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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축구를 어떻게 보고 있나 | |||||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8-03-18 15:25 | 최종수정 2008-03-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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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탈 아시아’를 선언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축구와 경쟁하겠다는 얘기다. 한일전에서 이겼다고 극일을 했다느니, 졌다고 하늘이 무너졌다느니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한일전에서 졌다고 대한해협을 헤엄쳐 오라는 축구 팬들도 없어졌다. 새로운 시대에 한일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일본은 한국축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한국과 일본 축구대표팀의 70번째 맞대결은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2월 23일 중국 충칭 올림픽 스포츠센터에서 일본과 치른 제3회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전반 14분 염기훈(울산)의 골로 앞서 나갔으나 후반 22분 야마세 고지(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게 동점골을 내줘 1-1로 비겼다. 70번째 한일전은 7년 만에 대표팀 지휘봉을 다시 잡은 허감독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1998년 말부터 2년 동안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이끌었던 허감독은 1999년 9월 일본 올림픽대표팀과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벌인 2차례 경기에서 1-4, 0-1로 진 쓰라린 기억이 있다. 역대 최강으로 꼽혔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표팀은 일본 원정에서 나카타 히데토시(은퇴)의 흠잡을 데 없는 플레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대패했다. 각급 대표팀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한 경기에 4골을 내준 것은 1974년 9월 28일 한일정기전 1-4 패배 이후 25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경기를 지켜본 적지 않은 축구 관계자들은 “이제는 일본축구가 한국을 앞질렀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허감독은 이번 대회에 앞서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애써 결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면서도 “일본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해 나름대로 설욕전을 준비했다. 일본의 원톱 시스템에 맞서 수비진을 스리백으로 짰고 김남일(빗셀 고베), 오장은(울산), 조원희(수원) 등 힘이 있고 거친 플레이를 잘하는 미드필더를 중앙에 세웠다. 일본의 미드필드 플레이를 막겠다는 계산이었다. 한국의 거센 압박에 일본 선수들은 패스할 곳을 찾지 못했고 어렵게 시도하는 패스는 자주 끊겼다. 허감독은 일본의 강점인 패스 플레이를 약화하면서 한국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전략을 썼다. 한국의 투톱 조진수(제주)와 염기훈이 측면으로 빠지면서 수비진에 혼란이 생긴 일본은 좌우 날개 박원재(포항)와 이종민(울산)에게 공간을 내줬다. 미드필드 싸움에서 흘러 나온 공을 잡는 횟수도 한국이 많았다. 일본과는 비겼지만 동아시아대회 우승을 차지한 허감독은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고 밝혔다. 허감독은 경기 내용 면에서 9년 전 올림픽대표팀간 맞대결에서 떨어졌던 명예를 상당 부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 다득점차로 밀려 준우승에 머문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일본 매체와 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핌 베어벡 전 감독의 그림자를 털어 버린 한국과 달리 일본은 ‘생각하면서 뛰라’고 강조했던 이비차 오심 전 감독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심 감독은 지난해 11월 건강을 이유로 일본 대표팀 지휘봉을 놨다. 70번째 한일전은 한국과 일본축구의 색깔을 역으로 이용하려 했던 두 사령탑의 두뇌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진 한판 승부였다. 일본 언론은 이번 동아시아대회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원인을 오카다 감독이 일본답지 못한 축구를 했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오카다 감독은 한국전이 끝난 뒤 “한국선수들은 공을 따기 위해 끝까지 전력 질주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일본의 베테랑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스(주빌로 이와타)는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한국 수준의 상대를 이기기 어렵다. 어린 선수들의 싸우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수비수 야스다 미치히로(감바 오사카)는 “북한과 달리 한국 수비수들은 제 위치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격렬했다. 여기서 밀리면 기회를 잡기 어렵다”고 경기 소감을 밝혔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국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은 수비수 나카자와 유지(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한국보다)힘이 부족했다. 