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꽃층층이
경향신문 [공감] 2023.04.19
아, 혁명이여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에 어김없이 4월은 온다. 1980년대 대학가의 4월은 늘 이 노래로 물들었다. 1960년 4월19일. 남한에서 일어난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앞으로 3년간 460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라 한다. 대한민국의 초대∼3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국가보훈처 지원사업 대상으로 삼을 만한 국가유공자인가?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이승만 1기 정부(1948∼1952)는 광복 후 친일 청산이 주요한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때 자행된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1949년 1월에 업무를 시작했으나, 그해 6월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10월에는 반민특위와 법안을 모두 폐기한다.
독일 정부의 나치 부역자 청산은 현재진행형이다.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나치와 유대인 학살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는 국제 군사재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2021년 9월 독일 함부르크 법원이 포로수용소 소장의 타자수였던 96세의 할머니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이나, 2022년 6월 101세의 전직 나치 간수가 징역 5년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의 오점을 깨끗이 없애야 가능한 것이다.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날린 이승만의 중대한 실수였다. 그의 집권 기간에 국민이 준 권력은 국가의 살인적 폭력으로 바뀐다. 여수·순천 관련 사망자만 3400여명에 이르고, 제주 4·3사건의 1만4000여명 참혹한 주검 앞에 이승만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이승만 3기 정부(1956∼1960)인 1960년 3월15일 제5대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 조작 사건이 벌어진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의거가 발생하고, 이어 4월11일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입학 대상이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이승만은 마산 의거를 ‘공산주의자 책동’이라 간주하고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부정선거를 눈감는 그에겐 국가보안법과 반공만이 유일한 신념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4월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초·중·고생과 도시빈민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는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고,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된다. 만일 계엄군이 이승만 정권에 동조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면 대한민국의 역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는 아직도 이승만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남겨두고 있다. 그가 국가유공자였는지, 퇴출당한 독재자인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남산에서 25m 높이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린 민중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읽어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라 기념관을 만든다면 행정안전부가 주무 부처다. 미화하지도 말고 사실 그대로의 기록물을 보여주면 된다. 국가유공자와 독재자 평가는 관람자인 민중의 몫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은 독립운동가였으나, 이후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에서 고위 관리로 일했다. 후손들이 기억하는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파로서의 최린일 뿐이다. 선행이 악행을 가릴 수는 없다. 악행은 선행을 온전히 가린다. 다시 이 사월에 신동엽을 읽는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