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처럼
윤종영
주말농장에서 따온 상추를 씻으려고 꺼내 놓았더니 달팽이가 상추에 붙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라 깜짝 놀랐다. 달팽이도 놀랐는지 껍데기 속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달팽이까지 따온 줄은 전혀 몰랐다. 나도 모르게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이 또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달팽이를 키우기로 했다. 주말이라 아이들도 다 집에 있어 나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앞으로 같이 살게 될 달팽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상추 한 장을 먼저 깨끗이 씻어서 때마침 두부를 꺼낸 플라스틱 용기가 있어 바닥에 상추를 깔고 집을 만들어 달팽이를 넣어줬다. 달팽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용기의 깊이도 깊어 달팽이가 살기엔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족과 달팽이와의 동거가 시작 되었다. 이름은 근본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성은 달, 이름은 팽이, 달팽이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며칠 전 뒷베란다 정리를 하면서 까만 비닐봉투에 뭐가 들어있어 열어보니 무였다. 필요할 때 꺼내다 먹으려고 박스에 넣어두고는 건망증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를 꺼내보니 싹이 나서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무꽃도 볼 겸하여 접시에 물을 담아 주방 창가에 놓고 키우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은은한 연보랏빛 예쁜 무꽃이 피었다. 그 옆에 나란히 달팽이집도 자리를 잡아 주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하여 달팽이 종류를 알아보니 껍데기에 갈색점이 찍혀 있는 걸로 보아 명주달팽이었다. 달팽이의 먹이와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매일 상추 잎 상태를 봐가며 상추 잎을 갈아주었다. 용기를 깨끗이 씻어 싱싱한 상추 잎을 깔고 그 위에 놓아주면 팽이는 가끔씩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나를 향해 더듬이로 V자를 그려준다. 그러면 나는 “그래. 팽이야,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나도 고마워.” 인사를 한다.
팽이와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 주방에 갈 때마다 팽이가 잘 있는지 확인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주방으로 가서 밤새 팽이가 잘 있었는지 팽이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상추 잎을 들춰봐도 팽이는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싱크대 위의 물건을 옮겨가며 주변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싱크대 위에서만 찾다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보니 팽이는 이웃 무네 집에 놀러 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무를 타고 올라가 무 잎에 자리를 잡고 무 잎을 갉아 먹고 있었다. 무 잎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팽이를 강제로 떼어서 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니 또 무에 가 있었다. 팽이는 한동안 무에서 살았다. 건조할까 싶어 가끔 무 잎에 물을 뿌려 주었다. 팽이가 무 잎을 갉아 먹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무에 검버섯 같은 흑점이 군데군데 생기더니 조금씩 썩는 것 같았다. 그래서 팽이를 떼어 팽이의 집에 데려다 주고 무는 버렸다. 그 후로 한동안 팽이는 얌전하게 제 집에서 싱싱한 상추 잎을 갉아 먹으며 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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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주 주말농장에 가서 상추를 따는데 달팽이가 보였다. 지난주 일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상추를 따면서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집에 있는 팽이의 친구들 만들어 주려고 비닐봉투에 상추 잎 2장과 함께 넣어 따로 두었다. 밭일을 마치고 남편한테 말을 했더니 그냥 놓아주라고 했다. 나는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달팽이를 상추와 함께 꺼내서 밭둑에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팽이 친구를 만들어 주면 덜 외롭고 심심하지 않아 좋을 텐데 집에 오는 내내 아쉬웠다. ‘그냥 데리고 올 걸 괜히 놓아주었나.’하는 후회도 들었다. ‘다음에는 주말농장에 달팽이가 있으면 남편한테 말 안하고 몰래 데려와야지.’라고 생각했다. 주말농장에 가서 상추를 딸 때마다 달팽이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지금도 팽이는 혼자다. 씩씩하게 잘 적응하여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익숙해졌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박차고 나와 주방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닌다. 어느 날에는 유리창에 붙어 있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주방세제 통으로 기어 올라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집 나간 팽이 찾는 것이 하나의 일이 되었다.
어제는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간 작은아이가 불러서 가보니 팽이가 또 가출을 해서는 위험하게도 주방 싱크대 난간을 기어가고 있었다. 물마시며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작은아이가 “엄마, 달팽이가 느린 것 같으면서도 빨리 기어가요.”라고 말을 했다. 나도 같이 한참 동안 팽이를 지켜보았다. 몸 한가운데 껍데기를 등에 지고 더듬이 길게 내밀어 끝에 달린 눈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살피면서 발로 몸을 앞으로 밀며 기어갔다. 개수통이 있는 곳에서부터 식기살균기가 있는 곳까지 제법 많이 기어갔다. 느려서 멈춰 있는 듯하지만 쉬지 않고 천천히 가니 결코 느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느리게 보이지만 팽이는 자기가 가고 싶은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난간에서 떨어질까 봐 온몸을 싱크대에 밀착시킨 채 쉼 없이 더듬이로 앞의 상황을 파악한 후에야 기어갔다. 일을 해야 해서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팽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껍데기를 살짝 쥐고 팽이를 집어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잽싸게 껍데기 속으로 숨어버리던 팽이가 이제는 천연덕스럽게 내 손가락을 더듬기도 하면서 내 얼굴을 향해 마치 인사라도 하듯 더듬이를 내민다. 아마도 팽이는 내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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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간 달팽이를 키우면서 지켜보니 그동안 달팽이가 느리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편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팽이를 지켜보면서 절대 달팽이는 느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는 연체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게 달팽이를 키우면서 생활의 지혜를 터득해 간다. 급하게 서둘러 금방 지쳐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느리게 느껴지더라도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보다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섣불리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이 실수를,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20대와 30대 생각 없이 너무 게으르게 산 것이 후회가 되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이 많아 요즘 무리를 했더니 어젯밤 몸살을 앓았다. 늦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생겨 자꾸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 쫓기듯 생활하게 된다.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팽이에게로 간다. 오늘도 팽이는 또 제 집에 없다. 향초 피울 때 사용하는 부엉이 모양의 용기를 씻어 놓았더니 그 속에 들어가 숨어있다. 팽이를 꺼내 집으로 옮겨주면서 이야기를 한다. “팽이야, 나도 이제부터 너처럼 느린 듯 여유를 갖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