질 때 지더라도 힘껏 맞서야 상대도 우리의 힘을 느낀다”며 가와구치 골키퍼와 비슷한 말을 했다. 1967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멕시코올림픽 예선 일본전에 출전했던 김기복 내셔널리그 부회장은 “한국과 일본은 각각의 색깔을 갖고 있다. 내가 선수로 뛰었던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1999년 올림픽대표팀간 경기에서 크게 졌을 때만 해도 ‘왜 우리는 기술 축구를 못하나’라는 질책이 있었지만 즉흥적인 응용 플레이가 일본보다 앞서는 한국선수들의 강점은 분명히 있다. 여기에 ‘일본에게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정신력이 더해 져 한일전에 강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축구연구소의 김덕기 사무총장은 경기력에 관한 한 김부회장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김총장은 “한국과 일본의 경기력은 엇비슷하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의 축구 수준을 어떻게 경기력만으로 비교를 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1935년 일본축구선수권대회 한국은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 1차전에서 5-1로 이긴 것을 시작으로 일본전 역대전적에서 38승20무12패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축구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1992년 다이너스티컵 이후 전적도 한국이 6승10무5패로 근소하게 앞선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탈 아시아’를 선언한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전적을 살펴보면 1승3무2패로 일본에 뒤진다. 안정환(부산)의 팔 문신이 화제가 됐던 2003년 5월 31일 일본 원정에서 1-0으로 이긴 게 최근 5경기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다. 엄밀히 말하면 2월 23일 열린 동아시아대회 경기는 역대 70번 째 한일전이라고 볼 수 없다. 1954년 3월 7일 열린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광복 이후 열린 첫 번째 한일전이라는 얘기다. 적지 않은 축구 관계자들은 광복 이전에 열린 한일전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1935년 도쿄에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1921년 시작된 이 대회는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일본의 FA컵인 일왕배의 전신이다. 일본축구협회는 1935년 대회 개막을 앞두고 처음으로 조선팀의 참가를 허용했다. 이듬해 열리는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뛰어난 선수를 뽑겠다는 목적이 있었고 대표로 뽑힐 선수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6월에 열릴 대회 개막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선발된 조선축구단이 연승행진을 벌인 끝에 문리대학을 6-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축구협회는 당황했다. 우승 팀 중심으로 베를린올림픽에 나가는 대표팀을 꾸리려 했으나 조선축구단 때문에 난처하게 된 것이다. 일본축구협회는 애초 계획을 바꿔 가을에 열리는 메이지신궁 대회 성적을 토대로 베를린올림픽 출전 대표를 뽑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도 조선의 경성축구단이 일본의 내로라하는 강팀들을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일본 축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조동표 스포츠평론가는 “한국과 일본축구의 치열한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이라고 말했다. 1967년 멕시코올림픽 예선 광복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며 일본을 만날 때마다 전의를 불태웠다. 1960년대 중후반은 일본축구가 강했던 시기로 꼽힌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축구붐 조성에 나섰고 독일 출신 디트마 크라머 감독을 영입해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한국은 일본에게 밀리지 않았다. 한국은 1963년 8월 13일 열린 제7회 메르데카배대회에서 일본과 1-1로 비긴 것을 시작으로 1969년 10월 18일 멕시코월드컵 15-A조 예선 2차전에서 2-0으로 이길 때까지 1승3무1패를 기록해 일본과 팽팽하게 맞섰다. 1967년 10월 7일 도쿄국립경기장.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만났다. 한국은 필리핀과 마지막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골득실차에서 일본에 크게 뒤져 이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일본은 비기기만 해도 멕시코행 티켓을 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 경기에 출전했던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5만 관중이 꽉 들어찼다. 도쿄국립경기장이 위압적으로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경기장 구석에 태극기가 펄럭이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일본 언론은 3-0이나 4-0으로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우리는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고 말했다. 전반에 2골을 내준 한국은 후반 들어 배수의 진을 치고 반격에 나섰다. 