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매봉산·둔지산에 기댄 한강의 풍광! 싱그럽구나
2024년 6월 서울학교는 <왕들의 지혜, 독서당 가는 길>
실록의 6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1강은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인 목멱산이 한강 변에 부려놓은 매봉산, 둔지산 산줄기에 기대고 있는 문화유적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한양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목멱산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벌아현을 지나 매봉산을 향해 차츰 그 높이를 낮추다가 응봉산을 지나 마침내 중랑천으로 숨어드는데 그 끝자락에 살곶이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보광동과 이태원을 지나 동빙고, 서빙고동으로 높이를 현저히 낮추고 마침내 반포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서쪽으로는 해방촌 지나 둔지산에서 외국군 주둔지를 부려놓고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매봉산 정상 팔각정에서 바러본 한강 전경Ⓒ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1강(제6기 제11강)은 2024년 6월 9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출구에서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대역3번출구-살곶이다리-응봉(선돌개)-매봉산(한강/중랑천조망)-두모포/동빙고터/사한단터-점심식사겸뒤풀이-독서당터-벌아현-한강진-이태원부군당/유관순추모비/외국군주둔지조망-회나무길-해방촌-호국신사108계단-이태원터-숙대입구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6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왕들의 지혜, 독서당 가는 길>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역과 원은 관리나 상인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한 곳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교통과 통신을 돕기 위해 역원제(驛院制)를 실시하였는데, 역이란 말을 준비해 놓은 곳이고, 원이란 사람들이 쉬거나 잠을 자는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춘추 전국 시대부터 있었고, 몽골은 이 제도를 바탕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몽골의 침입을 겪었던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역과 원을 세웠고, 그것이 조선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하나씩,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랏일 때문에 여행길에 오른 관리들은 이곳에 들러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이용했으며 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중요한 공문은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나 지방에서 걷은 세금을 운반하기도 했습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공 숙박시설로 역(驛)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대개 역 주변에 세웠으며, 나랏일 때문에 여행하는 관리들이 들러 쉬거나 잠을 잤습니다.
원 제도는 고려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병자에게 약을 나눠주기도 하고 은퇴한 관리를 위해 기로연(耆老宴)을 베푸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의 네 곳의 원과 동, 서 활인원(活人院)에 응급 구제기관인 상설 진제장(賑濟場)이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되었는데 해당 지역에는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 향리, 관리를 원주(院主)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잡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원은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하여 공용 여객의 숙식을 고을이나 역에서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폐해가 많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변모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역에 참점(站店)을 설치함으로써 원은 그 모습을 감추고 사리원, 조치원, 인덕원 등 지명만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큰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도시와 마을을 잇는 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있다고 해도 사람이나 말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나랏일을 보는 관리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도 여행 중에는 길을 잃기 쉬웠는데 이때 역과 원은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며,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
초여름, 매봉산·둔지산에 기댄 한강의 풍광! 싱그럽구나
2024년 6월 서울학교는 <왕들의 지혜, 독서당 가는 길>
실록의 6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1강은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인 목멱산이 한강 변에 부려놓은 매봉산, 둔지산 산줄기에 기대고 있는 문화유적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한양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목멱산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벌아현을 지나 매봉산을 향해 차츰 그 높이를 낮추다가 응봉산을 지나 마침내 중랑천으로 숨어드는데 그 끝자락에 살곶이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보광동과 이태원을 지나 동빙고, 서빙고동으로 높이를 현저히 낮추고 마침내 반포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서쪽으로는 해방촌 지나 둔지산에서 외국군 주둔지를 부려놓고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매봉산 정상 팔각정에서 바러본 한강 전경Ⓒ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1강(제6기 제11강)은 2024년 6월 9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3번출구에서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대역3번출구-살곶이다리-응봉(선돌개)-매봉산(한강/중랑천조망)-두모포/동빙고터/사한단터-점심식사겸뒤풀이-독서당터-벌아현-한강진-이태원부군당/유관순추모비/외국군주둔지조망-회나무길-해방촌-호국신사108계단-이태원터-숙대입구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6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왕들의 지혜, 독서당 가는 길>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역과 원은 관리나 상인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한 곳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교통과 통신을 돕기 위해 역원제(驛院制)를 실시하였는데, 역이란 말을 준비해 놓은 곳이고, 원이란 사람들이 쉬거나 잠을 자는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춘추 전국 시대부터 있었고, 몽골은 이 제도를 바탕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몽골의 침입을 겪었던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역과 원을 세웠고, 그것이 조선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하나씩,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랏일 때문에 여행길에 오른 관리들은 이곳에 들러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이용했으며 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중요한 공문은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나 지방에서 걷은 세금을 운반하기도 했습니다.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공 숙박시설로 역(驛)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대개 역 주변에 세웠으며, 나랏일 때문에 여행하는 관리들이 들러 쉬거나 잠을 잤습니다.
원 제도는 고려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병자에게 약을 나눠주기도 하고 은퇴한 관리를 위해 기로연(耆老宴)을 베푸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의 네 곳의 원과 동, 서 활인원(活人院)에 응급 구제기관인 상설 진제장(賑濟場)이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되었는데 해당 지역에는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 향리, 관리를 원주(院主)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잡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원은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하여 공용 여객의 숙식을 고을이나 역에서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폐해가 많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변모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역에 참점(站店)을 설치함으로써 원은 그 모습을 감추고 사리원, 조치원, 인덕원 등 지명만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큰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도시와 마을을 잇는 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있다고 해도 사람이나 말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나랏일을 보는 관리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도 여행 중에는 길을 잃기 쉬웠는데 이때 역과 원은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며,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