의 수군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가끔 발포하면 엉뚱한 데다 대고 쏘았고, 일부러 자신들의 배를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의 행위로 청의 분노를 샀다.결국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다가 중간에서 탈출해 명(明)에 투항했다
청의 요청으로 임경업의 아내는 심양으로 끌려갔다 자살했으며, 임경업은 명에 투항한 후 평로장군, 총병 등의 직위로 활약하다가 남경이 함락되고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다시 청군에게 체포되었다.
임경업(林慶業)이 청에게 체포된 것을 안 인조는 임경업의 소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임경업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임경업은 조선으로 송환되어 친국을 받으면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임경업은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고 말았는데, 일설에는 김자점이 형리를 시켜 모질게 형장을 가하도록 하여 죽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까운 장수 하나가 또 이렇게 죽었다.
등신같은 임금 밑에서 명장이 배겨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선조의 눈 밖에 난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역모 혐의로 고문받다 맞아 죽었고,
이순신(李舜臣)도 죽다 살아 났으며, 강홍립과 임경업은 인조에게 맞아 죽었다. 명에서는 암군 숭정제 (崇禎帝)에게 명장 원숭환이 비명에 갔다.
임경업(林慶業)을 청나라를 배척하는 인물의 화신으로 여겼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이후 임경업의 무용담을 담은 작자 미상의 '임경업전'이 나돌아 널리 읽혔으며, 무속에서는 그의 화상을 신당에 모시고 최영, 남이와 함께 가장 영험이 있는 신으로 받들었다
♡ 심기원의 역모사건 ♡
심기원(沈器遠)은 반정공신 이었으며, 철저한 척화파로서 반청의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인조가 항복한 후 항복의 치욕을 씻으려는 의지가 없다고 여겨 이를 큰 수치로 알았다.
심기원은 수천 냥의 군자금을 마련해 군사를 기르는 한편 임경업을 명나라로 망명시켜 명군을 지원하고, 자신의 거사에 조명연합군을 동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인조를 몰아내 상왕으로 올리고 회은군 이덕인
(李德仁)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며,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히는 무리 50여 명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이즈음 명의 패잔병들이 국경 언저리에서 청에 항거하고 있었고, 임경업도 명군과 합세하여 청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작이 구체화되기 전에
1644년 3월 부하 황헌, 이원로 등이 고변했고, 주모자 30여 명이 처형을 당함으로써
심기원의 역모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의 쿠데타 목적은 '북벌' 이었다. 이들은 일이 이루어진 뒤에 임경업이 이끌고 온 명군과 합세하여 요동을 차지한 후 심양으로 쳐들어 갈 계획이었다.
이 역모사건을 추국하던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청에 억류되어 있던 임경업의 송환을 요청하여 때려 죽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645년 소현세자가 병을 얻어 급사했으며, 세자빈 강빈 마저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이사건은 김자점 일파가 인조 말년에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봉림대군
(鳳林大君)이 왕위를 계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조선이 왜 더 이상 존재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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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은 오랑캐니 명을 계속 섬겨야한다고 하는것 자체가 똑같음. 똑같이 자존심 상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