이회택과 허윤정(2골)의 골로 3-2 역전에 성공했으나 곧바로 3-3 동점골을 내줘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불기 직전 한국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 일본의 패스를 가로챈 김기복이 페널티 지역 외곽에서 회심의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아쉽게도 이 슈팅은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왔다.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던 이부회장은 선수 시절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으로 이 장면을 꼽았다. 강력한 중거리 슈팅 능력을 자랑했던 김기복 내셔널리그 부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공을 몰고 가는데 힐끗 심판을 보니 휘슬을 불려고 했다. 그대로 경기를 끝낼 것 같아 중거리 슈팅을 날렸는데 그때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온 공이 내 뒤 쪽에 떨어졌다. 그 순간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었다. 안타까웠다. 한일전은 총칼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후배들보다 국가관이 훨씬 뚜렷했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힘이 샘솟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태극마크 대신 협회 엠블렘을 가슴에 다는 것에 반대한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대신 멕시코올림픽에 나갔고 동메달을 따면서 축구 중흥의 시기를 맞았다.” 당시 일본은 독일 출신 크라머 감독 체제였다. 크라머 감독은 일본 축구의 경기력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축구 발전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크라머 감독은 JFL(일본실업축구리그) 출범과 지도자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데 발벗고 나섰다. 일본의 지도자 교육 시스템은 유럽에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일본 올림픽대표팀을 맡으면서 현역에서 갓 은퇴한 나가누마 겐 전 일본축구협회 회장을 코치로 불러들인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까지 만해도 지도자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가누마는 몇 차례 고사했지만 크라머 감독의 집요한 설득으로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했고 동메달이라는 값진 수확을 거뒀다. 크라머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올림픽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얻은 성과를 한국에서는 거둘 수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환경이 달랐다. 크라머 감독은 코칭스태프와 심각한 내분을 겪은 끝에 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을 불과 넉 달 앞두고 해임됐다. 김삼락 감독 체제로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치른 한국은 모로코와 1-1, 파라과이와 0-0, 스웨덴과 1-1로 비겨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크라머 감독이 일본에서는 성공하고 한국에서는 실패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축구연구소 김덕기 사무총장은 “한국축구의 배타적인 분위기 탓”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총장은 “실력과 능력을 갖춘 외국인 지도자를 존중했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축구는 여전히 폐쇄적”이라고 말했다. 1979-80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1979년 11월 24일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은 차범근이 FC 쾰른의 일본인 선수 오쿠데라 야스히코와 독일 땅에서 첫 맞대결을 벌였다. 차범근은 전반 26분과 후반 34분 2골을 뽑아 프랑크푸르트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 오쿠데라는 헛발질만 7번을 했다. 당시 국내 신문은 ‘차범근 두 골, 오쿠데라 누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비중있게 전했다. 오쿠데라와 경쟁에서 우위를 보인 차범근에게 국내 축구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차범근과 오쿠데라의 대결은 독일 땅에서 펼쳐진 작은 한일전이었다. 수원 삼성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차범근 감독은 “분데스리가에 먼저 진출한 오쿠데라의 활약이 유럽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 계기였다”고 밝혔다. 오쿠데라는 차범근보다 2년 앞선 1977년 FC 쾰른에 입단했다. 1977-78시즌 FC 쾰른이 분데스리가와 컵대회 정상에 오르며 오쿠데라의 이름이 유럽에 알려졌다. FC 쾰른에서 공격수로 뛰다 이후 수비수로 위치를 바꾼 오쿠데라는 독일 무대에서 9시즌 동안 리그 235경기에 나서 25골을 터뜨렸다. 일본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오쿠데라의 분데스리가 진출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축구의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오쿠데라는 1977년 일본 국가대표팀의 서독 전지훈련 때 대표팀 감독의 소개로 FC 쾰른 훈련에 참가했고 ‘일본축구를 위해 독일에 가라’고 말한 가와부치 사부로 현 일본축구협회 회장의 설득으로 독일행을 결심했다. ‘나라를 버리고 독일에 가느냐’는 여론에 시달렸던 차범근의 사례와는 대조적이다. 한국축구연구소 김덕기 총장은 “일본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뒤 ‘탈 아시아’를 선언했다. 일본은 1970년대 한국이 열심히 참가했던 메르데카배와 킹스컵 등 아시아 대회에 거의 불참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 초점을 맞췄고 철저한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김총장에 따르면 눈높이를 높이려던 일본의 발목을 잡은 게 한국이었다. 김총장은 “일본이 ‘탈 아시아’ 정책을 폈으나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에서 매번 한국에게 졌다. 그러면서 일본의 ‘탈 아시아’ 목표가 ‘타도 한국’으로 바뀌게 됐다. 일본 쪽에서 보자면 시행착오였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1970년대 일본과 상대 전적에서 13승5무2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1974년 9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제3회 한일정기전과 1979년 3월 4일 열린 제7회 한일정기전에서 각각 1-4, 1-2로 진 것을 빼면 일본에 무릎을 꿇은 적이 없다. 이즈음 일본축구 내부적으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일본의 축구 저널리스트 고토 다케오는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오쿠데라가 FC 쾰른에 입단한 1977년 만해도 일본에서는 공격수는 많은데 쓸 만한 미드필더가 없다”는 얘기를 했다. 그때부터 일본 지도자들은 뛰어난 선수들을 무조건 미드필더로 쓰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1991년 한일정기전 1993년 일본프로축구 J리그 출범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1991년 라모스와 미우라 가즈요시를 앞세워 한일정기전 직전에 열린 기린컵에서 만만치 않은 전력을 드러냈다. 일본은 기린컵에서 게리 리네커가 뛴 토트넘 핫스퍼를 4-0으로 꺾은 데 이어 베베토가 활약한 바스코 다 가마를 2-1로 물리쳤다. 태국을 1-0으로 누른 일본은 3전 전승으로 기린컵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기세 좋게 나아가던 일본은 1991년 7월 27일 한국에게 또 다시 무릎을 꿇었다. 나가사키에서 열린 제15회 한일정기전. 짧은 패스를 앞세워 한국 문전을 위협하던 일본은 후반 15분 한국의 선이 굵은 플레이에 뼈아픈 실점을 했다. 미드필드 오른쪽에서 최순호가 길게 올려 준 공을 페널티 지역 왼쪽에 있던 구상범이 문전으로 연결하자 쇄도하던 하석주가 가볍게 골문으로 밀어 넣어 결승골을 뽑았다. 한국의 1-0 승리였다. 한국은 이날 경기를 포함해 일본전 7연승을 이어갔고 역대 한일정기전에서 10승2무3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두 나라의 축구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1972년 시작된 한일정기전은 이해를 끝으로 중단됐다. 이유는 일본의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 축구계는 한일전에서 계속 진 일본이 국민 정서를 의식해 한일정기전을 중단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그랬을까. 일본 사정에 정통한 한 에이전트는 “이는 일본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일본이 국민 정서를 의식해 한일정기전을 중단했다는 얘기는 매우 한국적인 사고”라고 설명했다. 이 에이전트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오이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축구 붐 조성을 위해 유소년 축구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월드컵 폐막과 동시에 유소년대회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한국이라면 어떻게든 대회를 이어가려고 했겠지만 일본은 애초 계획이 축구 붐 조성이었으니 목표 달성과 함께 대회를 없앤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한국인에 견줘 추진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의사 결정에 앞서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고 단계를 차근차근 밟는 일본인들의 계획성은 무서울 정도”라고 덧붙였다. J리그 제프 이치하라 유나이티드 총괄부장을 지낸 가와모토 오사무 씨는 SPORTS2.0과 인터뷰에서 “일본이 국민 정서를 고려해 1991년 이후 한일정기전을 중단했다는 얘기는 말도 안된다. J리그 출범을 앞둔 시기여서 일정 상의 문제로 한국 측에 한일정기전의 중단을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오판은 또 있었다. 1993년 10월 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김호 감독이 이끈 한국은 미우라에게 결승골을 내줘 일본에게 0-1로 졌다. 1984년 9월 30일 한일정기전에서 1-2로 진 이후 9년 만의 한일전 패배였다. 일본이 이라크와 마지막 경기에서 2-2로 비기고 북한을 3-0으로 꺾은 한국이 일본에 골득실차에 앞서 행운의 미국행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김호 감독은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김호 감독은 “당시 여론과 언론의 힘은 협회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엄청났다. 일본전 결과에만 매달렸고 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지난 일을 떠올렸다. ‘도하의 기적’이 ‘도하의 비극’이 될 뻔했던 날로부터 1년여 전 한국은 이미 일본축구의 성장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1992년 8월 29일 베이징에서 열린 다이너스티컵 결승전에서 일본과 만난 한국은 연장전을 포함한 120분의 사투 끝에 2-2로 비겼고 승부차기에서 2-4로 졌다. 이 경기에서 한국의 선제골을 넣은 정재권은 “선수들이나 협회 관계자들이나 일본에게 진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비록 승부차기 패배였지만 충격이 엄청났다”고 밝혔다. 국내의 한 에이전트는 “우리는 축구만큼은 (한국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본축구의 성장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1999년 올림픽대표팀 평가전 1999년 9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벌어진 한국과 일본 올림픽대표팀간 평가전은 국내 축구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한국은 9월 7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원정경기에서 1-4로 크게 졌다. 일본의 패스 플레이에 놀아난 한국은 무기력했고 말로만 듣던 나카타의 위력은 대단했다. 20일 뒤 열린 홈 경기에 일본은 나카타 등이 빠진 1.5군이 출전했지만 또 다시 0-1로 져 자존심을 구겼다. 당시의 일본은 2000년 이후 실점을 하지 않는 팀으로 변화를 꾀한 필립 트루시에 감독의 스타일과는 달랐다. 화려했고 공격적이었다. 일본의 패스 플레이는 절정에 올라 있었다. 축구계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지않아 국가대표선수로 성장할 23살 이하 올림픽대표 선수들이 ‘숙적’ 일본에게 완벽하게 진 데 대한 걱정이었다. 이 경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올림픽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은 일본과 맞대결에서 국가대표팀 못지 않은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국내의 한 에이전트는 “그때만 해도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일본에 쉽게 지지 않았으니까 축구인들은 ‘일본축구는 아직 멀었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실제로 일선 지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한국이 무조건 강하다’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큰 경기에서는 한국이 강하다’라는 식으로 말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은 유소년 축구 환경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강압적인 축구’가 한국의 스타일이라면 일본은 ‘즐거운 축구’를 추구한다. 환경 자체가 다르기에 어린 선수들의 경기 결과에 큰 의미를 둘 수 없다. 잘 정비된 유럽의 유소년 시스템을 도입한 일본은 어린 선수들에게 절대로 무리해서 축구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고토 다케오는 “일본선수들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축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프로선수가 된 뒤에야 운동량이 많아지고 훈련에 집중력을 보인다. 한국은 어렸을 때부터 승리에 대한 강박증세가 지나치다. 학원축구의 4강 제도가 이런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시스템이 한국축구를 이끌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소년 축구 교류를 바라보는 두 나라의 시각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다. ‘한국 타도’를 외쳤던 일본은 축구발전 장기 프로젝트에 의해 그동안 수많은 한국팀을 초청해 대회를 여는 등 한일간 활발한 교류를 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을 찾는 한국팀의 수가 부쩍 줄었다. 더 이상 한국 팀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일본 측의 속내다. 한국과 일본의 유소년 축구 관련 일을 하고 있는 한 에이전트는 “한국 지도자들이 ‘단물 다 빼 먹고 이제 와서 버리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일본을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며 “애초 한국과의 교류는 그들의 잘 짜여진 계획의 중간 단계였을 뿐이다. 일본은 이제 그 단계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등 그동안 잘못한 게 많다. 예전에는 한국팀을 초청하는 일본 측에서 경비의 상당액을 부담했다. 지금은 변했다. 일본으로 훈련을 온다면 안내 정도만 해 주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의 지도자들은 일본 측에서 경비를 대지 않는다며 불평을 쏟아낸다. 그렇다고 한국팀이 일본에서 열리는 유소년대회에서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일본과 경기에서 밀리면 어린 선수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전부 밟아버려’라고.” 이 에이전트의 마지막 말은 충격적이다. 2004년 아시안컵 결승전 2004년 8월 7일 베이징 노동자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 중국의 아시안컵 결승전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경기 시작에 앞서 일본선수가 소개되자 중국 관중들은 일제히 ‘우’하며 야유를 했다.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장내 아나운서가 서 줄 것을 요청하자 많은 관중이 ‘앉자, 앉자’를 연호하며 일어섰던 주변 사람들을 끌어 앉혔다. 전반전 중국이 선제골을 내주자 쓰레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후반 인저리 타임에 일본이 3번째 골을 터뜨려 승리에 쐐기를 박자 흥분한 관중들은 ‘샤오르번 사비(일본 머저리)’를 외치며 또 다시 쓰레기를 경기장 안으로 던졌다. 경기는 일본의 3-1 승리로 끝났다. 중국 공안 당국은 중국 관중을 먼저 내보내고 일본 응원단을 미리 준비한 관광버스에 태워 안전한 장소로 실어 날랐다. 경기장에서 나온 2천여 명의 중국 팬들은 체육관 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1시간가량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흥분한 중국 팬들과 공안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도로 철책 분리대가 부서지기도 했다. 두 나라의 역사적, 사회적 문제가 축구에 반영된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과 중국의 언론이 서로를 자극했고 외교문제로 번질 조짐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정도가 한일전을 뛰어 넘는다. 그렇다면 일본이 바라보는 한일전과 중일전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가와모토 씨는 “일본에게 중일전은 축구보다는 역사적 배경의 대결을 의미하는 측면이 많다. 아직까지 중국과는 축구에서 라이벌이란 이미지는 약한 것 같다. 물론 중국축구의 잠재력이 높은 만큼 일본의 새로운 라이벌이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설명했다. 가와모토 씨는 한일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과 일본도 역사적인 문제가 얽혀 있지만 두 나라는 아시아 축구의 정상을 다투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나라 모두 ‘탈 아시아’ 정책을 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한일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의 축구팬들에게는 ‘축구’를 의미한다.” 일본축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국축구는 분명히 좋은 자극제가 됐다. 평가전 성격의 한일전에서 졌다고 경질설에 휘말린 사령탑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일본의 베테랑 축구기자 고토 다케오 씨는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축구 팬들에게 한국과의 과거는 그야말로 치욕이었다. 일제 치하 36년을 얘기하는 한국 분들이 많은데 축구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국에게 36년간 지배를 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경쟁은 현재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일본도 한국에게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고토 씨는 “한국과 일본의 경기력이 비슷한 수준에 올랐으나 예나 지금이나 대조적인 축구 스타일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두 나라의 축구 스타일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은 월드컵 조 추첨이 끝나면 언론에서 여기는 약하고 여기는 강하다는 식의 분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처럼 때로는 솔직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선수 출신인 가와모토 전 제프 이치하라 총괄부장은 한국과 일본의 경기력에 관한 한 고토 기자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 그러나 가와모토 전 부장은 축구의 전체 수준을 얘기하면서 대표팀 성적만을 비교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축구가 일본보다 앞선다’는 말에 부정의 뜻을 나타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국 지도자들의 수입은 성적과 연관돼 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축구를 가르치겠는가. 한국은 아이들의 기술 향상이 아닌 팀 성적을 내기 위한 축구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유소년 시스템을 보면 그 나라의 축구 수준을 알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 정말로 한국축구가 일본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가.” SPORTS2.0 제 93호(발행일 3월 3일) 기사 김덕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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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소년이야 어찌됐든 결국국대성적은 일본보다야 앞서있는건 사실이지
많은 부분 새겨들어야 할 것은 분명하군요.
한국은 여가나 취미로 축구하기엔 많이 부족하죠 시설이나 시스템상으로도 놀면서 즐기면서 하는 축구는 한국에 조기축구회 밖에없습니다.축구를 즐기는 인구수도 부족하거니와 팀또한 부족한 실정이죠.특히 대한민국의 특징인 특화된 선수육성 이것외엔 방법이없습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축구를 하므로서 축구강국으로 불리는 나라도많습니다 특히 유소년시스템이 잘되어있고 그 노하우가 바탕에 깔린 축구강국들.그 나라들은 프로리그도 활성화되고 축구가 생활의 일부분이되었죠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축구만으로 살아가기엔 힘든실정이죠 할사람만 하는것이뿐.유소년을 본다면 일본도 그리 긴역사도 아니면서 유소년가지고
수준을 따지는건 좀 우습구요 반대로 쉽게 축구할수있고 누구나 배울수있고 쉽게 접근가능하다는점에선 일본이 부럽기는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설과 시스템에서 왜 세계적인 선수는 안나오는지.또한 아시아에서도 힘겹게 이기는데 유소년이 아무리 미래를 바라보고 투자를한다고해도 그 육성된 미래에도 한국에게 이길수있을지는 장담못하죠 투자대비 실익이 없는게 일본 유소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안하는것보단 해보는게 큰경험이되겠죠 일본야구를 봐도 그렇고
즐기면서 하는 축구..ㄱ-? 조기축구 말구 어떤식으로 해야 더 즐기면서 하는걸까요..?아침에 운동겸 하는 배드민턴만큼? 축구로 그렇게 하긴 좀 그렇지 ㅋ
일본 실제로 축구할만한곳 안보이던데..? 전부 일욜날 조기 야구회 나가던데...애들하고 아빠하고 봉고차 끌고.....진짜 야구좋아하는듯....테니스 도 좋아하고..암튼 생활체육이 많이 발전되어있는듯 싶네요......ㅋ
67년 올림픽 예선에 이회택이 뛰었군요... 몰랐던 사실입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때 일본의 영웅은 가마모도로 알고 있는데 가마모도가 늙어사 새파란 차범근과 경쟁했던 한일 정기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보니까 일본은 가마모도 하나 뿐이었는데... 어째든 J 리그가 나오기 전까지의 일본 축구는 일부 매니아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훌륭한 팀은 아니었죠...
오랫만에 분석다운 분석기사를 본 것 같네요. 냉정하게 따져볼 건 따져봐서, 단순한 미움과 적개심이 아니라 서로에게 발전되는 방향으로 커갔으면 좋겠네요. 아직도 일본 타도를 외치고 있기에는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너무 성장해버린 것 같거든요. ^^;; 암튼 우리 축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좋은 기사입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 모교인 대구신암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인조잔디가 깔려 있습니다. 특히 밤에 퇴근하면서 라이트가 켜진 운동장을 보면 환상적입니다. 운동에 잼병인 제가 푸른 운동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날까요? '아~ 뛰고 싶다.'입니다. 하물며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일본이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우리하고 승부는 결국 제자리일걸요..ㅋㅋ 일본과 우리와의 경기는 경기력 외의 요인이 크죠..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게 역대 전적에서 막상막하 이듯이.. (몇년전까지만 해도 밀렸었는데.. 최근에 역전하긴 했죠..^^ )
잉글 45승, 스코틀랜드 41승, 무승부가 24경기네요.. 잉글 FA기록으로는..^^
일본이 아무리 잘할일은 없어 보이네요..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는 전혀 다르죠 얘네는 수준이 다른데 유독 이 두국가사이에만 이런거고 쪽국은 실력자체가 떨어지는거임
허정무가 일본전 패배 등..많은 치욕을 선사했지... 그래도 또 기회를 얻은거보면 ...세상이 싫다..
인프라 애기는 10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 입니다. 근데 아직까지도 국대는 우리한테 밀리고 있죠
기사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국대의 성적이 그나라의 축구수준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닙니다.
국대의 성적이 그나라 축구수준을 평가하는 핵심적 잣대중 하나죠..뭘 또 아니라는건지 여러 요소가 있지만 그나라 수준하면 당연히 국대의 강함이 포함되는건 너무나 당연한건데
이 기사는 매우 정확성이 높은 글 같네요. 정말 전문가 수준다운 기사^^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이 딱 와닿네요. 일본이 하면 장기 플랜에 의해서고 우리가 하면 졸속이고 그런 것이란 요지네요.
대충 스킵해 가면서 읽었는데... 별로 공감가지는 않네요. 우선 유소년은 한국과 일본의 전적을 보면 압승입니다. 국가대표팀 저리가라죠. 상대가 안됩니다.. 한국은 유소년시기 세계축국강국인데.. 이게 성인이 되면서 흐지부지 되는게 아쉽습니다. 위에 일본인 감독이 기술향상이 아닌 승을 위한 축구를 해서 발전이 없다는데.. 물론,, 몇몇 가지는 인정하지만,,, 일본인에게 저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요. 지들이나 잘하고 이야기 하면 뭐라 안하는데.. 변변치 않은 공격수만 내놓는 나라에서 ..ㅎㅎ;; 기술?? (물론 몇몇가지는 인정합니다.)
유소년에게조차 성적과 전적을 말씀하시는 님의 태도가 지금까지 한국축구를 병들게한 가장큰 원인중 하나예요. 님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성적지상주의, 결과만능주의에 빠져서 즐겁게 축구를 즐겨야할 유소년에게조차, 성적과 결과를 요구하고 있지요. 이런 풍토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절대로 세계강국과 맞붙을 능력이 없습니다. 기사의 요지를 파악하세요.
스포츠 2.0이 좀 축구를 낮추고 야구를 높이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드러난 게 아닐까 싶네요. 일본의 시스템이 물론 훌륭하지만 결과적으로 항상 이긴 건 우리였고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물론 일본처럼 시스템을 갖추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야겠지만요
일본따위가 어떻게 보든 신경안쓰여요
결론은 우리가 제대로된 유소년 시스템과 경쟁위주의 입시스포츠에서만 벗어날수만 있다면 섬나라원숭이들은 또한번 36년동안의 치욕을 맛보게 할수있단 얘기를 원숭이가 가르쳐 주는것 같네요 ^^ 알았어~~~하면 될거아냐 ~~~
그게 그리 간단하게 할수없으니까 문제죠 -_-;; 할수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했습니다.
가와모토//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에게 먹이를 줄때 발로주던 입으로 먹여 주던간에 병아리가 독수리가 되고 독수리새끼가 닭이 되는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